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창피하지만 처음이다. 김영하 작가의 책을 읽은 것이.
그치만 창피하지 않다. 아직 읽지 않은 유명작가가 국내외로 얼마나 많은데...
처음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오랜만에 엄마가 부쳐준 부침개를 먹으며 나오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역시 이 맛이야~ 가 아니라... 야~ 진짜 글 잘 쓰는구나.
책을 보고나서 무척 재미있었다면 왜 좋았는지, 별로였다면 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설명하기란 의외로 어렵다. 엄마가 만들어준 부침개가 광장시장 순희네 빈대떡보다 뭐가 더 낫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만들었자나 라고 한다면 그건 엄마의 부침개를 욕 보이는 거다... 조미료도 안 쓰고, 속재료가 듬뿍 들어간 데다가 기름을 많이 안 써서 느끼하지 않고 엄마만의 특별 제조 간장에 찍어먹으니 맛나다~ 라고 해야 그러네, 맛나겠다 소리도 들을 수 있고 내 의견이 혈연과 키워준 정에 기댄 것이 아니란 사실이 증명되어 더 당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쉽지가 않다는 거다. 캐릭터가 마음에 들고, 문장이 길지 않아 좋고, 책이 두껍지 않아 팔이 안 아프고, 종이질이 마음에 들며, 가격이 안 비싸서 좋다고 할 건가? 욕이라도 할 성 싶으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말도 하기 싫다고 하면 될텐데, 좋은 경우엔 다르다. 이게 참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네 ^^;;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능력이 남달라야 작가가 되는 것이겠지만, 나 혼자 볼 리뷰를 쓰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다. 다만 뭐랄까, 이 책은 내게 답을 주었다는 느낌이다. 이 망할놈의 세상, 죽지 못해 산다는 둥 내가 버둥거려봐야 뭐가 달라지겠어 싶은 현실을 굳이 살살 달래려 하지 않고 이게 이래서 살기가 팍팍한거라고 이야기한다. 읽고 난 나는 내 변명거리와 핑계들을 누가 대신 말해 준 듯한 기분이 든다. 대개 마음을 다잡기 위해 힐링책이나 자기계발서의 잘난척을 들춰보게마련이지만 때로는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 실체를 드러내는 것도 나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명상이라도 한 듯 마음이 편안하다. 그래, 내가 못나고 적응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원래 이따구구나... 싶은 안도감이 든다. 이런 곳에서 위안을 얻는 나는 비정상인가???
[물론 세일즈맨은 고객이 물건을 사도록 유혹할 자유가 있고 고객은 그 유혹에 넘어갈 자유가 있다. 이때의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강력한 저항이 없는 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제 뜻을 이루겠다는 힘의 논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 p. 20 ]
[정치인들은 기차의 파멸을 막고 있는 게 자기들이라고 생각하죠.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장사꾼들 덕분에 사람들이 폭력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자발적으로 나누게 되는 거죠. 평화? 그건 장사꾼들이 만드는 거에요. - p. 37 ]
[우리의 내면은 자기 안에 자기, 그 안에 또 자기가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은 언제 틈입해 들어왔는지 모를 타자의 욕망들로 어지럽다. 그래서 늘 흥미진진하다. 인간이라는 이 작은 지옥은. - p. 75 ]
[인간사가 정의와 무관하다는 걸 발견하게 될 때마다 씁쓸하다. 아이가 자기를 덜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더 노력한다거나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라밍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반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부모는 아이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어려서 불행하게 자란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더 원만하다면 얼마자 바람직할까.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사는 정의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 같은 종교들은 정의의 실현을 사후 내세로 미룬 게 아닐까. - p. 78 ]
[죽음과 종말을 떠올리면 현재의 삶은 더 진하고 달콤해진다. 로마인들은 이천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 p. 90~91 ]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순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에요." - p. 122~123 ]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 p. 123 ]
[종이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바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 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 p. 160 ]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중략)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 p 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