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헤어질 때 왜 사요나라라고 말할까 - 사요나라에 깃든 일본인의 삶과 죽음, 이별과 운명에 대한 의식세계
다케우치 세이치 지음, 서미현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가 선물로 준 책. 읽기는 작년 12월 초에 다 읽었지만 이제야 감상을 적는다. 그 말인 즉, 무슨 내용이었는지 거의 다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네이버 사전에 일본의 작별인사 사요나라를 검색해 보면 두 가지 뜻이 나온다.

 

감동사

1. 안녕, 안녕히 가십시오[계십시오]; 안녕히 가세요[계세요]((헤어질 때의 인사말)).

 

접속사

그러면;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기존의 그러면, 그렇다면이라는 뜻의 사요나라가 어쩌다 헤어질 때의 인사말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사요나라그렇다면이 아니라 꼭 그래야 한다면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때가 그렇다. 이별의 상황을 마주하고 이를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한 뒤, 이별을 운명으로 여겨 꼭 그래야 한다면이라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P.136

 

예부터 일본인은 불가피한 상황에 처하면 그것을 꼭 그래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면이라는 식으로 조용히 체념하고 과감하게 이별에 대처해 왔기에 사요나라를 이별의 표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P.144

 

사요나라를 그렇다면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인 꼭 그래야 한다면으로 이해한다면 상황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체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인이 이별을 고했고 아무리 연인을 붙잡아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꼭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라는 뜻에서 사요나라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런 체념식 이별은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된다.

 

다나카 히데미쓰는 사요나라-꼭 그래야 한다면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평가를 내렸다. 하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 단호하게 헤어지는 깔끔함과 아름다움의 사요나라이고, 또 하나는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아예 포기해 버리는 패배의 무상관’, ‘천박한 허무주의의 사요나라이다. -P.164

 

언어의 어원을 철학과 연관 지어 파헤치는 방식이 아주 흥미롭고 새로웠다. 그리고 우리의 안녕을 생각해 보았다. 아무 탈 없이 편안히 지내라는 뜻의 안녕’.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방을 걱정하는 다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일본인이 ‘사라바, 사요데아루나라바(그러면)’이라 하고 헤어지는 것은, 엣 ‘일’이 끝났을 때 잠깐 멈추어 서서 ‘그러면’이라고 확인하고 정리한 뒤 새 ‘일’과 마주하려고 하는 마음가짐,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이다. - P35

‘죽음을 애도하다’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도무라우弔う’이다. 이는 ‘묻다問う(도우)’와 ‘방문하다訪う(도우)’에서 온 것이다. 죽은 자의 세계를 방문하여 죽은 자의 생각을 물음을 의미한다. 상가에서 밤을 새며,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화제로 삼는 것도 그러한 행동이다.
……
죽은 자의 ‘저 편 세계’는 ‘애도하는 자’ 안에 있음을 드러내 주지 않는가.
- P61

어느 방면에서든 진실을 철저히 아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오늘처럼 상쾌한 가을 풍경에 심취해 기분 좋게 살아가는 것도, 내일을 모르기에 가능하다고도 한다. ‘내일 일을 염려 말라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는 성경 구절도 소극적인 대처방법이기는 하나, 의미심장한 말이다. - P67

즉 ‘지금’을 긍정하지만,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기보다 오히려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 P131

‘이자’는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작심하고 행동할 때 강조를 위해 사용하는 말이며, ‘요시’는 만족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며 허용을 할 때 쓰는 말이다. - P133

앞서 ‘사요나라’를 깔끔한, ‘동양풍의 체념의 미’라고 칭송했던 그가 이번에는 ‘패배적인 무상관’, ‘허무한 이별’로 표현하며 ‘사요나라를 비판하고 있다. - P154

다나타 히데미쓰가 ‘사요나라’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내린 것도 결국 이 ‘스스로’와 ‘자연스레’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나카가 반복해서 말했던 ‘체념’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큰 힘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결연한 ‘체념’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그 힘의 탓으로 돌리고 비굴하게 따르는 ‘패배의 무상관’으로서 체념인가에 대한 두 가지 평가인 것이다. - P175

