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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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처럼 유럽의 미시사를 살펴볼 수 있을 책,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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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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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끝에는 반짝이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단다. 그걸 네게 전하고 싶었어."

미나토 가나에 <미래> p18 / 소미미디어


'고백'과 'N을 위하여' 등에서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했던 미스터리의 여왕 미나토 가나에의 새로운 작품. 사실 그녀의 작품을 드라마와 영화로 접했던 나는 활자로 된 그녀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그토록 미나토 가나에 작품이 일본에서 영상화가 잘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본 미스터리 중에 '이야미스'라는 장르가 있다.

싫다라는 '이야'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말로 불쾌한 분위기와 금기를 다루는 소재 등으로 읽고 나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미스터리인데,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 그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 역시 이 장르에 속하는 듯하다.

불쾌하지만 놓을 수 없는 재미를 주는 책이다.


​아빠가 갑작스럽게 죽자 엄마는 충격으로 때로는 인형이 되었다가 때로는 사람이 되는 극도의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든다. 이를 홀로 감당해야하는 10살 소녀 아키코의 앞으로 20년 후 미래의 자신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고, 아키코는 그때부터 미래의 자신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쓴다. 


서간문 형태로 이어지던 소설은 각 에피소드로 새로운 장이 전개되며 아키코의 주변 인물들, 아빠와 엄마, 친구 아리사, 시노미야 선생 등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모두에게는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아동 학대, 학교 폭력, 성추행, 매춘, 아동성매매 등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들이 아이들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제대로 된 어른은 찾기 어렵다.

이런 가짜 어른들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 

그리고 과거 아키코의 엄마, 아빠에게 벌어진 감추고 싶은 슬픈 비밀이 드러나는데.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아이에게는 올바른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책은 읽는 내내 한심하고 이기적이기만 한 어른들의 작태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삶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에게 작지만 희망찬 미래가 찾아올 수 있는 것 같다.


"미래나 어른이라는 도착점은 한없이 멀게 느껴져서 상상만해도 숨이 막힐 것 같지만, 

즐거운 일을 조금 앞에 두고 거기를 향해 똑바로 선을 긋듯이 나아가면 의외로 금방일지도 몰라. 그런 느낌 아니었니, 아키코?"

미나토 가나에 <미래> p210 / 소미미디어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미래가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망 속에 머물러 있다면 그건 끔찍한 현재의 반복이다. 현재의 어둠을, 늪과 같이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진탕을 벗어나려면 한 걸음 한 걸음 어쨌든 앞으로 내딛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미래가 찾아온다.


학대에 몰린 아이들, 요즘 끔찍한 뉴스들을 보면 이런 상황이 내 주변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때 나는 아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 겠다 다짐한다.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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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
아사이 마카테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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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동 속에서 안타깝게 헤어져야 했던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기에는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고귀한 분위기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음이 안타깝다.

자연을 본 땄으면서도 절제의 미가 살아있는 일본식 꽃꽂이 같은 소설이랄까.



19세기 후반 개국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가>는 여류소설가 미야케 가호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결혼 후에도 명성과 부를 누리며 남부럽지 않은 생을 살아서 그런가 새로운 소설이 잘 쓰이지 않던 차에 가호는 일본 고유의 시를 배우던 시절 스승인 나카지마 우타코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스승을 찾아간 그녀는 스승의 부탁으로 쌀쌀 맞지만 일처리는 확실한 스승의 하녀 스미와 함께 스승의 문서들을 정리하던 와중 스승이 남겨둔 젊은 날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고, 소설 속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카지마 우타코, 그녀의 본명은 나카지마 도세로 에도의 여관 이케다야의 외동딸이다. 가업을 잇기 위해 마음에 차지 않는 남자들과 선을 보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그녀의 마음에 팍 꽂힌 남성이 있었으니, 미토 번의 무사 하야시 모치노리. 한번 밖에 보지 못한 남자에게 마음이 빼앗겨 상사병을 앓던 도세는 강아지를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모치노리가 발견하고 찾아준 것을 계기로 그의 눈에 들게 되고, 두 사람은 그 이상의 만남도 없이 서로를 그리워하다 끝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어울리지 않는 무사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을 반대하던 어머니도 도세의 굳은 결심과 모치노리의 솔직함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도세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데.


