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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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안양에 있는 지하상가에서 장사를 했다.

햇살 한 줄 들지 않는 그곳이었지만 그들은 

아침 10시부터 저녁 10시까지, 20여 년 동안 한결같이 그곳으로 출퇴근했다.

그들에게 그곳은 나를 키운 터전이었고, 미래의 희망을 담은 장소였다.


그리고 내게 그곳은 길 잃을 걱정 없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중앙 큰 도로가 에프(F) 자로 꺾이는 그곳은 처음 가는 사람들이 한두 번쯤 길을 잃기에 딱 좋았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지하상가를 돌아다녔기에,

내 나이대 아이 가운데 나보다 지하상가 길을 잘 찾는 이는 없을 거라는

나름의 자랑이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먹혔던 이유다.


그런 그곳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건 10여 년 전부터였다.

안양시는 낙후된 지하상가를 최신 시설로 변경하기 위해

A와 B로 리모델링 구역을 나누고, 단계별로 약 2년 동안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A와 B 구역을 한꺼번에 폐쇄하지 않는 이유는 상인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장사하던 이들에게는 분양 우선권을 제공할 테니 리모델링 이후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기다릴 것인지, 어느 쪽이든 어려운 선택이었다.

가게에는 권리금이라는 게 있어서, 어느 쪽을 선태하든 권리금 2억은 포기해야만 했다.

일부는 분양권을 포기한 뒤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일부는 2년 뒤를 기약하며 주변 다른 상가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우리 가게는 B 구역에 있었다.

안양역과 연결되어 있는 A 구역을 폐쇄하니, 이내 B 구역의 상권도 함께 허물어졌다.

게다가 B 구역에도 분양권을 포기하고 먼저 나간 가게들이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해

결국 B 구역이 폐쇄될 즈음에는 손님보다 가게 점원들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2년이 지나면 다시 이전처럼 장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조금 힘들어도 리모델링 끝나면 가게도 더 좋아지고 권리금도 오르겠지."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그 후 2년이 지났다.

성남으로 간 신성문고 아줌마와 수원으로 간 연진이네 아줌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동그라미 아줌마, 잉글랜드 아줌마는 우리 부모님처럼 다시 옛 터전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서로를 가게 이름으로 불렀다)


주인은 '리모델링'을 이유로 월세를 두 배로 올렸고,

안양시 역시 '리모델링'을 이유로 관리비를 두 배로 올렸다.

그럼에도 권리금은 '리모델링'을 이유로 0원부터 시작했다.

손님들은 새로 개장한 지하상가에 별 관심이 없었다.

2년의 시간은 지하상가가 없어도 익숙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몇 안 되는 손님을 나누어 가져야 했기에, 상인들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다.

앞집 언니는 우리 엄마가 자꾸 자신의 디스플레이를 베낀다며 도끼눈을 떴다.

퇴근 시간마다 자신의 마네킹에 보자기를 씌우느라 야단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그곳에서 1-2년을 더 버티다가 권리금 1,000만원에 가게를 넘겼다.


빛 한 줄기 내리지 않는 그곳에서 미래의 빛줄기를 생각하며

한없이 노력하던 우리 부모님은 결국 안양을 떠났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그곳에서 쫓겨난 우리 부모님 같은 상인들에게 남은 것은

상처와 울분뿐이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지내온 사람들의 시간을

이토록 가볍게 취급한 예의 없는 자들은 대체 누구인지.


그 후 부모님이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은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일하는 부모님' 모습을 떠올리면 지하상가의 그 가게가 생각난다.

그곳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이 생각난다.


나보고 예쁘다며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던 옆집 언니,

학교 들어가는 나를 축하한다며 신발을 선물해준 잉글랜드 아줌마,

체하기만 하면 사이다 한 병을 손에 들고 우리 엄마를 찾아와 손을 따달라 하던 건너 가게 아주머니,

내가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가게 등

공간도 사라지고, 그곳의 사람들도 사라젔는데 추억은 오롯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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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 작은 살림 - 매일 단정하게 가꾸는 홀가분한 삶
박현정 지음 / 위즈덤스타일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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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이다.

지금처럼 편하지만 편안하진 않은 아파트에서의 삶이 아니라

작지만 흙과 풀이 함께 있는 나만의 전원주택에서 사는 것이.

 

직접 지은 작은 집에서 남편과 고양이 두 마리,

우리 네 식구 소박한 살림으로 하루하루를 꾸미는 것.

정말 딱 필요한 물건만으로 채워진 우리만의 공간.

더는 더할 것도, 거둘 것도 없는 소박한 모습.

크지 않은 마당에 텃밭을 놓아

우리 식구 함께 먹을거리를 직접 재배하고,

햇살 드는 작은 거실에 고양이들 해바라기하는 곳.

 

<작은 집 작은 살림>은 그런 나의 꿈을 떠올리게 해주는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의 저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살림이 많아서 약간 당황했는데,

'작은'이라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을 떠올리며 넘어갔다.

이분의 '작은'은 이 정도구나, 하고.

 

부러운 것이 있다면

이분이 키우는 강아지 고양이가 보여주는 포근한 표정이나

직접 말린 수국의 소박한 모습 등.

'내가 직접 만드는 공간'이 주는 아늑함에 이끌려

지금 당장이라도 전원 주택을 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직장과 가까운 큰 도시에 붙잡혀 있는 삶이지만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나도 꼭 이 사람처럼, 땅과 함께 살아야지.

그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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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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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누가 보든 말든, 내 글을 잘 썼다 못 썼다 품평하든 말든

아무렇게나 막 써내려가지만 내게도 글쓰기가 두려운 때는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두려운 시기를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함께하던 내 직장동료는 달필가였다.