말하자면 필자는 유유히 흐르는 나일 강의 한 방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 한 방울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오직 나 자신뿐이기 때문에 몇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몇만 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의연히 흐르는 큰 강물 가운데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의 존재는 작은 한 방울 물이지만, 사실은 더 큰 존재에 속하는 ‘한 방울’이다. - P181

즉 이 세계의 보편적, 집단적인 논리, 원리를 따를 때에는 ‘모노’라고 말하고, 그 때, 그 장소에서의 1회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고토’라는 언어를 쓴다고 아라키 씨는 지적했다. - P191

구키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우연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 뒤, 그 뒤에 이별이 얽혀 펼쳐지는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에 대해 독자적인 사색을 전개했다. - P196

그러나 ‘미태’와 ‘패기’만을 지닌 에로스는 자칫하면 ‘이키’의 반대인 ‘야보(촌스러움)’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요소, 가장 중요한 ‘체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됨을 구키는 설명하고 있다.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이광수 장편소설 한국현대문학전집 (현대문학) 19
이광수 지음, 김동환 엮음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삶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광수가 그렇다. 이광수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누구보다 조선을 아꼈다는 사실이 느껴지고 그에 못지않게 일본에 큰 불만과 마뜩잖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비뚤어진 애정과 잘못된 목적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기는지 그의 삶에 여지없이 드러나는 듯하다.

 

이광수의 은 지식인인 허숭이 서울을 떠나 고향인 살여울로 돌아와 농촌 운동을 전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농촌으로 돌아가 교육을 실현하려는 허숭을 비난하고 무시하던 이들이 점차 허숭에게 감화되어 조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애쓰게 된다. 그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란 무엇인지 인간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90년 전에 쓰인 소설로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혀 촌스러운 구석이 없으며 그 내용 역시 지금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젊은이들과 요즘 애들은.”을 입에 달고 사는 어른들. 불쾌한 느낌 없이 공감하며 유쾌하게 읽을 수 있었다.

 

꼭 한 번 읽어 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선생님 저는 어떡허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큰사람이 되지!" - P117

넓게 뚫린 신작로, 그리고 달리는 자동차, 철도, 전선, 은행, 회사, 관청 등의 큰 집들, 수없는 양복 입고 월급 많이 타고 호강하는 사람들, 이런 모든 것과 나와 어떠한 관계가 있나 하고 생각도 하여본다. 그렇지마는 이 모든 것이 다 이 늙은 자기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그는 해득하지 못한다.
"다 제 팔자지, 세상이 변해서 그렇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스스로 단념한다. 그에게는 자기의 처지를 스스로 설명할 힘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장래를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을 계획할 힘도 없다. 근는 모를 내고 김을 매고 거두고 빚에 졸리고, 모기, 빈대에게 뜯기고, 근심 많은 일생을 보내기에 정력을 다 소모해버리고, 다른 생각이나 일을 할 여력이 없다. 마치 늙은 부모가 오직 젊은 자녀들을 믿는 모양으로, 그는 어디서 누가 잘살게 해주려니 하고 희미하게 믿고 있다. 그에게는 원망이 없다. 그것은 조선 맘이다. - P154

"그래, 당신이 혼자서 그러면 조선이 건져질 것 같소?"
이렇게 정선이가 물을 때에,
"글쎄, 나 혼자 힘으로 온 조선을 어떻게 건지겠소? 나는 살여울 동네 하나나 건져볼까 하고 그러지. 살여울 동넨들 꼭 건져질 줄 어떻게 믿소. 그저 내 힘껏 해보는 게지. 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아니하오?" - P260

숭이가 하는 노릇도 심 안 맞는 노릇이다. 그렇지마는 조선이 오늘날에 가장 크게 요구하는 것이 이 심 안 맞는 노릇이 아닌가. 심 안 맞는 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할 터인데 적어서 걱정이다. 모두들 이해관계가 분명하고 너무들 똑똑해서 저 한 몸에 이로움이 없는 일을 매달고 쳐도 아니 하려 드는 이때다. 조선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기다린다. 어리석어서 저 한 몸의 이해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을 구한다. ‘제 앞 쓸이’는 정돈된 사회에서만 쓰는 처세술이다.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대단히 많이 떨어져서 모든 것을 새로 설시하고 부리나케 따라가려 하는 때에는 남의 앞까지 쓸어주는 사람이 많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마치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는 어른 모양으로.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밤낮 고생이다. 남에게 고맙다는 소리 못 듣고, 드리어 미친 사람이라는 비웃음 받고, 약빠른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 P386

