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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 아킬레우스의 노예가 된 왕비
팻 바커 지음, 고유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전쟁 영웅은 결국 연쇄 살인마나 다름없죠.'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구절인데 참 오래 가슴에 남았었다. 나에겐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놓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가 얼마나 용맹하든, 뛰어난 지략을 가졌든 그저 내 삶을 파괴한 가해자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는 존경받는 천하 통일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우리나라에게는 한반도를 피로 물들게 한 침략자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신화 속 영웅들은 영원히 영웅 그 자체로 박제되어 있는 듯 하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이며, 설령 실화라고 하더라도 피해를 본 민족들의 원한이 지금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영원한 영웅 스토리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와 그의 애첩이라고 알려진 브리세이스의 이야기를 여성적인 관점으로 다시 그려낸 소설이다.
"위대한 아킬레우스. 영민한 아킬레우스. 눈부신 아킬레우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 그를 가리키는 수많은 별칭들. 우리는 그중 어떤 것으로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도살자'라고 불렀다." -p11
첫문장부터 이 책의 관점은 명확하다. 전장에서 적군을 무찌르며 용맹함을 과시하는 영웅 서사 뒤에 가려진 피해자들의 이야기, 특히 정복자들의 전리품이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것.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연합군이 트로이로 가기 전 리르레소스를 약탈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좁은 성채에 갇혀 전쟁 상황을 지켜보는 여자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전쟁 장면은 그 어떤 전쟁 소설보다 참혹하다. 숨 쉬기 조차 힘든 더운 공기 속에서 젖먹이 아기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보채고, 소년들은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얼어 붙어간다. 전쟁에 패하면 여자들은 젊음으로 그 쓸모가 평가된다. 좋게 평가된다해서 강간 그 이상의 대접도 아니지만.
리르네소스의 왕비였던 브리세이스는 눈 앞에서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아버지, 형제들을 죽이는 모습을 지켜본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남자에게 포상으로 넘겨진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며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낸다. 아킬레우스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의 친절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떠는 '생쥐'처럼 아킬레우스를 관찰하는 브리세이스.
그리스로마신화 속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가 사랑하는 여종, 애첩 등으로 불리지만 이 책 속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자신의 영예를 드러내는 상징물로, 그리고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닮은 묘한 느낌에 유아적인 집착을 보였을 뿐 '사랑'이라 설명하긴 어려워 보인다. 브리세이스 역시 아킬레우스에게 증오와 두려움을 가질 뿐이다. (물론 이후 아가멤논의 손에 넘겨진 뒤 더 모욕적인 상황을 겪으며 아킬레우스에 대한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편을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은 파트로클로스와의 편안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뿐, 아킬레우스 자체에게서 느끼는 마음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이런 감정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어떻게 자신의 가족을 죽인 남자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살아 남기 위해 사랑하는 척 연기는 할 수 있어도,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까?
이렇게 신화를 현실적으로 바라본 소설은 신화 속에서 성스럽게 포장하며 가려버린 전쟁의 이면과 남성 영웅들의 실체를 까발린다. 아가멤논에게 아폴론 신을 모시는 사제가 노예가 된 딸을 돌려달라 찾아왔을 때 그를 모욕 주며 돌려보낸 뒤 겪는 수 많은 죽음은 신의 무시무시한 재앙이라기보다는 병영의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발생한 페스트 같은 역병으로 묘사된다. 또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무찌르는 장면도 절친을 잃은 슬픔에 눈이 돌아가버린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수 많은 사상자가 쏟아지는 전쟁의 원인을 여성에게 돌리고, 그 여성을 욕받이로 삼으면서 2차 가해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됐다는 헬레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반목하게 된 원인이 된 브리세이스, 이들은 그럴싸한 핑계일 뿐 진짜 원인은 전쟁을 실제로 주도한 남성 지도자들이고, 그들의 무능력과 알량한 자존심이다.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의 빠른 발과 용맹함, 영광을 찬양하는 신화와 달리 그의 칼날 속에서 참혹하게 사그라진, 솜털이 채 사라지지 않았던 어린 생명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기억하며, 그의 어머니가 간직한 소년에 대한 추억들을 되새긴다. 이 같은 여성적 관점은 전쟁의 비참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그려낼까?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그들이 정복과 노예제도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내들과 소년들이 자행한 학살에 대해, 여자들과 소녀들을 노예로 삼았던 일에 대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강간이 만연한 병영에서 살았다는 걸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들은 좀 더 가벼운 무언가를 원할 것이다. 아마도 사랑 이야기? 나는 그들이 이 이야기에서 진짜 사랑을 잘 알아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중략)
처음에, 나는 아킬레우스의 서사에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고,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의 이야기이다." p433~434
책 표지에 적힌 '당신이 믿어온 신화가 통째로 무너지는 경험'은 전혀 절망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감춰진 이야기를 열어주어 내 시야가 확장된 기분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책, 오랜만에 의미와 재미 모두를 갖춘 소설을 만나 좋았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