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 인간 본성의 역설
리처드 랭엄 지음, 이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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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랭엄의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가축을 길들여서 야생의 난폭한 성질을 제거하듯이 인간도 길들여졌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인간은 사형이라는 방법으로, 난폭한 자들을 제거해 왔다는 건데 그래서 현재의 인류는 난폭한 자들이 저지르는 반응적인 공격(화가 나서 하는 공격)을 자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난폭한 자를 제거할 때 집단이 사전에 계획하여 공격하는, 주도적 공격이 이뤄졌다고 한다. 집단이 사전에 계획할 때 언어가 있었다. 언어가 발달하고 생각을 공유한 뒤 사람들은 연합을 해서 공격적인 자들을 처단했다고 한다. 집단이 공격을 한다는 것은 반대로 집단한테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해서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켰고, 그 두려움 때문에 인간은 규범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성도 진화되었고. 인간의 진화에는 언어가 있었다.


조두순 사태를 떠올렸다. 조두순이 출소했을 때 구치소부터 집까지 사람들은 그를 쫓아갔다. 욕을 했고, 소리를 질렀고, 위협을 가했다. 이들은 조두순을 손봐주겠다. 조두순을 죽이겠다고 말했는데, 이들이 공통의 언어로 무리를 지어 난폭한 자를 제거하려고 한 것이 길들이기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길들이기가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조두순을 제거하겠다는 길들이기가 이 세상의 아동성범죄를 없앴을 수 있을까. 조두순을 없앨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을까. 피해자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대신 주목하고 싶은 건 조두순을 제거하겠다고 몰려든 이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조두순 집 인근 주민들이 이들에게 당신들의 행위는 주민한테 폭력을 저지르는 것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는가. 라고 항변하는 걸 유튜브로 봤다. 그 영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고, 댓글에는 맞는 말이네. 라는 공감이 붙었다. 또한, 경찰이 이들을 제지하며, 당신들의 분노는 이해하지만 주민한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사적복수는 야만적인 일이며, 사법당국의 공무수행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다. 조두순을 길들이겠다며 공통의 언어로 달려드는 이들에 대한 반대 또한 집단 사이에서 공통의 언어로 이뤄졌다.


이 책의 제목인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처럼 공통의 언어는 인간의 야만성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감소시키기도 한다. 공통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나. 누구와 공감하고 있나. 그런 질문을 할 때 인간은 스스로를 길들여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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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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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지 못하던 소설가는 로봇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로봇한테 언어를 가르친다. 그는 로봇이 사유하게 하고 감정을 표현하게 한다. 이게 정말 로봇이 사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유하는 행위를 학습해서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호한데 그러다 로봇은, “전 여기서 단 한 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작동을 멈춘다. 로봇이 죽고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이 소설 한쪽에서는 소설가의 과거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가가 처음 쓴 소설은 연인이 자기한테 해준 이야기, 즉 연인한테 들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보자면 이 소설이 ‘듣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고, 그건 다른 말로 ‘듣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대학교수이기도 했으므로 강의를 하며 그는 듣지 않고 말하기만 했을테니 그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로봇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소설가는 말을 할 뿐이었다. 로봇의 죽음은 소설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건 이제 듣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니 소설가가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회상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듣기와 쓰기 사이에는 회상하기가 들어있다. 이야기를 쓰는 메커니즘은 ‘듣다 -> 회상하다 -> 쓰다.’ 의 순서로 이루어지니 말이다. 로봇이 죽은 뒤 소설가는 이야기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는 기계와 얽힌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고,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인 소설가의 전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회상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어떤 쓰기라도 회상하기와 듣기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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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 GD 시리즈
린 노티지 지음, 고영범 옮김, 우연식 그래픽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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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국립극장에 린 노티지의 <스웨트>가 오를 예정이어서 예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다. 공연이 열리기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도 올해 예매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는 통에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예매했던 공연이 취소되었다는 안내 문자를 받을 때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결국 <스웨트> 공연 마저 취소되는 걸 보고, 코로나 이 개새끼 욕을 하고야 말았다. 나중에라도 공연을 하면 좋을테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공연은 못 보게 됐지만 대신 알마 출판사에서 <스웨트> 희곡이 출간되어서 읽었다. 신자유주의 경제문제로 외부(직장)가 붕괴되자 내부(개인)도 붕괴되는 과정이 무척 설득력 있고, 인상적이고, 가슴아프다. 개인의 붕괴는 알콜, 마약 중독, 범죄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개인과 개인의 충돌(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할 동료이자 함께 울고 웃을 이웃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싸워야 할 적, 내 것을 뺏어간 도둑으로 여기는)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 같은 건데 그 말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 우정, 연대의식, 공감 능력 같은 걸 의미하지만 개인이 붕괴되면 콩 한 쪽도 나누지 않게 된다. 미움, 분노, 처절함, 서글픔이 남는다.