갑진이나 정선에게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기뻐하는 일본 사람의 심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그들은 도리어 일본 군인이 어리석어서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들의 유전적인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주의로 굳어진 뇌세포는 이와 다르게 생각할 자유를 잃어버렸다. 그들로 하여금 연설을 하게 한다면, 글을 쓰게 한다면 그들의 여러 대 동안 단련된 구변과 문리는 아무도 당할 수 없는 좋은 이론을 전개하게 하고, 그들의 비평안은 능히 아무러한 일, 아무러한 사람에게서도 흠점을 집어낼 만하게 날카롭다. 그러나 이기욕 중독, 향락 중독, 알코올 중독된 도덕적 의지는 말할 수 없이 약하다.
힘든 일은 남을 시키고서 가만히 보고 앉았다가 그 일이 잘되면 제가 한 것이라 하고 못되면 저 같으면 잘할 것이라 하는 그러한 약음을 가졌다. 이 모든 것이 거의 그들의 선천적 약점인 것으로 보아서 그들은 새 시대의 건설에 참례할 자격이 없는 동정할 존재다. - P4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융의 영혼의 지도
머레이 스타인 지음, 김창한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심리학에 관심이 있다. 특히 융에 관심이 많은데 이유는 없다. 융의 저서를 많이 읽은 것도 아닌데 칼 구스타프 융이라고 하면 왠지 신뢰가 간다. 종종 오빠가 인생 사담을 해주곤 하는데 그럴 때면 오빠를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 그럴까? 융의 영혼의 지도를 읽으며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융 심리학은 이론을 주저리주저리 펼쳐놓고 그 틀에 사람을 꿰맞추기보다 표현하기 힘든 인생사를 말로 정리해 놓은 느낌이 든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사건, 사고를 맞닥뜨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내가 알던 나와는 너무 달라 내가 왜 그랬지 하며 충격받고 좌절하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통해 사람은 더욱 성장하며 한층 더 풍성한 나로 발전한다. 그 길에서 만나는 나쁜 나도 좋은 나도 모두 자기 자신이며 누구든 그러한 괴리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니 무너지지 말고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자.’ 융의 이론을 읽고 난 감상이다. 교양 입문서보다는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고 난 후의 감상에 더욱 가까운 듯하다. 그만큼 융의 이론은 머리보다는 마음을 울린다.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머리 스타인은 취리히 융 연구소에서 분석 심리학과 심리 치료 연수를 수행하는 심리학자이다. 저자는 융 심리학에 등장하는 기본 용어를 차근차근 설명하고, 융의 심리 이론에서 모순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점을 이야기하며 그 이유를 덧붙인다.

 

융의 사상에 등장하는 기초 용어들을 익히기에 굉장히 유용한 책이며 융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이해하기도 쉽다. 다만, 융의 사상 자체가 워낙 방대하므로 기초 용어라고 할지라도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편이다. 또한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있어 한 부분을 놓치면 전체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융의 저작이나 융을 다루는 책을 볼 때 참고서처럼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은 책인 듯하다.

융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 그 깊이에 겁먹고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융의 지도는 길을 보여줄 수 있고 대체로 윤곽을 알려주지만, 특별한 내용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 P6

경험 세계가 연구자의 인식 틀에 꼭 들어맞지 않는 무질서를 보여주듯이, 그의 이론화 작업은 이런 경험 세계의 무질서에 필적할 만큼 혼란스러운 면도 있다. 직관적 사상가인 융은 중심 개념을 설정하고 이들을 더 정밀히 발전시킨 연후에 다른 중심 개념으로 나아간다. 그는 빈번히 이 개념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반복하고, 작업이 직척됨에 따라 형성되는 공백을 메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의 저작을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융이 제시하는 전체 윤곽을 파악하려면 그의 모든 저작을 알고 있어야 한다. 만일 잠시 시간을 내서 임의로 그의 저작을 조금만 읽는다면, 이 사상의 단편들이 융 자신의 마음에서 제대로 연결되었는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 P6

