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4 세트 - 전4권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발은 스스로 살기 위해 일어났으되, 가는 곳은 여럿이 함께 사람다웁게 살아가는 세상을 세우는 길이다.

약한 백성은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원하나 그 마음이 모이지 않은 때문이다."

황석영 <장길산> 2권 p982 / 창비



1권에서 길산의 출신 배경과 함께 주요 캐릭터들의 도원결의가 중심이었다면, 2권에서는 조선 곳곳에 관가를 중심으로 한 부조리와 수탈 당하고 있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길산은 백성을 활빈하려는 대의를 품고 의형제들과 앞날을 도모해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길산은 배움을 얻기 위해 금강산에 있는 운부대사를 찾아가서 어떤 도 보다도 백성들의 실제 고통을 이해하려면 스스로 농민이 되어 그 마음을 헤아려봐야함을 깨닫고 몸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역병이 도는 마을을 구호하며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길산이 목도한 현실은 뿌리가 없는 광대로서 체념 가득한 채 바라보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조선은 양반을 위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빼앗긴 세상인 것이다. 고려 권문세가들의 땅을 몰수해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제도를 도입했던 조선이란 나라는 후기에 가서 권력자들의 탐욕으로 부패하고 백성들은 최소한의 삶도 영위하지 못한 채 그들의 부를 불려주는 밑장 같은 신세가 되었다. 불만을 품은 자는 억울하게 형을 살고, 잘못하면 목숨을 빼앗기기도 했다. 

활빈을 결심한 길산은 신체적으로 강해지기도 했지만 정신적으로도 모든 것을 품고 꿰뚫는 깊음이 배인 듯 하다. 



의형제들의 삶에도 새로운 변화가 생겨난다. 

화적단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소금장수 선흥은 고향 장연에서 부역에 동원되었다가 횡령을 일삼는 지방 관리의 부조리함에 항거했다가 억울하게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땅도 빼앗기고 평생 관가의 눈치나 보며 살아야하는 삶에 환멸을 느껴 동무인 첫봉의 밀무역을 방해하고 일가를 죽인 삼백이네 일당을 치고 달마산의 두령이 된다. 


도사공이었던 우대용도 춘득이네 상단에서 자리를 얻어 장사치로 다시 시작하지만 어음 사기를 당하고 난 후 차라리 자신의 세력을 조성해 수적이 되기로 결심한다. 

갑송은 아내 도화가 바람이 나서 자신의 노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속세의 모든 미련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운부대사를 찾아 금강산에 입산한다.


송도 거상 배대인의 딸과 혼례를 올린 박대근은 우연히 인삼을 재배하는 기술을 가진 모녀를 돕게 되고, 그들을 활용해 송도 시장의 판도를 바꿀 계획을 세운다. 이런 새로운 시도를 좋게 본 배대인은 박대근에게 모든 재산과 사업권을 물려주게 되는데. 박대근은 아마도 길산의 든든한 뒷배가 될 것 같다.


선비 김기는 자신을 파멸시킨 여첨지네 사노가 된 딸이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길산의 도움으로 딸과 직접 조우하자 자신의 사사로운 원한을 내려놓고 천민의 마음이 되어 길산과 대의를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새롭게 합류하게 된 인물들도 생겨난다. 왕실에 뇌물을 주고 불법적으로 나라의 땅에 있는 재물을 착복하는 잠채꾼들. 이런 불법적인 채금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 봉기를 하던 김선일은 길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제하게 되자 길산의 충직한 하수인이 된다. 


대기근이 들자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춘궁기에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만들어진 환곡제도는 탐욕스러운 관리들에 의해 악용되어 각종 이자 부담만 더해져 백성들은 굶주려간다. 이를 참지 못하고 민변을 주동했던 최흥복은 관리를 살해한 후 세상을 등지고 자비령의 두령이 되는데.  자비령으로 세를 옮기려는 길산과 만나 뜻을 같이 하게 된다.


길산과 엇갈린 사랑을 하는 여인 묘옥이 자신을 위해 모든 걸 잃은 경순에게 마음을 주고 부부의 연을 맺으려 마음을 먹는 것은 너무나 이해가 가는 전개다. 하지만 묘옥을 제외하고 2권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 대다수가 자신들의 색정과 탐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 보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보는 재미 때문이겠지만 홍천수를 꾀었던 아녀자나, 첫봉을 배신하고 주지승에게 붙어 모든 걸 발고한 고만이도 그렇고, 몸둥아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쉽게 살아가려는 것 같은 여성 캐릭터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인가 싶다. 


