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 왕이 되려 한 남자 외 24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6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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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들 모두 기이했는데 환상성은 작품을 극적인 긴장감으로 유지시키다 마지막에 폭발한다. 뚜벅뚜벅 발자국 소리가 나를 쫓아와 마음 졸이다가 뒤돌아보니 괴물이라고 할까.


보르헤스는 키플링의 단편을 선집해 <소원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바벨의 도서관’을 내면서 전쟁에 기반한 환상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들은 키플링이 제국주의자라고 비난하곤 했지만 보르헤스는 키플링한테서 제국주의의 이면을 발견한 듯하다. 이를 테면 대영제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면 해가 지지 않기 때문에 그림자도 지지 않는 것을 키플링의 단편에서 봤다는 것이다.


현대문학 출판사에서 나온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선은 보르헤스의 선집보다 단편이 더 많고 주제도 풍부하다. 전쟁에 기반한 환상성(‘정원사’)도 있고 사랑에 기반한 환상성(‘길가의 코미디’, ‘참호의 마돈나’)도 있으며 환상으로 오인된 과학(‘알라의 눈’)도 있다. 특히 ‘짐승의 표시’, ‘모로비 주크스의 기이한 사건’, ‘참호의 마돈나’, ‘알라의 눈’, ‘참호의 마돈나’, ‘정원사’ 가 재밌었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1936년 키플링이 사망했을 때 조사를 쓰면서 키플링의 ‘짐승의 표시’ 와 ‘모로비 주크스의 기이한 사건’의 줄거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키플링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내 주위의 변화와 부패를 의식하게 되었다” 고 말했다고 한다. p658


조지 오웰의 말에 공감한다. 키플링의 기이한 이야기. 기이함의 근원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과 야만으로 붕괴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두려움이자, 사람들에게 붕괴를 심어준 사회를 말할 것이다...

"선택은 다음 두 가지 죄악 사이에 있는 것 같소." 수도원장이 말했다. "우리의 손 안에 있는 ‘빛’을 세상에 알려 주지 않는 것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세상에 ‘빛’을 알려 주는 것. 당신들이 방금 본 것을 나는 오래전에 카이로에서 의사들 사이에서 보았소. 그리고 그들이 그로부터 어떤 교리를 이끌어 내는지도 보았소. 토머스 자네는 꿈을 꾸어 왔다고? 나 또한 자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추고 꿈을 꾸어왔지. 하지만 여루분, 이 기계의 탄생은 아직 시기 상조입니다. 그것은 이 어두운 시대에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고문, 더 많은 분열, 그 큰 어둠의 어머니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나의 세상과 교회를 잘 아는 나는 내 양심을 걸고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가십시오! 이제 끝났습니다." 그는 컴퍼스의 나무틀 부분을 벽난로의 너도밤나무 장작들 사이로 던져 넣어 모두 불태워 버렸다. p639 <알라의 눈>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죽음이에요. 삶은 죽음에서 시작돼요. 그녀는 이해하지 못해요.....아, 당신네 변호사들은 지옥에나 가세요. 난 모든 게 지겨워요. 지겹다고요! p565 <참호의 마돈나>

나는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궁가 다스가 까마귀를 유혹하던 그 덤불까지 걸어가서 그 너머의 부드럽고 하얀 모래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건조한 풀덤불에서 한 걸음 떼어 놓는 순간 탈출의 희망이 얼마나 무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 발밑에서 엄청난 힘으로 모래가 나를 잡아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내 다리는 이미 무릎까지 빨려 들어갔다. 달빛 속에서 그 모래 지역은 나의 실망감을 보면서 악마 같은 즐거움으로 흔들흔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공포와 탈진으로 땀을 흘리며 내 몸을 빼내어 바로 뒤의 덤불로 돌아와 얼굴을 땅바닥에 깔며 엎드렸다. p53, <모로비 주크스의 기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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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 여행 중독자가 기록한 모든 순간의 여행
추스잉 지음, 김락준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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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일상과 다른 점은 낯선 곳에 간다는, 내가 처음 만나는 것에 있기에 나는 동네 골목길도 안 가본 길이라면 여행과 같다고 주장한다. 매번 가던 길만 가니 서울 촌놈이 되는 것인데 서울 촌놈은 여행의 기쁨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추스잉이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에서 ‘집 주변 산책로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세계여행을 떠나도 무의미하다’ 고 했을 때,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여행갈 때도 여행가방에 책 두어 권은 넣고 다녔다. 교토 가와가모 강에서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가, 풍경이 좋아 걷는 것을 잠시 멈추고 책을 꺼내 읽은 것이었는데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숙여 책을 볼 때 내 눈은 책을 향하니 마음은 책으로 닫혀 버릴 것이고 가와가모 강과 교토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책이 아닌 세상으로 향해야 하고, 그 때야 나는 여행의 기쁨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일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여행할 때 책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 


추스잉도 나와 비슷한 얘기를 한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여행하는 도시를 충분히 체험하지 않고 스타벅스나 게스트하우스의 소파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을까? p178’ 츄스잉은 여행 중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는 사람을 안타까워 한다.