자아는 두 가지 토대, 즉 신체 토대와 정신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각 토대는 다층적이며, 부분적으로 의식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무의식에 존재한다. 자아가 이 토대들에 기초한다는 것은 자아의 뿌리가 무의식에까지 닿아 있다는 의미다. 상층 구조에서 자아는 합리적이고 인지적이며 현실 지향적이지만, 심층적이고 감추어진 층에서 감정과 환상 및 갈등의 유동에, 그리고 무의식의 신체적·정신적 수준이 부과하는 침입에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자아는 신체적 문제와 정신적 갈등으로 쉽게 흐트러질 수 있다. - P27

융에 따르면, 자아가 성장하도록 하는 것은 ‘충돌’이다. 다시 말해 이 충돌은 갈등, 곤경, 고뇌, 슬픔, 고통 등을 의미한다. 사람이 신체적·정신적 환경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요구 사항이란 의식의 잠재적 중심을 이용해 이 의식의 기능적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의식에 초점이 모아져 생명체가 특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자아는 의식의 가상적 중심으로서 선천적인 것이지만,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중심으로서의 자아로 발달하는 것은 심신으로 이뤄진 몸과 반응 및 적응을 요구하는 주변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충돌들 덕분이다. 그래서 융에 따르면, 환경과의 충돌로 발생하는 적당한 갈등과 좌절은 자아 성장을 위한 최상의 조건이 된다. - P27

하지만 이러한 충돌은 재앙이 될 수 있으며, 정신에 심각한 해를 입힐 수도 있다. 그래서 성장 초기의 자아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입을 경우, 이런 심각한 정신적 외상으로 그 이후의 자아 기능은 크게 손상된다. 유아 학대나 성에 관련된 유년기의 외상은 그러한 정신적 재앙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런 재앙으로 자아가 그 정신의 하위 상태에서 영구적으로 손상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인지적으로 말해 자아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겠지만, 의식이 적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응집 구조의 감정적 동요와 부재는 심각한 성격장애와 해리적 경향을 일으킨다. 이러한 자아는 정상적 형태에서는(모든 자아가 그러하듯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망가지기 쉽고 과잉방어를 하게 된다. 자아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붕괴되며, 그러하여 원시적인(그러나 매우 강력한) 방어기제를 의존해 세계와 떨어져 담을 쌓고 외부 침입과 손상에서 정신을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를 신뢰하지 못한다. - P27

역설적으로 그들은 타자와 삶 일반에게서 지속적으로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크게 실망한다. 그들은 압도적으로 위협적이라고 여겨지는 주변 환경에서 점차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방어적인 고립 생활을 한다. - P27

자아가 의지를 시행하려 할 때 그 환경에서 오는 저항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러한 충돌이 잘 처리되면 결과적으로 자아는 성장한다. 이러한 통찰이 주는 경고는 아이에게 다가오는 도전적인 혈실의 공격을 지나치게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기후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과잉보호 환경은 자아 성장을 자극하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 P27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즌 많은 경험과 우리 성격으로 인식되는 많은 것은 자아의식에 속하지 않는다. 활발한 소통, 타자와 삶에 대한 자발적 반응과 정서적 대응, 유머의 폭발, 슬픔의 분위기와 마력, 심리적 삶의 혼란스러움 등의 특질과 속성은 그런 규모의 자아의식이 아니라 더 큰 정신의 양상들과 연관된다. 그래서 자아를 전인적 인간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아는 단지 행위이고, 의식의 초점이며, 인식의 중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아에 너무 많은 것을 전가하거나 너무 적게 전가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 P31

전형적으로 젊은이는 심리적으로 경험된 것보다 더 크게 자아를 통제하고 자유의지를 성취했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경향이 있다. 자유에 부과된 모든 제한은 바깥 세계, 즉 사회와 외부 규제에서 온 것처럼 보이고, 자아가 내부에서 얼마나 많이 통제받는지에 대한 자각은 거의 업는 편이다. 이 점을 면밀히 따져볼 때 우리가 외부적 권위에 종속된 만큼이나 자신의 인격적 구조와 내면에 도사린 악마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인생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바로 최악의 적, 가장 냉혹한 비판자, 가장 가혹한 임무 부과자임을 점차적으로 자각하게 된다. 운명이란 외부에서 명령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면에서도 하달된다.
- P33