"우리는 걸음이요, 너희는 씨앗이며 뿌리와 같으니라.

언제 어느 곳에 가 있더라도 잊지 말아라.

너는 천대받는 백성들의 울분이 화한 마음이요, 그 손발이고, 그 머리며, 그 무기가 되어라."

황석영 <장길산> 2권 p631 / 창비



울분의 찬 백성들의 마음과 손발, 머리, 무기가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 길산.

그리고 그의 뜻에 감화되어 함께 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본격적인 활빈이 전개될 3권이 기대가 된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0일 밤의 클래식 - 하루의 끝에 차분히 듣는 아름다운 고전음악 한 곡 Collect 2
김태용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린 시절 피아노와 플룻을 배우며 클래식을 접했지만, 사실 그때 접한 클래식은 매일 처리해야 할 고역 같이 느껴졌다. 작곡가 이름이 적힌 악보를 들고 다녔지만 오래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그들을 매치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악기를 놓고 나자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클래식은 화장실이나 주차장,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가끔 스치듯 듣는 배경 음악이 되었다.



그러다 태교에 모차르트 음악이 좋다는 걸 어디서 주워 듣고 음악 어플에서 클래식을 하나씩 찾아 듣기 시작했다.

태교 클래식에 수록된 플레이리스트를 보며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등등 이들의 곡은 어떤 차이를 보이는 걸까.  



'하루의 끝에 차분히 듣는 아름다운 고전음악 한 곡'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90일 밤의 클래식>.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30일 챌린지'로 진행하며 하루에 3곡씩 태교하는 마음으로 듣고 읽었다.


책의 저자 김태용은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로 코로나로 공연장 이용이 어려워진 현실에 책을 통해서도 음악이 들리도록 '비대면 음악책'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책에는 매 챕터마다 곡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QR코드가 삽입되어 있다. 그야말로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의 해설을 보는 셈이니 도슨트와 함께 하는 미술관 구경 같은 경험이었다. 



저자는 책을 쓰며 3가지 원칙을 정했다고 한다. 첫째, 90곡 모두 특별한 이야기가 있을 것. 둘째, 난해한 음악 이론을 가급적 적용하지 않을 것. 셋째, 누구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 독자로서 감히 평하자면 그의 원칙은 이 책 곳곳에 너무나 잘 스며 들어 있었다. 



이 책은 종교음악이 태동하던 중세부터 꽃을 피우던 바로크와 18~19세기, 그리고 현대의 클래식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부터 비교적 덜 알려진 작곡가까지 전반적인 클래식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특히 클래식 무식자인 나에게 모차르트가 저질 가사를 쓴 변태라던가, 파가니니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게 된 루머, '환상교향곡'을 남긴 베를리오즈의 격렬한 사랑(그러나 그 끝은....;;) 등 유명 작곡가들의 가십 이야기들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곡이 탄생한 특별한 배경들을 알고 나니 곡이 달리 들렸고, 그 감정을 내가 공감할 수 있는지를 중점으로 클래식을 들으니 곡의 감상이 한층 풍성해진 기분이었다.



뮤지컬은 익숙하지만 아무래도 오페라는 고급 문화라는 인식이 강해서 선뜻 공연을 볼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오페라들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했다. 펜트하우스 저리가라할 막장 스토리가 이렇게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었다니. 반전이다. 게다가 저자가 친절하게 안내하는 주요 감상 포인트들까지 챙겨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터. 공연장은 못가더라도 유튜브로 공연을 찾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은 기껏해야 19세기까지의 고전 음악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내 고정관념을 깨부수어 주었다. 클래식 음악도 미술처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존 케이지의 전 악장을 침묵으로 일관한 <4분 33초>나 필립 글래스의 신디사이저 음을 베이스로 까는 <미국 사계> 등 실험적인 모습으로 혁신을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나에게 관심 밖의 영역이자 고정관념으로 점철되어 있던 클래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 준 책,

'책은 도끼다'라는 카프카의 명언이 실감나는 독서였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 - 상위 1% 아이가 하고 있는
이재익.김훈종 지음 / 한빛비즈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짜 아이의 모습을 알아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합니다."

이재익·김훈종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 p128 / 한빛비즈



이 두 PD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이재익, 김훈종 PD가 진행하는 '씨네타운 나인틴'의 완전 초창기 애청자였다. 이 팟캐스트를 3~4년 정도 정말 재밌게 깔깔 거리며 들었더랬다. 언제부터인가 KBO 소식이 곁들여지고, 내가 극장을 잘 안가게 되면서 서서히 멀어지기 전까지. 그래도 뭔가 오랜 친구처럼 내겐 친근한 두 사람이다. 나의 20세기 소년들. 


