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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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첫 책이다. 사실 2014년의 마지막이 될 뻔한 책이었는데, 시간은 원래 내 사정따윈 봐주지 않고 가는 법이니까... 뭐든지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크던 작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은데 사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실감도 나지 않고 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새해 첫 책이랍시고 두껍고 어려운 인문이나 고전을 꺼내드는 것 보다 가벼운 단편이 내 스타일엔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책 속에 실린 단편 "예스터데이"에 나온 구리야 에리카가 꿈에서 본 얼음 달을 형상화 한 듯한 표지그림은 꽤 괜찮은 듯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답을 하기가 조금 어렵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들이 풍기는 섬세하고 가라앉아 있는 듯한 분위기는 분명 좋아한다. 또한 질척대지 않고 간결한 느낌의 문장도 좋아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이 짊어지고 있는 감정의 무게와 과거의 상처를 끊어내지 못 하고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일상들은 묘하게 불편하고 숨이 막힌다. 그네들의 젊고 순수한 시절이 남긴 흔적들을 토닥거려주고 싶다가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데 너만 왜 유난이냐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단편모음집인데 이전에 그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조금 더 냉정해진 느낌? 관계를, 상실감을, 추억을, 남아있는 날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좀 더 객관적이 되어 더이상 늪에서 허덕이지만은 않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라고 느꼈다. 아, 이 사람이 성장했구나. 마침내 상처를 어느 정도 이겨내고 조금 더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그런 느낌말이다.


전에 어떤 영화평론가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소년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책 표지 안쪽에서 등장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진을 일단 보지 않고 그냥 작가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이 작가 역시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직 빛나던 청춘이 있던 시간의 기억과 그때 만나던 사람들, 즐거운 순간들, 가슴아픈 추억들이 있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구나 싶다.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고, 이 길인지 저 길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마냥 망설이기만 하는 딱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그려내는 재주가 있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들이 많은 것은 다들 그 시절을 안타깝게 기억하고 지금 닥친 현실의 고단함이 과거와 어딘가 이어져 있음을 알고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갈수록 빛을 바래가는 기억력 때문에 각 단편들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두려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다카쓰키는 죽어버린 아내가 바람핀 이유를 결코 알 길이 없다. 답을 해 줄 상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와이프의 애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스터데이"에선 운명이었을지도 모를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하고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독립기관"에선 마음이 기우는 방향이 달랐던 남녀가 등장한다. 남자는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함을 느끼고 실제로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 "셰에라자드"에선 일정한 시간에 나타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남학생의 집에 몰래 들어가 소소한 물건을 들고 나오고 자신의 것을 남기고 가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기노"에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남자의 다소 위태위태한 이야기가 그려지며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뒤 걷는 법, 옷 입는 법 조차 잊은 그레고르 잠자가 곱추 여인을 만난 뒤 세상을 새로 배워가려 한다. 표제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은 오래 전 연인이었던 여자가 자살했다는 정체모를 남자의 전화를 받은 주인공이 그 여자의 죽음으로 인해 관계된 사람들과 기억, 그 여자를 둘러싼 세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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