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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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지 못하던 소설가는 로봇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로봇한테 언어를 가르친다. 그는 로봇이 사유하게 하고 감정을 표현하게 한다. 이게 정말 로봇이 사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유하는 행위를 학습해서 보여주는 것인지는 모호한데 그러다 로봇은, “전 여기서 단 한 번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작동을 멈춘다. 로봇이 죽고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이 소설 한쪽에서는 소설가의 과거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소설가가 처음 쓴 소설은 연인이 자기한테 해준 이야기, 즉 연인한테 들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보자면 이 소설이 ‘듣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고, 그건 다른 말로 ‘듣는’ 사람이다. 소설가는 대학교수이기도 했으므로 강의를 하며 그는 듣지 않고 말하기만 했을테니 그는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로봇에게 언어를 가르치면서도 소설가는 말을 할 뿐이었다. 로봇의 죽음은 소설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건 이제 듣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니 소설가가 다시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당연하다.


여기서 회상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듣기와 쓰기 사이에는 회상하기가 들어있다. 이야기를 쓰는 메커니즘은 ‘듣다 -> 회상하다 -> 쓰다.’ 의 순서로 이루어지니 말이다. 로봇이 죽은 뒤 소설가는 이야기를 찾았다고 말하는데 그 이야기는 기계와 얽힌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고,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인 소설가의 전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회상의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결국 이 소설은 소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어떤 쓰기라도 회상하기와 듣기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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