사회의 붕괴는 가정의 붕괴로 이어지고 가정의 붕괴는 개인의 붕괴로 이어진다. 그 역도 성립한다. 그렇게 보자면 국가가 개인을 보호해준다는 개념은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대에 국가에서 내국인 외국인 가릴 것 없이 재난지원금을 주고(조건은 부여된다.), 치료를 해주고, 여러 가지 정책을 펼치는 것은 기억해야한다. 이 정책이 포퓰리즘이냐, 실효성이 있는 정책이냐. 국가의 부채가 늘어가는 것 아니냐. 하는 고민을 해야 하지만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여러 정책을 한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될 수 없고, 외국인한테 재난지원금을 준다고 해서 세금낭비가 될 수 없다. 국가는 국가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인간의 존엄이다. 정말 좋은 작품을 읽었다. 잘 쓴 작품이자 문제의식이 날카로운 작품. <스웨트>.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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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8 0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통통다람쥐 2022-10-02 19:42   좋아요 0 | URL
다시 공연이 올라가서 다행입니다. ^^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 GD 시리즈
린 노티지 지음, 고영범 옮김, 우연식 그래픽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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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노티지 <스웨트>. 작품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슬픈 과거를 관객한테 암시하는 '현재'-슬픈 '과거'-슬픈 과거를 관객이 알게 된 뒤 '현재' 의 순서로 진행된다. 공간적 배경은 공장이 있는 가난한 소도시이고, 시간적 배경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시작된 2000년대 초반이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은 대를 이어 이 도시에 살고 있는데 그들은 똑같이 가난하다. 백인과 흑인은 공장 생산직으로 일하지만 히스패닉은 공장에서 일할 수 없다. 공장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없다.

똑같이 가난하고 똑같은 일을 하니 백인, 흑인, 히스패닉은 친구가 된다. 그건 반대로, 똑같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똑같이 되지 않는 사건(신자유주의가 야기한, 해고와 채용, 실직과 구직)이 발생하고 이들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외부가 붕괴되어 나의 삶이 위협당할 때 적으로 규정되는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다. 인간 존엄은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하지만 아주 말도 안되는 방법으로 위협당한다.

<스웨트>에서 지금 한국을 떠올렸다. 문재인 정부 들어 양대 노총은 건설업 분야 불법취업자 같은 외국인들이 내국인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정부가 여성에게 문을 더 열겠다 하니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등장했다. 외국인이 늘어나면 일자리도 더 늘어나는 것 아닌가? 여성에게 평등한 세상은 남성에게도 평등한 세상 아닌가? 이런 주장은 부당하다. 코로나 창궐로 경제난은 더 심해질 거라는 예측이 있으니 <스웨트>와 같은 이야기는 일어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이 의미심장하다. 슬픈 과거를 관객한테 암시하는 '현재'-슬픈 '과거'-슬픈 과거를 관객이 알게 된 뒤 '현재'라는 구조는 화해-갈등-화해를 나타낸다. 화해단계에서 서로는 만난다. 마주 보고 껴안는다. 함께 있고, 사과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마주 보는 것은 곧 상처받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발견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라고 <스웨트>는 말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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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빌 헤이스 지음, 고영범 옮김 / 알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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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헤이스 <별빛이 떠난 거리 : 코로나 시대의 뉴욕 풍경>. 거리를 걷다가 낯선 누군가를 만나고, 인사를 나누고, 말을 섞고, 웃음을 교환하고, 축복을 빌며 헤어지는 장면으로 책은 시작한다. 그건 코로나 시대 이전에 쉽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인데 코로나 시대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 이야기를, 코로나 시대 이전 풍경으로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 이전 풍경은 이야기 곳곳에서 나온다. 장면이 대비되니 이야기에 긴장감이 생기는 효과가 있지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썼다기보다는 빌 헤이스의 현재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금,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워하며, 과거가 다시 도래하기를 꿈꾸고 있다.

뉴욕 시민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건데 (정신질환자로 보이는 벌거벗은 남자에게 옷가지를 건네는 남자라든지 마스크를 그냥 나눠주는 약사, 코로나로 어려워진 식당에서 일부러 음식을 더 사는 빌 헤이스 등...), 분노와 혐오와 다툼은 찾을 수 없다. 코로나의 원인을 찾으려 분노하고,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말하며, 마스크를 사겠다고 싸우는 뉴욕 시민들은 왜 없었겠나. 빌 헤이스는 사랑을 본다. 분노는 마지막에 등장한다. 코로나로 인한 분노가 아니라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인종문제로 인한 분노인데 빌 헤이스는 큰 슬픔을 느끼고 시위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가 코로나 시대에서 사랑을 기록했듯이 인종문제 시위에서도 사랑을 기록할 것 같다.

코로나 시대. 사랑, 이해, 연대심, 슬픔, 그리움, 외로움, 희망, 믿음, 감사, 인내, 우울, 무기력, 공허, 분노, 혐오, 다툼, 원망, 탐욕, 이기심, 이타심, 거짓말, 무관심, 무책임, 방관, 방종, 고집, 기술에서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나. 무엇을 보고 있나. 우리는 코로나와 싸우는 거지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고, 빌 헤이스가 코로나 시대 뉴욕에서 사랑과 연대를 써 내려간 것도 같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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