그런 두 아재를 '자녀교육법'이라는 카테고리로 만나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다. 팟캐스트에서 이재익 PD가 간간히 아들 토미 얘기를 했지만 토미의 실체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맞닥뜨릴 줄이야. 자녀 교육법도 궁금했지만, 이 두 아재가 어떤 아빠였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이 책을 읽는데 한 몫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상위 1% 아이가 하고 있는' 이라는 부제를 단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이라는 독서 지도서를 읽는 게 얼마나 설레발인지 안다. 물론 세종영재과학예술고 앞을 지날 때마다 태명을 부르며 '네가 다닐 학교'라고 대치동 돼지엄마같은 발언을 하고 있지만, 나와 남편의 교육관은 '사교육은 애가 원할 때 시킨다'이다.


하지만 놓지 못하는 건 '독서 교육',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데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은 문제 없는, 욕심을 좀 더 보태면 '출중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강남에서 자라서 강남에서 줄곧 살아온 탓에 강남키즈를 키우는 이재익 PD, 직장 가까이 살다보니 목동키즈를 키우고 있는 김훈종 PD, 두 사람은 사교육의 메카에 살아가지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아이들과 소통하고 독서와 문해력 교육을 해왔다. 물론 부모의 좋은 유전자도 있으니 아이들은 영재원과 과학고에 무난하게 진학했고, 아마도 학벌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로 살아갈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시킨 교육은 정답을 떠먹여주는 사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는 자기주도식 교육이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아이는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고 발전해나갈 수 있기에 더 나은 어른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총 4부로, 1부에서는 독서 교육을 들어가기 앞서 아이와의 교감과 독서 교육에는 아이의 성향에 맞춤하는 독서 교육과 환경을 강조한다. 2부에서는 독서교육과 문해력 향상의 기본기인 상상력, 어휘력, 사고력을 키우는 방법을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고 효과를 본 사례들을 중심으로 알려준다. 특히 책을 읽는 중간 중간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할 대화식 독서법과 어휘력을 키워줄 한자 교육의 중요성은 깊이 공감하면서 꼭 시도해봐야겠다 다짐해본다.



"아이들의 쓸데없는 소리, 황당한 생각은 다름 아닌 상상력의 부산물입니다.

상상력이란 공부에서, 특히 독해와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자산입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부모에게 혼이 난 아이는 날개를 접어버리고, 피터팬은 더 이상 날 수 없게 됩니다.

어차피 학교에서, 사회에서, 친구 집단에서 접히고 꺾일 날개인데 왜 부모가 앞장서서 꺾어버리나요?

더 오래 상상의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그것이 훗날 잘 읽고 잘 쓰고 말 잘하는 학생으로 자라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테니까요."

이재익·김훈종 <서울대 아빠식 문해력 독서법> p90~91 / 한빛비즈



본격적인 독서법에 대해 설파하는 3부에서는 아이가 독서에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어떤 장르의 책이든(게다가 웹툰이나 웹소설이든) 아이가 몰입하는 환경을 강조한다. 오히려 결핍이 더 왕성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안일하게 구성된 전집 보다는 아이와 도서관이나 서점 나들이를 가서 아이가 진짜 읽고 싶어하는 책들을 고를 수 있게 하라는 조언 역시 마음에 새겨본다.



내가 책을 느리게 읽는 편이라 사실 속독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는데, 두 저자 모두 속독은 책을 건성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요점을 파악하고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전략이라며 풍부한 독서량과 요약, 필사 등 훈련을 통한 독서력을 통해 다져진 속독을 적극 권한다. 여기서 김훈종 PD가 제시하는 요약과 필사 훈련은 나부터 써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독서력과 문해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언어능력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다. 말하기 능력과 표현력 향상에 부스터가 되어 줄 킥은 항상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 같다. 윽박지르지 않고, 아이와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자세. 두 저자는 자신들이 아이들과 토론했던 주제들을 예시로 덧붙이며 구체적 방법도 친절히 안내한다.


아빠들은 점점 경쟁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조기교육이 날로 심해져 아이들의 목을 조이는 교육 현실을 개탄한다. 누가 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멈췄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반면 자신의 자녀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상위 1%의 인재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부모란 어쩔 수 없이 이런 양가적 마음을 안고 사나보다.


