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왜 책상이고 의자는 왜 의자일까?
어린 시절 종종 이런 의문을 품고는 했다. 단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튀어나왔는데, 가끔 단어의 어원을 발견하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 즐겁고 기뻤었다. 한국어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공부할 때도 어원이나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을 좋아했다.
이 책 《言語沼(언어늪)》은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 언어학을 전공한 자칭 언어 오타쿠 미즈노 다이키가 언어 초짜 호리모토 켄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며 정답을 찾아가는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저자는 각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언어 초짜 호리모토 켄이 적절한 반론을 펼치고, 언어밖에 모르는 언어 오타쿠에게 주제와 관련 있는 다른 분야를 소개해주며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흐름을 환기한다.
일본어를 다루는 책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기는 힘든 책이다. 일본어를 읽을 줄 알고 일본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으니 한번 도전해 봐도 좋을 듯하다.
<프롤로그>
やまかわとやまがわの違いー수식 관계일 때는 탁음을 붙이고 병렬관계일 때는 붙이지 않는다.
カエルはガエル、トカゲはトカゲー탁음이 있는 단어에는 수식 관계여도 탁음을 붙이지 않는다.
<1장 ‘のこと’沼>
일본어에는 ‘있다’에 해당하는 동사로 ‘いる’, ‘ある’ 두 가지가 있다. 생물에는 ‘いる’, 무생물에는 ‘ある’를 사용한다고 흔히 말하지만, 무생물에도 ‘ある’를 쓰는 경우가 있다.
사물에 애니머시(animacy, 유생성)을 느낄 때 즉, 사물이 살아있다고 느낄 때이다.
‘のこと’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김태희가 좋아”라고 한다면 TV속 연예인으로서, 화면 속 인물로서 좋아한다는 말,
“나는 김태희のこと가 좋아”라고 한다면 실제로 김태희를 만난 적이 있거나 친분이 있다는 말이 된다.
<2장 ‘バテル’沼>
소크라테스 “음에는 의미가 있으며 의미와 사물의 특징은 관련이 있다.” =음상징
헤르모게네스 “음에 의미는 없다.”
모음에는 크기감이 있다. 오>우>아>에>이
장애음(k, s, t 등)은 날카로운 이미지, 공명음(n, m, y, r, l, w)은 둥글둥글한 이미지가 있다.
→ 프랑켄슈타인이 프랑켄슈타인인 이유??
원래 단어에 탁음을 추가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된다.
<3장 ‘えーっと’沼>
필러(filler)는 정보를 전달하며 ‘えーっと’와 ‘あのー’에는 차이가 있다.
‘えーっと’는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내뱉는 표현.
‘あのー’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말할지 고민할 때 내뱉는 표현. 상대방을 배려하는 표현이므로 예의 있게 느껴진다. 따라서 “あのー, 잠깐 시간 되세요?”는 자연스럽지만 “えーっと, 잠깐 시간 되세요?”는 불쾌하게 느껴진다.
‘そのー’는 전하기 힘든 말을 전할 때 사용한다.
<4장 ‘あいうえお’沼>
일본어 자음 ‘아카사타나’ 순서는 조음점이 점점 앞으로 이동하는 순서이다.
일본어 모음 ‘아이우에오’는 혀의 위치가 ‘저 → 중 → 고’ 순서로 배치되어 있으며, 전설모음 다음에 후설모음이 나온다.
<5장 ‘パンパン’沼>
의성어는 음에 의미를 담고 있다.
p 음은 ‘장력’, ‘팽창한 표면의 파열’을 나타내며, 확장된 의미로 ‘갑작스러운 사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풍선이 팡 터지다.’,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다.’
2음절 의성어에는 음의 순서에 규칙성이 있다. 첫 자음은 촉감, 두 번째 자음은 운동을 나타낸다. 첫 음이 k일 때는 딱딱함이, 두 번째 음이 k일 때는 공동空洞이 느껴진다.
아이들은 동사보다 의성어를 더 쉽게 이해한다.
<6장 ‘を’沼>
① 벽에(に) 페인트를(を) 칠했다.
② 벽을(を) 페인트로(で) 칠했다.
①은 벽에 페인트를 일부분만 바른 느낌, ②는 벽 전체를 칠한 느낌.
‘을(を)’는 열심히 움직임을 의미하며, 임장감을 준다. 따라서 ‘일요일에 산에(に) 올랐다’ 보다는 ‘일요일에 산을(を) 올랐다’가, ‘헬리콥터로 산을(を) 올랐다’보다는 ‘헬리콥터로 산에(に) 올랐다’가 올바른 표현이며, ‘개썰매로 산에(に) 올랐다’보다는 ‘개썰매로 산을(を) 올랐다’가 임장감이 뛰어나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난세를(を) 살다/먹느냐 먹히느냐의 난세에(に) 살다’에서는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다만 주체가 난세에 많은 사람에게 배신당해 몰락한 사람이라면, ‘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난세에(に) 살았다’가 자연스럽고, 농민 출신의 주체가 스스로 난세를 헤치며 살아 성공했다면, ‘나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난세를(を) 살았다’가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