전 세계를 여행다닌 츄스잉은 여행자의 삶에 대해 말한다. 츄스잉을 보고 인생은 여행과 꿈의 연속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가고, 여행 갔다 와서는 여행 또 가고 싶다고 꿈을 꾸고, 다시 여행을 간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시간을 사는 것이기에 낯선 곳을 가는 여행이고 악몽을 피하려 하고 길몽을 향하려 하는 여행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요소는 여행과 꿈이었다”고 말했다. 추스잉한테서 카잔차키스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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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
정낙림 지음 / 책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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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림의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 - 호모 루덴스를 위한 철학사>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책은 철학이 놀이를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 말한다. 이를테면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칸트, 실러, 니체, 하이데거, 가다머, 핑크, 비트겐슈타인, 반예술운동은 놀이에서 어떤 철학적 의미를 발견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술이 성립하려면 감성, 상상력, 자유 라는 전제조건이 갖춰져야 하고 이것들은 놀이의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칸트와 실러는 놀이가 내포하는 우연, 상상, 자유같은 가치를 인간성의 요소로 수용했다고는 하지만 근대사고의 한계에 갇혔기에 놀이를 유아기 교육에 제한했고 노동과 대립되는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어렸을 때 엄마한테 자주 혼났다. 엄마는 내가 공부는 안하고 책상에 앉아 공상만 하고 낙서나 그린다고 하셨다. 엄마는 칸트와 실러 식의 근대적 사고를 가지셨던 것 같다.


엄마가 니체 식의 사고를 가지셨다면 나를 혼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니체는 '인간은 노동하고 사랑하고 죽는 존재인 동시에 놀이하는 존재이며, 놀이를 통해 인간은 상상할 수 있고, 세계를 자유롭게 바라봄으로써 전체로서의 세계를 조망한다 p33' 라고 했기 때문이다.


놀이하는 인간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을 말하기도 한다. 니체는 삶의 가치를 부정하고 권력을 쇠퇴시키는 기성가치를 니힐리즘이라 하여 배척하고,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면서 기성가치를 전도하기를 주장했다. 이 때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놀이이다.


"니체에게 예술가란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자이다....(중략)...인간 개개인에게 잠자고 있는 창조의 능력을 일깨움으로써, 외부에서 주어진 가치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의 주체임을 확인시킨다.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힘을 세계에 투사하여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조형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삶의 과정이자 예술 창작의 과정이다. 삶을 예술작품을 창작하듯 살아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궁극적으로 희망하는 삶이다.p357"


삶을 놀이처럼 살고 싶다. 그것은 "절망스러운 삶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를 조형하는 일이 될 것이므로, 나를 긍정하고 나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p366) 박노해 시인이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서 썼듯이 죽을 때, 잘 놀다 갑니다. 맑은 웃음으로 떠나고 싶다. 고맙습니다. , 잘 놀다 갑니다. 남은 하루하루 남김없이 불 사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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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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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능의 물건에 잠재된 능력, 경시받고 죽어 있는 대상물 속에서 사랑스럽게 재생되는 생명,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 p99-100”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에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자기가 흔하고 하찮은 것들을 수집해 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면서 겪은 소외와 상실감에서 비롯된 일인데, 그가 수집으로 세계의 낯섬을 받아들이고 배웠다(p169)고 하더라도 값이 나가고 희귀한 것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흔하고 하찮은 것을 수집하다니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안다. 그는 인류의 삶이 많은 것을 파괴한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정복의 역사이고, 탐욕를 채우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해야했던, 파괴의 역사이다. 인간은 약한 이들을 유린했으며 환경을 오염시켰다. 동물의 개체수와 동물이 살 터전이 줄어들었다. 무기를 개발했고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세계를 자신의 탐욕에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에만 관심이 있었다. 흔하고 하찮은 것들을, 인간 탐욕은 제일 먼저 소외시켰고 이용했다.


비가 와 미세먼지가 옅어진 공기, 시골 밤하늘에서만 보이는 별, 담벼락을 날아 다니는 민들레 꽃씨, 보도 블록 사이로 핀 잡초 한 송이, 골목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이 제일 소중하다. 통조림 라벨, 과자 봉지, 우편 봉투 속지처럼 흔하고 하찮은 것들이 소중하다. 그것들은 인간 탐욕의 역사가 제일 먼저 희생시킨 것들이기에 비록 지금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100년 뒤 우리 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지도 모를 것들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살아남은 이 작은 것들은 아름답다. 


윌리엄 데이비스 킹의 수집 역사에서 그가 부딪친 소외와 상실감의 시간을 읽을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소외당했고 상실되었던, 인류의 긴 시간이 투영되는 것을 발견했다.