비교적 예법에도 자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던 부유한 상인 계급인 조닌이었던 도세는 겸약하고 매사 예법에 철저한 무사 집안에 들어가 갖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남편은 수시로 타지에 나가 집에 오는 날이 손에 꼽고, 시누이 데쓰와도 갈등하며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던 도세. 귓동냥으로 듣는 정보에 의하면 남편이 속한 미토 번은 대대로 교토에 있는 황실을 모시며 황제의 뜻대로 외세를 배척하고 쇄국하는 존왕양이 지지 세력이었다. 하지만 전임 번주 나라아키의 개혁으로 불만을 품은 상층 무사들은 막부 체제를 유지하려는 뜻을 품은 좌막파 성격의 '제생당'파로, 나라아키와 존양론을 지지하는 중하층 무사들은 '천구당' 파로 갈려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었다.


모치노리는 천구당 파의 리더이지만 도세의 영향 탓인지 개인적인 신념이 달라서인지 점차 민초를 생각하고 양이보다 현실적인 방식을 검토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하지만 천구당 내 급진적인 강경파이자 시누이 데쓰의 정혼자 고시로는 가혹한 세금 수탈로 힘들어하는 농민들과 함께 현재 우유부단하기만 한 번주를 바꾸려는 반란을 일으키고, 천구당과 제생당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다. 


천구당의 식솔들은 제생당에 의해 옥사에 갇히게 되는데, 그 곳에서 지옥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을 1년 가까이 이어가던 도세와 시누이. 매일 처형이 이뤄지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도세는 남편 모치노리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결연한 의지를 다잡는다. 하지만 남편의 생사에 대한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세는 옥에서 풀려나 시누이와 함께 에도로 도망쳐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리는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와카를 짓는 가인 우타코로 불리며 명성을 얻은 도세. 제생당 파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는 그녀는 오랜만에 찾은 미토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사실 외피만 사랑 이야기지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전 막말의 이권 다툼과 신념과 현실 사이의 갈등, 이루지 못한 대의 등 일본 근대 역사의 한 줄기를 훑는 시대 소설이다. 



"죽으려고 돌아온 남편을 이 여자는 왜 설득하지 못했을까.

할복이 사무라이의 명예라고 말하며 흥분하는 남편을 도롱이와 삿갓으로 변장시키고 왜 먼 곳으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길은 없었을까.

그렇게 싸우는 길은 없는걸까.

사무라이의 긍지와 뜻을 버리고 나와 함께 조용히 살아 주실 수 없나요?"

아사이 마카테 <연가> p276 / 북스피어


조닌 집안이라는 배경을 가진 발랄한 말괄량이라는 여주인공 캐릭터의 특성상 당시 신념을 위해 목숨을 아깝게 여지기 않았던 무사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색다르다.


사무라이면 당연히 지켜야할 충절에 대한 부조리함을 꼬집는게 너무 통쾌했다.

이렇게 삶의 의지가 강했기에 도세는 끝까지 자신의 님을 마음에 품은 채 살아남아 자신의 뜻을 끝내 이룬다.


여류작가 미아케 가호와 현재 일본 화폐에도 새겨져 존경받고 있는 히쿠치 나쓰코, 그리고 역사 속에서는 한 줄 밖에 등장하지 않았던 히쿠치 나쓰코의 스승 나카지마 우타코를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 살려낸 작가는 당시 남편에 종속되어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여성의 삶을 보다 독립적이고 강인하게 그려낸다. 요즘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재해석된 트렌디한 시대소설이지만 여전히 결혼 생활은 남편을 기다리고 그 뜻을 거역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답답함이 없는 건 아니다.



왜 작가는 액자식 구성을 택했을까? 

도세의 젊은 날을 회상하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 가호의 시선을 빌렸고(물론 이건 이야기 상의 반전을 위해서였다),

개국 전 각 번에 속한 사무라이의 이권 다툼을 거기에 관여하지 못한 아녀자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더 감정적으로 절제된 느낌으로 사건의 부조리함과 별 것 아닌 신념에 애먼 목숨을 바쳐야 했던 사람들의 허망함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재정이 넉넉한 가가 번은 기질이 대범하더군. 온난한 사쓰마와 조슈도 주머니가 넉넉하지.

하지만 미토는 번이나 사람이나 다 가난했어. 미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너무 진지해.

검소함을 너무 받들어 융통성이 없어졌고, 그 울분을 내분으로 터트리고 만 거지.

지나친 가난과 억압이 무서운 까닭은 사람의 품을 좁혀 버리기 때문이야.

품이 좁아지면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뒤탈이 두려워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 모르게 되지.

생각해보면 교토의 조정 고관들은 또 얼마나 가난했나.

그러나 막말 동란기에 계략을 품은 제번으로부터 돈을 받고 멋대로 칙령을 내려서 정치가 혼란해지는 원인을 만들었겠지."

