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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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멸망에 대한 재앙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나 소설은 무수히 많다. 누군가 이상 현상을 눈치 채고 영웅적 인물들의 선도 하에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대자연의 공격으로부터 속수무책 사라져가는 최후의 인류를 그리기도 한다. 그 와중엔 항상 가족, 연인, 친구 등의 관계가 핵심 소재로 끼워진다.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오해가 풀리며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한다. 멸망설에 관한 입장이 다른 종교들의 갈등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어디까지나 세상을 이끌어가고 유지하며 변화에 대처하는 대상으로서 어른들이 스토리를 끌어간다.


이 책의 주인공은 11세 소녀이다. 어린이와 어른의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는 나이다. 지구 자전 속도가 늦어지는 '슬로잉'현상에 의해 지구는 천천히 파괴되어 간다. 낮과 밤의 시간이 늘어나고 중력에도 이상이 온다. 자유롭게 날던 새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농작물은 말라 가며 고래들은 해안으로 밀려와 죽어간다. 사람들 역시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이상 징후를 보인다. 비상용품을 사재기 하는 엄마나, 홀로 남은 할아버지, 바람피는 아빠 등은 어디에서나 볼 법한 인물들이다. 다만 그들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인물이 11세 소녀라는 것이 다르다. 그 시선에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이해나 설명을 바라는 감정 따위는 없다. 줄리아는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런 일들이 원래 일어날 일들인지 아니면 '슬로잉'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인지 궁금할 뿐이다.


지구 대재앙이라는 배경을 깔고 11세 소녀의 성장기를 읽자니 초반부에서는 다소 유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뻔한 클리셰가 등장하지 않는 점에 마음이 풀어졌다. 아빠가 왜 실비아 선생님과 바람을 피웠는지, 엄마는 아는지 모르는지, 어째서 결국 함께 하는지, 해나가 왜 자신을 멀리하는지 등에 관한 친절하고 지루한 설명은 없었다. 줄리아가 11세가 아니었다면 왜, 어째서 그랬는지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확인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줄리아에게 이런 문제들은 약간 다르게 다가 온다. 그런 줄리아의 태도가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함께 있는 현실과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기에 어떤 허세나 거짓말 등이 필요가 없다.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받고 고통받고 하나둘 떠나가는 모든 순간들을 줄리아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발을 동동구르며 떼 쓰지도 않고, 울며불며 소리지르지도 않는 11세 소녀의 캐릭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구의 위기와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함께 겪은 줄리아에게 11세의 1년은 특별한 시간이 되었고 심지어 "기적의 세기"라고 부르며 기억한다.


[과거가 화석처럼 별에 보존될 수 있다니 멋진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백 광년 시간의 저쪽 끝 어딘가에서 먼 미래의 누군가가 내 침실에서 바로 이 순간 나와 아빠의 보존된 이미지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니.   - p. 134 ]


[아름다운 것도 수가 많아지면 혐오감을 주는 법이다.   - p. 138 ]


[우리는 고래들이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고래의 몸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우리는 귀를 기울인 채 고래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고래는 사회적 동물이다. 괴로워하는 동료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로 인해 무리 전체가 괴로워한다. 한눈에 봐도 고래들은 죽어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넋 놓고 바라볼 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 p. 271 ]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이야기를 할 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 p. 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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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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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피하지만 처음이다. 김영하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이.

그치만 창피하지 않다. 아직 읽지 않은 유명작가가 국내외로 얼마나 많은데...


처음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오랜만에 엄마가 부쳐준 부침개를 먹으며 나오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역시 이 맛이야~ 가 아니라... 야~ 진짜 글 잘 쓰는구나.


