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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괜찮은 작품 하나를 발견했다. 슬금슬금 입소문이 나기 시작할 무렵 사두었으나 뒤늦게 읽게 되었는데, 더 빨리 읽었으면 좋았을걸 싶다. 뭐가 제일 좋았냐하면, 존 윌리엄스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참 괜찮더라. 이 작품은 스토너의 어린시절부터 그가 죽는 순간까지의 인생을 그려나가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우연히 들어간 대학에서 문학에의 열정을 발견하고 진로를 변경하여 학자이자 교육자가 된다. 첫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하나 얻는다. 학계에 이름을 널리 떨칠만큼 뛰어나진 않아도 나름 인정도 받고, 문학을 향한 탐구 열정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에너지 역시 결코 모자라지 않다. 뒤늦게 불륜에도 빠졌고, 동료와 큰 갈등도 겪지만 스토너는 마지막까지 나름의 인생에 충실하다. 이렇게 보면 참 평이한 내용이다. 마치 스토너의 일기를 보듯이 이야기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개인적으로 이런 스타일을 굉장히 지루해하고 멀리 하는 편인데, 이 책은 묘하게 흥미롭고 질긴 생명력이 있다.
사실 스토너는 참 특징없는 답답한 캐릭터다. 화가 나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슬퍼도 울지 않으며 억울해도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뒤늦게 발견한 그의 문학에의 열정은 눈이 번쩍 뜨일 천재성은 아니었으며, 교육자로서의 그는 학생들을 대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데 있어 기복이 심했다. 사랑에 빠진다고 유난을 떨지도 않고 불륜에 빠져도 본부인과 이혼을 위해 뭔가 꾸며낸다던가 하지도 않으며 동료가 그를 내몰기 위해 악질스런 수단을 써도 우아하게 대화로 풀어보려고 한다. 독자야 책을 통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지만 사실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인물들은 속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또 하나의 장점은 문장이다. 존 윌리엄스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명대사로 회자되는 그런 스타일의 것과는 모양새가 좀 다르다. 딱 한 줄을 대표문장으로 꼽는 그런 것 말고, 한 단락 전체가 눈길을 멈추게 하는 그런 것이다. 언뜻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다시 한번 지난 페이지를 뒤적여 읽게 만드는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뭔가에 막혀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을때,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유레카~"하는 발견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런 걸까, 저런 걸까 고민하다가 그런 것 같네, 하는 식의 결론이 실상 대부분이다. 이 책의 흐름이 스토너의 일기같다고 하는 것도 그렇다. 스토너의 감정을 묘사하는 글들이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하는, 외부의 제삼자가 다 설명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머뭇머뭇하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 내지 못하는 사람 특유의 망설임이 가득한 그런 묘사가 주를 이룬다. 한마디로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흔한, 평범한 일반인같다는 얘기다. 이 책의 평가가 이리 좋은 건 그래서일 수도 있겠다.
스토너의 딸이 어릴 적에 그가 일하는 서재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각자 자신의 일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고 가슴에 퍼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디테일한 묘사나 촌철살인의 대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몇 줄 안 되는 이 장면이 무척 마음에 남더라.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토너처럼 생활 속의 소소한 기쁨으로 위안을 받으며 살아간다. 매체에 등장하는 유명인도, 역사에 남길 이름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 흔하고 흔한 보통사람에게도 나름의 인생이 있고, 고뇌가 있고, 갈등이 있고, 사랑이 있다. 이 책 안에 보통 사람들의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인생이 있다.
윌리엄 스토너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에게 뜻밖의 친근감을 느꼈다. 그는 로맥스가 일종의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을 통해 알게 되는 직관적인 깨달음 같은 것. 스토너 자신도 예전에 아처 슬론의 강의를 들으며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 p. 139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 p. 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