그래도 나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한 교육법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이가 거친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었던 아빠의 고민과 마음도 함께 읽을 수 있었다. 나도 책 속에서 수많은 지혜를 얻어 세상을 좀 더 현명하게 살아가는 아이가 될 수 있게 우리 아이를 키워야 겠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려진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감정의 수로가 꽉 막혀서 삶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마리오가 세심하게 제공하는 황홀한 부부생활에 취해 

내 존재의 의미를 가정주부로만 한정지은 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마리오의 만족감과 기쁨, 날이 갈수록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의 삶을 

내 자존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실수는 그와 함께 있어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그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다."

엘레나 페란테 <버려진 사랑> p275 / 한길사



나쁜 사랑 3부작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버려진 사랑>은 제목에서 보여주듯 남편에게 버림 받은 아내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앞서 읽은 <성가신 사랑>과 같은 스토리가 주는 충격이나 반전은 없지만, 여주인공 올가의 확실한 성장을 보여준다.


(엘레나 페란테 소설 속 인물들 거의가 그러하듯) 나폴리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 토리노에 정착한 올가, 소설을 몇 편 낸 작가지만 결혼 후 그녀의 모든 삶은 남편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헤어지자고 말한다. 남편은 이따금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혼란을 느껴 이런 말을 해왔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이번에는 다르다.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 그것도 5년 전 바람이 났던 미성년자와 다시 재결합한 것! (왝 징그러...)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자 올가의 내면은 무너져 내린다. 간단한 일조차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마치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라도 빼앗긴 양 주저 앉아버린 올가의 일상. 방금 하려고 마음 먹은 일을 금세 잊고 다른 상황에 빠지고, 분노조절 장애 환자처럼 정상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며, 너무나 일상적인 행동에도 패닉에 빠져 멍해지기 일쑤다.


올가는 어린 시절 자기 마을에 있던 버림 받은 여자를 떠올리며 자신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다 자위하다가도 그 여자의 환영에 시달린다. 안나 카레리나와 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될까 두렵다. 


자신에게 아직 여자로써 존재감이 있음을 확인하려 아랫층에 살고 있는 늙은 음악가 카라노를 유혹해 육체적 관계를 시도하지만 이내 심한 자기 혐오에 빠진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이유를 끊임없이 찾으려하는, 미련에 질척거리는 올가가 너무 보기 버거웠다.



그런 올가에게 엄청난 패닉이 닥친다. 남편이 데려온 개 오토와 아들 잔느가 동시에 아프기 시작하고, 집 전화는 먹통에, 휴대폰은 망가지고, 얼마 전 교체한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진 올가는 여러 번 이성의 끈을 놓지만 어느새 자신이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남편과 자신을 분리하고 스스로 일어설 준비를 시작한다.



어쩌면 '사랑과 전쟁'에서 숱하게 만난 부류의 이야기지만 그 감정은 너무나 집요하고 생생해서 마치 실제 경험담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자아 없이 가족에게만 헌신해 온 여성들이 느낄 두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편의 미래를 곧 나의 미래라 여기며 살았던 삶은 버림 받는 순간 방향성을 상실한다.

남편이 자신에게 성적 매력을 잃고 젊고 생기있는 여자를 찾아 나선 것을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에게 배여버린 '엄마 냄새' 때문이라 생각하는 장면은 너무나 씁쓸하다. 가부장제 중심의 대상화된 존재로서의 아내로 스스로를 여겨왔기에 올가의 삶이 무너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그래도 올가는 다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자기 폄하와 혐오에서 벗어나 한뼘 성장한 것이다. 남편으로 가득찼던 머릿 속을 비우고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도 되었다.

아이들이 있는 한 남편의 흔적을 온전히 지울 수 없겠지만, 올가는 이마저도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



"그날 저녁 마리오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다시 안나 카레리나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부분과 망가진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어보았다.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그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이제 나를 빨아들이는 심연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가 어린 시절의 일부분인 나폴리의 버림받은 아내마저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파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 심장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지 않았다.

나와 그녀를 잇고 있던 혈관은 끊어져 버렸다.

'불쌍한 여자'는 오랜 사진 속 형상처럼 변해버렸다.

피가 흐르지 않는 화석 같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엘레나 페란테 <버려진 사랑> p361 / 한길사



이제 올가는 저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삶을 응원해본다.

한편 나는 엘레나 페란테 소설의 위험성을 이 소설을 통해 절절하게 경험했다.

소설 속 인물이 가진 감정에 푹 절여질 때까지 내몰다가 저 홀로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공허함이 짙게 남아서 지금도 감정이 주체가 안된다고 할까. 요물 같은 소설이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리의 발견 (양장) - 앞서 나간 자들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에 대한 대단한 책이라는 소문을 익히 들었다. 읽기 전부터 설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