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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사랑 ㅣ 나쁜 사랑 3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정말이다. 나는 바보 같았다.
감정의 수로가 꽉 막혀서 삶의 에너지가 흐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마리오가 세심하게 제공하는 황홀한 부부생활에 취해
내 존재의 의미를 가정주부로만 한정지은 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마리오의 만족감과 기쁨, 날이 갈수록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의 삶을
내 자존감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도 큰 실수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실수는 그와 함께 있어도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그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었던 일이다."
엘레나 페란테 <버려진 사랑> p275 / 한길사
나쁜 사랑 3부작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버려진 사랑>은 제목에서 보여주듯 남편에게 버림 받은 아내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앞서 읽은 <성가신 사랑>과 같은 스토리가 주는 충격이나 반전은 없지만, 여주인공 올가의 확실한 성장을 보여준다.
(엘레나 페란테 소설 속 인물들 거의가 그러하듯) 나폴리 출신으로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 토리노에 정착한 올가, 소설을 몇 편 낸 작가지만 결혼 후 그녀의 모든 삶은 남편과 아이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헤어지자고 말한다. 남편은 이따금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혼란을 느껴 이런 말을 해왔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이번에는 다르다.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 그것도 5년 전 바람이 났던 미성년자와 다시 재결합한 것! (왝 징그러...)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자 올가의 내면은 무너져 내린다. 간단한 일조차 스스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마치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라도 빼앗긴 양 주저 앉아버린 올가의 일상. 방금 하려고 마음 먹은 일을 금세 잊고 다른 상황에 빠지고, 분노조절 장애 환자처럼 정상적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며, 너무나 일상적인 행동에도 패닉에 빠져 멍해지기 일쑤다.
올가는 어린 시절 자기 마을에 있던 버림 받은 여자를 떠올리며 자신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다 자위하다가도 그 여자의 환영에 시달린다. 안나 카레리나와 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될까 두렵다.
자신에게 아직 여자로써 존재감이 있음을 확인하려 아랫층에 살고 있는 늙은 음악가 카라노를 유혹해 육체적 관계를 시도하지만 이내 심한 자기 혐오에 빠진다. 남편에게 버림 받은 이유를 끊임없이 찾으려하는, 미련에 질척거리는 올가가 너무 보기 버거웠다.
그런 올가에게 엄청난 패닉이 닥친다. 남편이 데려온 개 오토와 아들 잔느가 동시에 아프기 시작하고, 집 전화는 먹통에, 휴대폰은 망가지고, 얼마 전 교체한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진 올가는 여러 번 이성의 끈을 놓지만 어느새 자신이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남편과 자신을 분리하고 스스로 일어설 준비를 시작한다.
어쩌면 '사랑과 전쟁'에서 숱하게 만난 부류의 이야기지만 그 감정은 너무나 집요하고 생생해서 마치 실제 경험담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자아 없이 가족에게만 헌신해 온 여성들이 느낄 두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편의 미래를 곧 나의 미래라 여기며 살았던 삶은 버림 받는 순간 방향성을 상실한다.
남편이 자신에게 성적 매력을 잃고 젊고 생기있는 여자를 찾아 나선 것을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에게 배여버린 '엄마 냄새' 때문이라 생각하는 장면은 너무나 씁쓸하다. 가부장제 중심의 대상화된 존재로서의 아내로 스스로를 여겨왔기에 올가의 삶이 무너진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그래도 올가는 다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자기 폄하와 혐오에서 벗어나 한뼘 성장한 것이다. 남편으로 가득찼던 머릿 속을 비우고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도 되었다.
아이들이 있는 한 남편의 흔적을 온전히 지울 수 없겠지만, 올가는 이마저도 받아들일 여유가 생겼다.
"그날 저녁 마리오가 돌아가고 나서 나는 다시 안나 카레리나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부분과 망가진 여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목을 읽어보았다.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그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들은 이제 나를 빨아들이는 심연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가 어린 시절의 일부분인 나폴리의 버림받은 아내마저
마음속 어딘가에 깊이 파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 심장은 그녀의 가슴속에서 뛰고 있지 않았다.
나와 그녀를 잇고 있던 혈관은 끊어져 버렸다.
'불쌍한 여자'는 오랜 사진 속 형상처럼 변해버렸다.
피가 흐르지 않는 화석 같은 과거가 되어버렸다."
엘레나 페란테 <버려진 사랑> p361 / 한길사
이제 올가는 저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삶을 응원해본다.
한편 나는 엘레나 페란테 소설의 위험성을 이 소설을 통해 절절하게 경험했다.
소설 속 인물이 가진 감정에 푹 절여질 때까지 내몰다가 저 홀로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공허함이 짙게 남아서 지금도 감정이 주체가 안된다고 할까. 요물 같은 소설이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