작고 하찮은 것들을 나도 수집해야겠다. 수집이 어렵더라면 소중히 여겨야겠다. 꽃에 물을 줘야 겠다, 아버지와 대화를 해야겠다, 친구한테 손편지를 써야겠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 한글을 더 써야겠다. 지금도 사라져 가고 있는, 제일 먼저 사라질 것들이니...



*수집은 세계의 낯섦을 받아들이고 배우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방랑벽의 한 형식이다. p169

*수집에 정성을 기울임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훈련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수집은 실질적인 포옹의 경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다. p168

*어떤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그들이 보기에 다른 수집가들은 모두 죄가 더 큰 사람들이다. p251

*사람들 사이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수집 충동은 극도로 풍요로운 물질사회에서 우리가 받는 깊은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다수가 각자의 개인사에서 받는 상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집이 그런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충분할 정도로 좋다. 수집은 사물에서 질서를, 보존에서 미덕을, 모호함에서 지식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수집이 가치를 찾아내기도 하고, 심지어 가치를 창조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p26

*수집이라는 행위는 ‘종교적’이다. 모으거나 한데 묶는다는 어원상의 의미로 볼 때 그렇다. 진귀한 대상물들이 연합되고, 신성한(또는 악마적인) 것이 수집할 만한 대상물 속에 깃든다. 수집은 일종의 마법이다.(또는 기도다.) p79

*나는 불능의 물건에 잠재된 능력, 경시받고 죽어 있는 대상물 속에서 사랑스럽게 재생되는 생명,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깃든 의미 있는 어떤 것에 끌린다.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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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 -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임종학 강의
모니카 렌츠 지음, 전진만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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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다룬 책을 하나 둘 모으고 있다. 나는 주제별, 장르별, 작가별로 책을 정리해 놓고 있는데 방 오른쪽 서가에는 죽음에 대한 책만 꽂아 놓았다.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 에드가 모랭의 <인간과 죽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 어네스트 베커의 <The Denial of Death>,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 다닐로 키슈의 <죽은 자들의 백과사전>, C.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이 꽂혀 있고, 책이 말하는 바가 전부 달라 죽음을 고요한 마음으로 살펴 보고 있다. 


예컨대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중세에서 근대까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갖는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보여주었고, 에드가 모랭은 <인간과 죽음>에서 삶과 죽음을 연결시켜 인간을 통해서 죽음을 알고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현대 사회가 위생 보건 상의 이유로 죽어가는 자를 격리시켜 만든 고독이 죽어가는 자의 죽음을 앞당긴다고 했고, 박완서와 C.S 루이스는 사랑하는 자가 죽은 슬픔을 신의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모니카 렌치는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에서 죽어가는 자들은 죽음 앞에서 신적인 완성을 좇는다며 죽어가는 자들의 임상사례를 비추면서 말한다.


저자는 정신종양학 의사로 환자들에게 상담치료를 한다고 한다. 고통을 완화시키도록 도와주고, 꿈속 상징을 해석해 준다고 했다. 트라우마에 대처하도록 도와주고, 긴장을 완화시켜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죽음을 마주할 것인가>에서 죽어가는 자의 신체적 변화를 내세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임사체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저자는 죽음이 대결에서 평온으로, 불안에서 신뢰로 바뀌는 것(p242)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것은 두려워 할 일, 창피스러운 일이 될 수 없다. 


차인표에 따르면, 김영애 씨가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마지막 촬영을 하며 "나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50회가 끝날 때까지만 살아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어요. 부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서 제작진이나 연기자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내가 아픈 것 때문에 누가 안되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뒤 수의와 영정사진을 직접 고르며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김영애 씨처럼, 살아 있는 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 삶을 즐기는 것은 죽음 앞에 선 자의 존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자가 존엄을 잃지 않고 죽어갈 수 있게 사회가 죽어가는 자를 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모니카 렌치의 글을 읽었다. 모니카 렌치의 책을 서가에 꽂아 놓았다...

●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죽음이 위협받고 있다. 온전한 과정으로서의 죽음에게 죽음이 본래 갖고 있었던 존엄을 돌려주어야 한다. 여기서 존엄이란 인간 삶의 드라마에서 종막을 장식하는 위대함과 의미 앞에서 정의를 표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죽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으레 겪는 경험들이 비록 그들 내면 안에서 너무나 강렬하고 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도 그 모두가 진실임을 그들은 인정받고 싶어 한다. p228-229

● 임종준비란 죽어가는 사람의 내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이후에 그가 편안히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음의 문턱을 넘는 과정과 인지 감각의 변화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죽어가는 사람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 자극받았던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삶을 제공했던 자기중심적인 세계에 계속 머무리라고 말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세를 떠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우리는 그들 내면에서 충돌하는 모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과도한 의료 조치로 억지로 목숨을 부지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그건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다. p2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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