두 명의 신입을 한번에 가르치기 어려웠던 내 사수는 모든 미션을 둘에게 똑같이 주었다.

둘이 쓴 글 가운데 더 잘 쓴 글을 싣는 대결 방식이었다.

글쓸 일이 많은 직업이라 그의 장점은 곧 그의 모든 것이 되었고, 나는 늘 그를 받쳐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모든 이가 그를 좋아했고, 나는 갈수록 주눅이 들어 내 글쓰기는 점점 쭈구리의 그것이 되었다.

생각을 말로 옮기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었고, 내 글쓰기는 자꾸만 동료의 그것을 닮으려 했으니,

남의 옷을 입은 것마냥 볼품없었다.


그러다가 딱 한번 그 친구보다 내가 더 잘쓴 적이 있다.

각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사연 속에 책 속 구절을 섞어 은근히 책을 홍보하라는 미션이었는데,

나는 우리 엄마로 빙의되어 엄마의 처녀적 삶과 어려움, 그리고 나를 낳고 지금까지 맞벌이하며 살아가는 고단함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사연을 보낸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에서 내 글을 읽어주었고, 그 덕에 각 방송국에서 갖가지 선물을 받았다.

독일제 화장품, 패션잡지 6개월 구독권, 여성의류 전문점 상품권, 2인용 전기장판까지.

그것들이 내가 글로 얻은 첫 수확이었다.

그 이후 비로소 나는 그 직장동료와 스스로를 비교하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내가 엄마의 삶을 알고, 엄마의 고단함을 적극 공감한 결과 나온 글쓰기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감응하는 글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도.





<글쓰기의 최전선>은 글쓰기에 관한 책이지만 글쓰기 스킬보다는 글을 쓸 때의 자세나 마음가짐에 대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수유너머에서 진행한 글쓰기 수업을 바탕으로 그 당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자신의 워킹맘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그와 그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글을 쓰면서 삶을 치유하고, 세상과 감응하고,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가 삶에 필요한 이유는 이것이 아닐까.

삶이 고통일 때는 글을 써야 한다. 내 경험상 진심을 담은 글 한 편은 반드시 나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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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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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파견직, 계약직, 외주, 아르바이트까지 단어는 달라도 의미는 하나다.

본인 대신 책무를 이행할 누군가를 싼값에 그 자리에 세우는 것.

정규직을 대신할 비정규직, 비정규직을 대신할 외주자 또는 아르바이트를 세워놓는 식이다.

단 몇 푼의 돈으로 나의 의무와 책임을 이토록 쉽게 일임할 수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주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이 생겨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말만 되뇌일 뿐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대리'가 일상이다.

인문학자 김민섭은 이러한 오늘날 사회적 현상을 '대리사회'라 명명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로 대학의 불합리성을 고발한 저자 김민섭은

이제 대학이라는 제한된 틀에서 빠져나와 '길 위의 인문학자'로 바로선다.

이 책은 그 거리에서 지은 첫 책이다.

시간강사와 맥도날드 야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는

이제 글쓰기와 대리기사로 직업을 전향해 새로운 벌이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리기사를 수행하며 겪은 많은 사건들을

오늘날 사회와 결합시켜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써내려갔다.


책에서 살펴볼 수 있는 대리기사의 일과는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사회의 한 단면을 읽게 된다.

남의 운전석에서 그가 바라본 현실은 적나라했다.

카카오톡으로 이루어진 계약 관계는 단번에 갑과 을을 지정해낸다.

갑은 돈이라는 재화를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노동력뿐 아니라 영혼까지 좌지우지하려 든다.

반면에 을은 갑 대신 앉은 자리의 등받이 의자 하나도 자신의 몸에 맞게 끌어당기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노동자를 막대하는 사장, 그 사장 앞에서 아무 말 못하고 당하는 노동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가 보았을 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었다.

누군가의 욕망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감히 거부할 수 없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도 함부로 항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길이 외지니 꼭 마을버스 타고 내려가시라며 2,000원을 건네주던 손님부터,

"우리 함께 힘내요"라고 응원해주던 동갑내기 손님,

새내기 대리기사를 알아봐주고 몇 가지 팁을 알려주던 동료 대리기사들까지

저자는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주는 그들에게서

이 사회의 견고한 시스템에 작은 균열을 일으킬 방법을 발견한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봐줄 때, 서로의 곤란을 함께 보완해나갈 때

비로소 불합리함으로 견고한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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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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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신간을 읽었다.

제목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우리의 소원은 전쟁>은 김씨 왕조 붕괴 이후 남한에 흡수통일되어 혼란스러운 북한의 상황을 설정해놓고,

평화유지군, 남한정부, 통일과도정부(북한공화국), 함경도 장풍군 내 폭력조직의 공존과 혼돈을

박진감 넘치게 서술한다.


장강명은 <표백>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한국의 현실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로 보였는데,

이후 <한국이 싫어서>, <댓글 부대> 등으로 현실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는,

분단국가에 사는 이만이 그려낼 수 있는 소설을 썼다.


문체는,

섬세한 감정묘사와 대사보다는

복잡하게 얽힌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이 때문에 벌어지는 각종 사투를 묘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처음에 소설의 맥락을 파악하기까지는 몰입이 어려웠다.

이런 진지한 류의 소설을 읽을 때 감안해야 하는 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 이 주인공들의 이해관계와 맥락 설명 부분만 지나가면 나머지는 술술 읽힌다.

캐릭터가 성격이 단순하고, 이해관계도 분명한 편이라 그런 듯하다.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서술방식이 굉장히 그럴듯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흡수통일된다면 생길 수 있는 일을 그려냈다는 데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읽고 나면 통일이 두려워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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