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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여행자 - <내 여행의 명장면> 공모전 당선작 모음집
강지혜 외 33명 지음 / 달 / 2014년 7월
평점 :
여행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싫어하기도 한다. 역마살이 있는 내게 여행이란 단어 그 자체로 상쾌함을 느끼게 하지만 여건상 자주 떠날 순
없다. 다이어트를 할 때 먹지 못 하는 음식 사진들을 찾아보며 솟아나는 식욕을 달래 듯이 나 역시 이런저런 여행기를 기웃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다독인다. 그러나 많은 여행기들은 가식과 허세에 쩔어 있거나 어디서 본 듯한 사진만 즐비한 경우가 많다. 굳이 책으로 보지 않아도 검색 엔진에
특정 나라나 도시명만 치면 죽 나오는 블로그의 글들만 봐도 충분한 뻔한 숙소, 식당, 쇼핑 등... 옥석을 골라내기란 늘 어렵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가 여행자]는 달 출판사에서 여행에세이 공모를 통해 선발된 글들만 수록한 책이다. 적어도 자기 만족적 글들과
겉보기만 번지르르한 글들은 다 쳐내주었으리라 믿어 선택했다. 다만 마음에 드는 글과 문장이 있어도 그 여행기를 쓴 사람이 전문 작가가 아니기에
그 사람의 향기를 다른 곳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다는 위험 부담이 있다. 책에 담긴 모든 글이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후회는
없다. 여름 휴가를 다녀오느라 인천 국제 공항 출국장을 빠져 나온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건만, 다시 한번 낯선 도시를 찾아 가고 싶다.
우짤꼬……
[ 벌써 기억 깊은 곳 어딘가에 들어앉은 듯한 집 앞에서 6009번 공항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설렘과 공항 라운지에서의 충만한 나른함과
이 여행이 내게 행복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이유 등을 동시다발로 떠올리며 출구를 찾아나선다. 남의 나라 국제공항 도착층에 말 그대로 '도착'하여
회전문을 지나면, 열대도시의 숨이 확 막히는 후끈한 공기나, 서유럽의 그 먼지 낀 듯 습기를 머금은 회색 하늘이나, 지중해 도시들의 먹색을 섞은
원색의 바람이나, 아니면 마천루를 보여주는 도시의 냉기가 나를 가장 먼저 맞아준다.
낯선 땅에서, 당분간은 내 집이 되어줄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싣고 문을 닫는 순간,
사실상 이 여행은 이미 끝나기 시작한 것이다. - p. 39 ]
[ 어쩌면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편지를 쓰기 전엔 '누군가'에게 쓰는 게 중요했지만 쓰다보면 누군가에게
'이 편지를 쓰는 게' 중요해진다. <중략>
지구를 반 바튀 돌아 당신에게 전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조금은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느낌을 받았다. 그러므로 답장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았다. - p. 54 ]
[ - 엄마한테 할 얘기가 없어요. 매일 뚝같은 이야기를 해요. 아침엔 뭐 하고 오후엔 뭐 하고 저녁엔 뭘 했는지 딱 일 분 걸려요.
난 참을 수가 없어요.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져요. 어쩌면 이렇게 하찮을 수가 있죠? 마치 바보 같아요. 내 삶은 매일매일이 너무 무미건조해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처럼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 p. 243~244 ]
[ 이야기하는 동안 와인 한 병이 비워지고 다른 한 병을 연다. 와인 향이 밴 코르크는 향이 참 좋다. 내가 코르크를 만지작거리며 코에
대고 킁킁대는 동안 그가 빈 술잔에 술을 따른다. 잠시 가라앉았던 마음이 다시 한번 천천히 활기를 띈다. 다시 시작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두번째 와인을 반병쯤 비운 후 그가 묻는다.
"둘 중에 어떤 게 더 맛있어?"
길게 고민할 것 없이 대답한다.
"이거. 약간 밍밍한 게 더 좋아. 첫번째 건 좀 맛이 강한 거 같아."
"그럼 넌 이제 앞으로 와인이 마시고 싶으면 시라즈로 마시면 돼. 시라즈가 네 취향인 거야."
방금, 나에게도 좋아하는 와인이 하나 생겼다. - p.298~2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