아사이 마카테 <연가> p332 / 북스피어


일본 역사에 문외한이어서 따라가기 힘들 법한 스토리인데 책 앞 뒤, 그리고 간간히 TMI라 싶을 정도로 상세하게 주석이 달려있고, 일본의 전통 문화에 대한 주석도 자세해서 이해가 쉬웠다. 


다만 너무 많은 주석은 가끔 감정 이입을 방해할 때도 있어, 각 사건에 대한 소개는 별첨으로 빼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들지만, 오랜만에 읽은 로맨스가 역사적 배경까지 탄탄해 만족스러웠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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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행복 : 공리주의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4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미화 옮김 / 이소노미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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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utilitarianism'라 하면 마치 공식처럼 따라 붙는 말이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래서 공리주의는 산술적인 개념처럼 들린다. 실제로 벤덤이 주장한 공리주의는 굉장히 정량적인 지표같다.

계산이 가능한 행복, 그래서 100명의 행복을 위해 1명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무시무시한 이론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자유론'의 저자로만 인식되던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그가 '공리주의'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것을 이소노미아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타인의 행복>을 통해 처음 알았다. 질적 공리주의라는 말은 들어는 봤지만 벤덤의 이론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원문을 읽은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을 계량이 가능하다 믿었던 벤덤의 사상을 수정하면서 쾌락의 질을 중시했다.

그리고 엄청난 설득가는 이 책을 통해 행복을 도덕의 원리로 가져오기도 한다. 

게다가 앞에 다룬 천재 칸트의 도덕 이론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공리 또는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받아들이는 이 이론은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행동이고, 행복과 반대되는 상황을 초래할수록 잘못된 행동이라고 주장합니다.

행복이란 고통의 부재와 쾌락을 의미하고, 불행은 쾌락의 결핍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앞서 읽은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이소노미아의 '굿윌')에서 칸트는 도덕을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하나의 법률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칸트에게 도덕은 형식이다. 그는 경험(그리고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을 강조하며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탐구했다. 모든 목적을 배제하고도 오롯이 남아 있는 것, 그것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선한 의지로 모두에게 보편적인 법률과 같다. 


칸트의 도덕이 형식만 강조하다보니 실제적인 인간의 삶은 배제된, 마치 무중력의 이론 같이 느껴졌다.

반면 밀의 도덕은 우리의 상식 속에서 팔팔하게 뛰는, 살아있는 개념처럼 보인다.


칸트가 도덕을 경험을 배제한 형식으로 봤다면, 밀의 도덕은 내용이다. 이 내용은 경험을 통해 습득되며 우리의 도덕은 도덕감정을 통해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작동된다. 도덕을 지켜야하는 동인으로 교육, 여론, 법률 등 강제적인 처벌과 같은 외적인 처벌과 양심의 가책과 같은 내적인 처벌을 든다.


또한 밀은 칸트가 설명하지 못했던 도덕의 제 1원리를 공리주의로 상정한다. 밀이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감소를 뜻한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행복의 총량으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도덕이 상충하는 상황을 칸트의 도덕철학이 설명할 수 없을 때 밀이 주장하는 공리의 기준으로 그 우선순위를 가릴 수도 있다.


편집 여담에서 밀의 철학을 '실용적'이라고 평하는데, 정말 동의가 되었다.

밀이 제시하는 사례는 실제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감정, 욕망에 맞닿아있다.


특히 공리주의와 정의의 관계를 설명하는 5장에 나타나는 문제 - 한 사람의 개인적인 자유나 재산을 빼앗는 사례, 잘못된 법에 의해 부당하게 귀속된 권리에 관한 사례, 인과응보에 관한 사례, 신뢰를 저버리는 일에 관한 사례, 편파성이 문제되는 사례-는 지금까지도 정의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토론거리가 되지 않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불의에 의한 사회적 문제도 거의 대부분 밀이 제시하는 범주에 포함되어 있어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밀은 마치 불변으로 보이는 정의도 자의적일 수 있으며 사회적 공리를 적용해야만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의라는 것이 하나의 절대적 가치였다면 오늘날 불의와 정의 사이에서 이토록 많은 논쟁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밀에게 도덕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여러 도덕이 존재할 수 있고 인류가 문제를 극복해온 것처럼 도덕도 발전상태에 따라 개선될 수 있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약간 나이브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철학이 훨씬 인간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의 철학에서 인간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때문일까.

칸트의 철학을 떠올리면 혼자 고집스럽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외로운 인간이 보였는데, 밀의 철학은 주변과 무한히 연결되어 있는 사회 속에 선 인간이 보인다.