책을 보고나서 무척 재미있었다면 왜 좋았는지, 별로였다면 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설명하기란 의외로 어렵다. 엄마가 만들어준 부침개가 광장시장 순희네 빈대떡보다 뭐가 더 낫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만들었자나 라고 한다면 그건 엄마의 부침개를 욕 보이는 거다... 조미료도 안 쓰고, 속재료가 듬뿍 들어간 데다가 기름을 많이 안 써서 느끼하지 않고 엄마만의 특별 제조 간장에 찍어먹으니 맛나다~ 라고 해야 그러네, 맛나겠다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내 의견이 혈연과 키워준 정에 기댄 것이 아니란 사실이 증명되어 더 당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쉽지가 않다는 거다. 캐릭터가 마음에 들고, 문장이 길지 않아 좋고, 책이 두껍지 않아 팔이 안 아프고, 종이질이 마음에 들며, 가격이 안 비싸서 좋다고 할 건가? 욕이라도 할 성 싶으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말도 하기 싫다고 하면 될텐데, 좋은 경우엔 다르다. 이게 참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네 ^^;;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능력이 남달라야 작가가 되는 것이겠지만, 나 혼자 볼 리뷰를 쓰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다. 다만 뭐랄까, 이 책은 내게 답을 주었다는 느낌이다. 이 망할놈의 세상, 죽지 못해 산다는 둥 내가 버둥거려봐야 뭐가 달라지겠어 싶은 현실을 굳이 살살 달래려 하지 않고 이게 이래서 살기가 팍팍한거라고 이야기한다. 읽고 난 나는 내 변명거리와 핑계들을 누가 대신 말해 준 듯한 기분이 든다. 대개 마음을 다잡기 위해 힐링책이나 자기계발서의 잘난척을 들춰보게마련이지만 때로는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 실체를 드러내는 것도 나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명상이라도 한 듯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 내가 못나고 적응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원래 이따구구나... 싶은 안도감이 든다. 이런 곳에서 위안을 얻는 나는 비정상인가???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 p. 20 ]


[정치인들은 기차의 파멸을 막고 있는 게 자기들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장사꾼들 덕분에 사람들이 폭력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게 되는 거죠. 평화? 그건 장사꾼들이 만드는 거에요.   - p. 37 ]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진진하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p. 75 ]


[인간사가 정의와 무관하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마다 씁쓸하다. 아이가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더 노력한다거나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라밍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반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불행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다면 얼마자 바람직할까.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사는 정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들은 정의의 실현을 사후 내세로 미룬 게 아닐까.   - p. 78 ]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은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로마인들은 이천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p. 90~91 ]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순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에요."   - p. 122~123 ]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 p. 123 ]


[종이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바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 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 p. 160 ]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중략)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 p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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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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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몬의 부모는 맞선으로 만나서 뜨거운 마음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고 한다.

 "막내딸까지 무사히 시집보냈을 때 할머니도 마음이 놓였겠지요. 그래서 옛날 일도 들려주었을 거에요."

-부부의 인연은 따로 있는 거란다.

 "그러니 당장 눈앞의 일에 헤매지 말고 자기와 닿아 있는 인연을 소중히 하라고, 엄마에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덧붙이자면 아무리 불안해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시험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p.52~53 ]


["애초에 이 모임은 제 아버지, 선대 시치로에몬이 시작한 겁니다.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어요. 이 가업을 해 나가다 보면,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때가 묻고 금전에 더러워져서 얼굴도 마음도 대청소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괴담을 듣는 모임이 좋겠다,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뜨면 웃는다.

 "사실 이것도 억지로 갖다 붙인 핑계이고, 실은 아버지가 괴담을 좋아하셨습니다."

 좌중에서도 잔잔한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허나 괴담 모임을 마련해서 여러 괴담을 듣고 보니 신선의 영험함이나 요괴의 무서움과 신기함에 온몸이 절로 오그라들더군요. 사람의 지혜나 이치가 닿지 않는 일들에 대해 알고 사람의 분수를 헤아리게 됩니다. 혼백이 덜덜 떨리면 때가 떨어지고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 고마운 효험에 선대의 뒤를 이은 저도 괴담 모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p. 206~207 ]


["아가씨, 다리란, 본래 길이 없는 곳에 걸쳐 놓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사다리나 계단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예, 하고 오치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뜻밖의 존재를 불러들이거나 이승이 아닌 장소로 통해 버리는 일도 일어나는 것이지요. 저도 이 모임에서 주워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만."   - p. 245 ]