지구가 태양계의 작은 일부이듯 자아는 크나큰 심리 세계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듯 자아는 더 큰 정신적 실체인 자기 주위를 돈다고 봐야 한다. - P33

융은 정신병리학에서 성적 갈등이 중심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미심쩍어 하며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 P59

더욱이 융에 따르면, 한때 성과 밀접히 연결되고 성적 본능에서 파생한 것이 분명한 활동들도 인간 의식과 문화가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성적 영역과 크게 분리되어 성과는 거의 연관성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동물에게는 창조의 충동을 발휘하는 본능이 있지만, 이것이 번식기로만 제한된다. 생물학적으로 확립된 본래적인 성적 특성은 각각의 기관이 하는 일이 고정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한 나머지 상실되어버렸다. 음악이 성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해도, 가령 음악을 성 범주에 포함하려 하는 것은 빈한하며 미학과 상관없는 일반화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명명 체계를 만든다고 하면서, 쾰른대성당이 도로 지어졌다고 해서 광물학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 P59

리비도의 ‘퇴행’과 ‘진전’은 융 이론에서 중요한 용어다. 이들 용어는 에너지가 운동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진전할 때 리비도는 생명과 세계에 적응하는 데 사용된다. 이때는 세계에서 기능하기 위해 리비도를 사용하고, 선택한 활동을 위해 리비도를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다. 정신 에너지의 긍정적 흐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시험에 낙방하거나 회사 인사이동에서 제외되고,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를 잃는다고 가정해보라. 리비도의 진전은 멈춰버리고,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에너지 흐름은 방향을 반대로 바꾼다. 이 리비도는 퇴행하고, 무의식으로 사라지며, 여기에서 리비도는 콤플렉스를 작동시킨다. - P77

진전이 세계에 대한 적응을 촉진하는 동안, 퇴행은 역설적으로 발달의 새로운 가능성에 이른다. 퇴행은 내면세계를 활성화한다. 내면세계가 활성화될 때, 사람은 이 내면세계에 직면하고 이러한 과정을 겪은 생명에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내면에 적응하려는 이러한 운동은 결국 새로운 외부 세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리비도는 또다시 진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제 바로 무의식적인 것, 즉 퇴행 때 겉으로 드러나는 콤플렉스, 개인사, 성격적 결함, 과오와 다른 모든 다루기 힘들고 고통스런 문제에 직면해야 하므로 더 성숙해진다.융은 한편으론 리비도의 진전과 퇴행 사이에, 다른 한편으론 내향적 태도와 외향적 태도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있다고 했다. 초보자는 이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내향적으로 세계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진전하는 반면, 외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방식으로 진전한다. - P77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서 페르소나는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주체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페르소나의 이중 기능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활달한 면을 보여주면서도 사람 수가 많은 큰 집단에서는 움츠러들고 피해서 숨어버리며, 그 페르소나는 종종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느끼는데, 특히 낯선 사람들과 힘께 있거나 자기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칵테일파티 같은 모임은 고문을 받는 것처럼 힘든 자리지만, 무대해서 하는 역할 연기는 그들에게 순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내향적인 경향을 보이는 유명 배우들이 많다. 사적으로 그들은 소심한 경향을 보이지만, 공적 역할이 주어지면 보호받고 안전하다고 느낌으로써 가장 외향적인 유형으로 간주되는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 P77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서 페르소나는 대상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주체를 보호해야 한다. 이것이 페르소나의 이중 기능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활달한 면을 보여주면서도 사람 수가 많은 큰 집단에서는 움츠러들고 피해서 숨어버리며, 그 페르소나는 종종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느끼는데, 특히 낯선 사람들과 힘께 있거나 자기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칵테일파티 같은 모임은 고문을 받는 것처럼 힘든 자리지만, 무대해서 하는 역할 연기는 그들에게 순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내향적인 경향을 보이는 유명 배우들이 많다. 사적으로 그들은 소심한 경향을 보이지만, 공적 역할이 주어지면 보호받고 안전하다고 느낌으로써 가장 외향적인 유형으로 간주되는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 P113

