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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평점 :
미미여사의 작품은 대개 중박 이상은 하는 편인데, "진상"의 경우 추리/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평가를 넘어서, 에도 시대의 생활상을 근사하게 표현한 점에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역사관련 서적이나 민속학 등 특정 전문 분야의 책이 아니더라도 이토록 그 시절의 다양한 모습을 주입식, 암기식이 아닌 방법으로 그려낼 수 있고 알아듣기 쉽게 묘사해 주는 책은 많지 않다. 다양한 신분 체계, 거기에 따른 말투, 의복, 거주지 등과 가족 관계, 가업 승계에 따른 자식들의 장래와 처우 문제, 일본에서 바라보는 장인과 상인, 관리에 대한 인식, 여러가지 형태의 혼례 문제, 사교와 어울림의 방식, 살인에 대한 인식과 상/벌에 관한 의식, 남녀의 외모, 연애 및 배우자 선택에 관한 문제 등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을 두터운 책 2권에 요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우리 나라도 아닌 일본, 그것도 최근이 아닌 에도 시대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저녁 시간에 나오는 일일드라마의 그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페이지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그네들 각자의 삶이 작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더이상 그들이 작고 하찮은 조연, 단역, 엑스트라의 존재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임을 확실히 한다.
"너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람이 제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면 자기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와 자기 이외의 것을 분간할 수 있다.
겐에몬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와 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살며 지나며 만나고 스쳐가는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희노애락과 삶이 있는 것이다. 다만 입장과 처지에 따라 이리도 보이고 저리도 보일 뿐.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다. 나쁜 짓을 저지른 이도 사정을 알고 보니 딱해서 이해하고 도와주는 부분도 있고 과거의 지울 수 없는 잘못도 그들이 살아온 고통과 회한의 시간에 따라 흐릿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헤이시로가 사람에게 재미를 느낀다고 하는 것은 모두에게 그럴만한 구석과 사정이 있다는 것을 깨우쳤을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하나같이 사려 깊고 마음이 따듯하며 나름의 심지가 있는 이들인지라 이 작품이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라는 사실을 자꾸 잊고 만다.
"예전에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인연이란 어디선가 끊어 내거나 풀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불러들인다.
"죄라는 것은 아무리 괴롭고 슬프더라도 한 번은 깨끗이 청산해야 하며, 눈처럼 녹아서 없어지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작품은 에도 시대가 배경이다. 작금의 현실처럼 묻지마 범죄나 사이코패스의 유희적 살인보다는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한이 맺혀서 등등의 이유로 일어나는 사건사고가 더 많은 시대의 이야기이다. 최근 나오는 호러/공포 영화와는 달리 "전설의 고향"에서는 사연있고 마음 아픈 사연을 가진 귀신들이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무섭지만 안쓰럽고 등골이 오싹하지만 불쌍하기도 하다. 그건 이미 괴물이나 귀신이 된 지금의 모습보다 그들이 사람이고 인간이었던 시절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피 흘리고 산발한 채 나타나던 귀신들은 심장 튼튼한 어느 한 사람이 그들의 해묵은 원한을 씻어주면 창백하긴 하지만 단정한 얼굴로 다시 찾아와 고맙다고 큰절 하고 사라진다. "진상"을 읽으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헤이시로나 신노스케나 모두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데 힘쓰고 그 후엔 욕봤지... 힘들었지... 하며 등을 다독여 주며, 그들이 뒤집어 쓴 탈이 악귀로서의 모습이든 어리석은 욕심쟁이든 상관없이 벗겨주고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부는 이때에 참으로 바람직하고 마음 따듯해지는 미스터리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