아무튼 철학 고전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정신줄 팽팽하게 당겨준 이소노미아의 친절하고 정성스런 편집 덕분에 마음에 탁 와닿는 철학자 한명을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고맙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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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타리안 : 솔페리노의 회상 - 개정판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6
앙리 뒤낭 지음, 이소노미아 편집부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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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타리안 Humanitarian'은 인도주의를 뜻한다.

나도 이 단어를 이소노미아 인류천재들의 지혜 시리즈를 통해 처음 알았다.


한때 일터 인근에 적십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있었고, 매년 내 앞으로 후원을 위한 고지서가 날아오는 정도로 알고 있었던 적십자사, 사실 국립혈액원이랑 비슷한 구호 단체로만 알았다. 이런 무식한 나를 반성해본다.


<휴머니타리안>은 앙리 뒤낭이 쓴 '솔페리노의 회상'과 이후 그의 제안으로 여론이 형성되어 이르게 된 '제네바 협약'까지를 다루고 있다. 

앙리 뒤낭은 철학자도, 작가도 아닌 식민지에서 곡물 유통을 하던 사업가였다. 


그런 그가 순전히 자신의 사업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 황제를 만나러 이탈리아 전장으로 달려갔다가 목격하게 된 전쟁의 참상. 그는 생생한 언어로 그때의 참혹함을 기록에 남긴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솔페리노 전투는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에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전쟁이었다. 당시 많은 프랑스인과 그 식민지에 속한 용병들이 참전했고, 앙리 뒤낭에 따르면 이들은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전쟁은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광기와 혐오, 분노, 적개심 같은 악의 감정을 남긴다.

전장에서 일어나는 숱한 보복들은 끔찍함에 읽는 내내 마음을 쬐게 만들었다.


그는 3장부터는 전투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다. 

부상병들의 상황은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전장에서 시신들 사이에 버려진 부상병들은 숨이 붙어 있음에도 같이 매장되기 일쑤였고, 부상 정도와 상관 없이 적절한 간호를 받지 못해 방치된 채 죽어갔다.

특히 적군인 오스트리아 군이 받은 대우는 더욱 처참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도덕심과 저 많은 불행한 부상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인간의 희망이 용기를 북돋아 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는 뭔가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앙리 뒤낭 <휴머니타리안> p105 / 이소노미아


1차 집결지인 카스틸리오네는 국적 따위를 가리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부녀자들이 앙리 뒤낭을 감동시킨다. 하지만 비전문가인 이들의 간호는 고통을 덜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브레시아는 좀 더 상황이 나았다. 도시 전체가 큰 병원으로 바뀐 이곳에는 행정적인 처리가 조금 더 체계를 잡아가고, 마을 주민들도 열정적으로 이들을 돕는다. 하지만 민간의 도움은 지난한 재난 상황 속에서 금세 지쳐간다.


큰 도시인 밀라노에서도 열정적인 민간인들의 도움이 빗발친다. 그러나 이런 과도한 관심이 때로는 의료 서비스 제공의 효율성을 저해하기도 한다.

앙리 뒤낭은 이런 상황에서 전문적으로 교육된 구호 자선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편집 여담에 따르면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인류애적 관점이라면, 인도주의는 전쟁, 기아, 질병처럼 매우 극단적인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면서 '도울 힘이 있는 사람이 도와야겠다며 활동하려는 마음'이다.

휴머니즘보다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다.


앙리 뒤낭은 인도주의적 관점으로 앞으로 미래에도 이와 같은 끔찍한 전쟁을 인류가 피할 수 없다면, 전시가 아닌 평시에 전문화된 구호단체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 숱하게 재현되어 온 선량한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 훌륭한 자선 정신을 열거하며 자신이 믿고 있는 인간의 선함과 인도주의적 정신을 자신의 책에 피력한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작은 기적들은 앙리 뒤낭의 글로 세상에 알려지고, 그의 바람은 전장에서 중립적 지위를 가지고 구호 활동을 펼치는 단체 적십자사 설립과 제네바 협약으로 실현된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희생자 보호를 위한 국제조약으로 첫 협약이었던 1864년에는 12개국 정부가, 현재는 196개국이 가입해있다고 한다. 


​그 어떤 철학적인 논의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더욱 분명하고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는 앙리 뒤낭의 <휴머니타리안>.

이소노미아는 편집 여담을 통해 지금처럼 혐오와 적대감이 난무한 시대에 그보다 더 극한의 전시상황에서 '우리 인류가 광기에 운명을 맡기는 대신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고 다같이 노력한 증거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 글을 읽고 이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니 마음이 벅찼다. 그리고 그간의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국적을 따지지 않고 헌신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이탈리아 북부 마을의 부녀자들처럼, 타인을 좀 더 환대할 수 있는 내가 되길.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적인 순간을 선사하는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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