페르소나는 사람을 수치심에서 보호해주며, 수치스러움을 회피하려는 것은 페르소나를 발달시키고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한 동기일 것이다. - P116

죄의식은 행위를 분리할 수 있지만, 수치심은 자존감 전체를 빼앗아 간다. 수치심은 죄의식보다 더 원시적이며, 잠재적으로 더 파괴적인 감정의 일종이다. 우리는 이미 채택된 페르소나와 다르게 행동할 때 죄의식을 갖거나 깊이 수치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격에서 그림자가 실현된 것이다. 그림자는 수치심, 즉 무가치하다는 의식, 더럽고 달갑지 않다는 불결의 감정을 야기한다. - P116

저한테 전화위복이 일어났습니다. 침묵을 지키고, 아무것도 억누르지 않고, 주의를 흩트리지 않고, 현실을 받아들이는(제가 원하는 대로 되기보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등의 모든 것을 했을 때, 전에는 결코 상상하지 못하던 이례적인 앎과 힘이 제게 생겼습니다. 우리가 사물들을 받아들일 때, 이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를 압도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물들을 수용함으로써만 그들을 향한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제게 오는 무엇이든, 선하든 악하든, 양지와 음지로 번갈아 영원히 바뀌든, 이처럼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저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이는 인생 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더 생생해졌습니다. 제가 이토록 어리석었다니! 당위적으로 해야 하다고 느끼는 방식에 따라 모든 것을 억지로 진척시키려 하다니! - P117

아니마/무스는 (a) 페르소나와 서로 보완적이며, (b) 자아가 정신의 최심층에 위치한 자기의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 P121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 또는 자아와 아니마 사이의 충돌에 직면해야 하는 과제를 받아들임으로써 얻는 것은 ‘기개’, 즉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조우하는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이다. "이것이 바로 대략적으로 일컬어 내가 말하려는 개성화 과정이다. …… " - P168

심리학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마음 문제에만 관여하는 것으로 한계를 두지만, 자기와 동시성 이론을 통한 융의 분석심리학은 이러한 임의적 분할에 도전했던 것이다. 융이 한때 학생들에게 자기의 끝은 어디까지며 그 경계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는 끝이 없다, 즉 무한하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가 자기 이론에 동시성의 함축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숙지해야 한다. - P189

융이 발견한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세계는 상반되는 두 극의 역동적 관계에서 형성된다. 즉 정이 있다면 반이 있고, 이 대극 사이에 에너지가 흐른다. 이러한 에너지 흐름을 통해 대극이 하나로 통합하면서 실현되는 것을 개성화라 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자아ego는 잠재적 형태로만 있을 뿐이지 모든 것은 자기self다. 즉 갓 태어난 아기는 자아도 없고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무의식의 상태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자아가 발달되고, 자아는 자기에서 분리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르소나와 그림자 대극 등의 갈등이 일어난다. 이 갈등이 해소되고 자아와 자기의 연합이 일어나는 순환적 과정이 개성화다. 성격 발달 과정에서 자아와 자기의 분리 및 연합은 평생 동안 계속 반복되어 일어나는데, 이러한 개성화는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다. 개성화 과정에서 처음에는 자아의식이 통합되고, 그다음에는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어 전체 정신계에 이른다. - P218

이러한 개성화를 융은 전일성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우리가 앎에 대한 의식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 안에 알려지지 않은 인식 주체, 즉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초월하고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 동시에 있는 정신의 한 측면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라는 개념이다. - P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숙한 새벽 세시
오지은 지음 / 이봄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혹 읽다보면 저자의 안녕이 궁금해지는 책들이 있다. 익숙한 새벽 세 시가 그랬다. 형편없는 어른이 되어 버린 듯한 두려움을 써낸 이 에세이집에는 절망감, 좌절감, 허무함, 공허함, 이 모든 감정이 담겨 있다.