["저에게 세상물정이란 것을 조금이나마 알려 주고 싶으셨던 거겠지요"하고 오치카는 말했다. "이런저런 기이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저도 차차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도 다양하고 이승을 떠나는 길도 다양한 것 같습니다."   - p.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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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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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첫 책이다. 사실 2014년의 마지막이 될 뻔한 책이었는데, 시간은 원래 내 사정따윈 봐주지 않고 가는 법이니까... 뭐든지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크던 작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새해 첫 책이랍시고 두껍고 어려운 인문이나 고전을 꺼내드는 것 보다 가벼운 단편이 내 스타일엔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책 속에 실린 단편 "예스터데이"에 나온 구리야 에리카가 꿈에서 본 얼음 달을 형상화 한 듯한 표지그림은 꽤 괜찮은 듯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답을 하기가 조금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들이 풍기는 섬세하고 가라앉아 있는 듯한 분위기는 분명 좋아한다. 또한 질척대지 않고 간결한 느낌의 문장도 좋아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짊어지고 있는 감정의 무게와 과거의 상처를 끊어내지 못 하고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일상들은 묘하게 불편하고 숨이 막힌다. 그네들의 젊고 순수한 시절이 남긴 흔적들을 토닥거려주고 싶다가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너만 왜 유난이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단편모음집인데 이전에 그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조금 더 냉정해진 느낌? 관계를, 상실감을, 추억을, 남아있는 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 되어 더이상 늪에서 허덕이지만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느꼈다. 아, 이 사람이 성장했구나. 마침내 상처를 어느 정도 이겨내고 조금 더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전에 어떤 영화평론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년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책 표지 안쪽에서 등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진을 일단 보지 않고 그냥 작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 작가 역시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직 빛나던 청춘이 있던 시간의 기억과 그때 만나던 사람들, 즐거운 순간들, 가슴아픈 추억들이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다.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고,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마냥 망설이기만 하는 딱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그려내는 재주가 있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들이 많은 것은 다들 그 시절을 안타깝게 기억하고 지금 닥친 현실의 고단함이 과거와 어딘가 이어져 있음을 알고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빛을 바래가는 기억력 때문에 각 단편들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두려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다카쓰키는 죽어버린 아내가 바람핀 이유를 결코 알 길이 없다. 답을 해 줄 상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와이프의 애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스터데이"에선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독립기관"에선 마음이 기우는 방향이 달랐던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함을 느끼고 실제로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 "셰에라자드"에선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남학생의 집에 몰래 들어가 소소한 물건을 들고 나오고 자신의 것을 남기고 가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기노"에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남자의 다소 위태위태한 이야기가 그려지며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뒤 걷는 법, 옷 입는 법 조차 잊은 그레고르 잠자가 곱추 여인을 만난 뒤 세상을 새로 배워가려 한다.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은 오래 전 연인이었던 여자가 자살했다는 정체모를 남자의 전화를 받은 주인공이 그 여자의 죽음으로 인해 관계된 사람들과 기억, 그 여자를 둘러싼 세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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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잊어버린 것 - 마스다 미리 첫 번째 소설집
마스다 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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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장점은 누구나 한번쯤은 하게 되는 고민들, 인생의 전환점에서 만나게 되는 당혹스러움, 머뭇거림, 망설임 등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문득 떠오르게 되면 한없이 고민하게 되고 살아가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긴 한데, 하루하루 지나다보면 어찌어찌 살아가게 되는 그런 생각들을 아, 어쩌지~ 가 아니라 맞아, 나도 그렇지... 에서 끝을 낼 줄 아는 작가이다.


사람들이 고민하는 부분에 있어서 책을 찾아보거나 명사의 혜안을 구할 때는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거나 명쾌한 답을 원할 때이다. 그러나 마스다 미리의 경우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고 작가 자신도, 작품 안의 인물들도 그 자리에 머물 뿐이다. 새로운 시각이나 해법 따위는 없다. 그런데 내가 막연히 불안해 하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단순하게 그려내어 주니, 마치 애초부터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 위안이 되기까지 한다. 이것이 마스다 미리가 가진 힘의 정체가 아닐까...


이번 책은 그녀의 소설이다. 여러가지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자와 남자, 가족, 부모 등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감정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그닥 특별한 것은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대표만화 3, 4권 정도 말고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괜찮은 듯 하다. 단편 중 "버터쿠키 봉지"의 경우 '을'의 입장에서 상처받는 계약직 사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다른 작품에선 볼 수 없는 소재라고 생각된다. 이 역시 과한 무게감이나 깝깝함은 보이지 않지만 그녀다운 점이 가득하다. 상사의 또라이질이나 고객의 진상에 몇번이고 사표를 내던지고 싶다가도 직원들과의 수다나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작은 사건 등으로 정신을 빼았기고 그럭저럭 하루를 넘겨가는 일상이 내 일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역시 뭔가 해결점도 없고 용기를 북돋우는 희망의 메세지도 없지만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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