 

저자 오지은은 가수이자 작가이다. 2015년에 출간된 익숙한 새벽 세 시는 저자의 두 번째 저서이며 그 이후로도 꾸준히 글을 써내 지금까지 총 다섯 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가수로서 음반과 공연도 계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우울하다면 우울한 에세이 익숙한 새벽 세 시는 놀랍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은 책이었다. 저자는 독자를 향해 말을 걸거나 독자를 위로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느끼고 경험한 사실들을 찬찬히 펼쳐낸다. 그리고 합리화라면 합리화일 수도 위로라면 위로일 수도 있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저자도 그랬구나, 나도 그랬지,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겠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생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이상한 게 아니야 라고 말할 텐데 내 일이 되면 나는 왜 그럴까 자책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다독이는 힘을, 그리고 어느 순간 다독임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게 되는 당연함을 갖기를 바랄 뿐이다. 삶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님을.

 

문득 저자의 안녕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감정을 수많은 사람에게 고스란히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건강한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엉망인 프로보다 의외로 잘하는 초보처럼 보이고 싶었다. - P81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나아가는 것이 아닌,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라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고. 파랑새를 보고, 다시 잊고. 실수하고, 반성하고, 포기하고, 노력하고, 무뎌지고, 다시 아프고, 트램펄린 위에서 점프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올라갔다 떨어지고, 아니 떨어진 덕에 다시 올라가고.
그러다 중력에서 벗어나는 찰나의 순간을 만나고, 다시 끌려 내려가고, 또 다시 점프하는 세계라면. 그렇다면 진짜 아름다움은 위에서 잠시 본 높은 풍경이 아닌 그 움직임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 P98

가끔 시간이 마구 흘러가고 있음에 당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아직 오늘의 할 일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해는 무섭게 지고 있고 오늘도 바깥의 햇볕을 쬐지 못했다는 부끄러운 마음. - P99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라는 말은 잔인하다.
그것은 네 책임이라는 뜻이다.
가능성은 있었는데 네가 모자라서 안 된 것이라고. - P110

매일매일이 좋으려는 욕심만 버려도
훨씬 마음이 편할 텐데 - P113

우리는 노력을 해서 집중을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
못하는 집중을 잇고 또 이어서 완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날 위로해본다. - P129

추억이 하나씩 생각날수록 내 마음은 덥혀지지 않고 조금씩 서늘해져갔다. 촛불이 하나씩 켜지길 기대했는데, 되려 촛불이 하나씩 꺼지는 느낌이었다. 다 타버린 촛불에 마개를 씌워서 완전히 꺼버리는 느낌. 회색 연기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 P157

방에 틀어박혀 일 년간 같은 부분을 고치고 새로 쓰고를 반복하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파스타를 삶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자주,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거기서 왠지 희미한 잘난 척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난처한 문제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얄미운 아저씨의 말투를 쓰는 것은, 혹시 긴 인생, 무지막지하게 무서운 창작의 바다에서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 아닐까. 그런 잔재미로 잠시 숨을 쉬고 다시 묵묵히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 P2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편 소설의 대가로 불리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디어 라이프를 읽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어려웠다.

 

디어 라이프는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을 총 14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은 어떠한 사회 문제나 사건을 포착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조곤조곤 전달하는 내용이다.

 

단편 소설을 다 읽었을 때는 내가 이 책을 왜 어려워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사연을 담은 평범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역자 해설을 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먼로의 언어는 굉장히 정제되어 있다.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극적이지 않다. 차분한 힘이 느껴진다. 그런 언어 속에서 집약적이고 심오한 통찰이 일어나며 극적인 장면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한두 마디의 말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속 대회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길지 않다. 코리에서 주인공은 오랜 세월 동안 살을 맞댄 나마가 자신에게 속임수를 쓴 것을 알아내고도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넘겨버린다. 떠나거나, 머무르거나. 군더더기 말은 필요 없다. 따라서 독자의 역할이 커진다. “라는 질문도 독자의 몫이고, 그 답도 독자의 몫이다.-P.428

 

독자의 역할이 크기에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노벨 문학 수상자라는 저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일까,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일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야 하는데, 나로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읽으면서도 다 읽고 나서도 오리무중이었던 단편 소설집이다. 다만, 저자의 글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굉장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느껴지는데, 책을 다 읽고 한 달이나 지나 서평을 쓰는 지금, 책을 펼치자마자 한적한 시골 마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연상된다.

그가 내게 말했다. "시간 낭비는 하지 마. 네가 얼른 달려와서 알려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죄의식에 빠져 들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는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 - P14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