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 10 - 영국 산업 혁명 편 : 멋진 신세계 설민석의 세계사 대모험 10
설민석.김정욱 지음, 박성일 그림, 원태준 감수 / 단꿈아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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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어렵다는 사람들한테 강력 추천해요. 역사가 제일 쉬웠다는 말을 하게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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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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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화가 사전이라고 부르면 될까.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일대기를 4-5페이지 분량으로 모아 놓고 있다. 책을 처음부터 읽어도 좋고, 사전이 으레 그러하듯 발췌해서 봐도 무방한데 어떤 화가든지 두 가지 내용이 공통됐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감으로 초현실주의 미술을 그렸다는 것과, 초현실주의 그룹을 조직한 앙드레 브르통과 불화를 겪었다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이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회에 회의를 안겨주었다. 그러자 화가들은 전통에서 벗어난 그림, 무의식에 기반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림이 무슨 뜻이냐고 궁금해 했지만 그럴 때마다 화가들은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궁금함을 가지는 건 인간의 본성이니 화가들이 그렇게 답을 해도 사람들은 해석을 하려고 할 것이다. 해석을 하면 할수록 설득력 있게 보이는 답을 찾을 것이지만 어쩌면 그럴수록 화가의 의도에서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초현실주의 그림은 反이성, 反질서가 목적이니 거기서 이성적인 해석을 하고, 질서를 찾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니 말이다.


화가들의 매 이야기마다 앙드레 브르통이 등장했다. 그는 초현실주의 선언을 하여 초현실주의자 그룹을 만든 사람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불확실성은 화가들에게 불안을 주었을 것이고, 불안에 대처하려 화가들은 초현실주의 그룹으로 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브르통은 독선적이고, 편협하고, 질투심 강한 독재자였다. 화가들과 반목하는 일화가 골때리는데, 그룹 운영을 그렇게 했으니, 이야기마다 ‘브르통과 사이가 틀어져~’, ‘브로통과 거리를 뒀고’, ‘브르통과 철학적 견해차를 보였고’ 라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해 보였다. 브르통과 같이 일을 했다면 나 또한 머리가 아팠을테지만 거리를 두고 보면 흥미롭다. 추진력이 있었지만 모순적이었고, 혜안이 있었지만 질투와 편협함에 혜안이 눈먼 사람. 질서에 저항하자면서 자기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독재자로 군림한 사람. 선동하고 음모를 꾸민 사람. 이 사람에 강하게 끌린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을 읽고, 오래 전 읽었던,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내가 다시 집어든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쟁이 만든 불안->초현실주의’ 라는 순서를 보니 현재 코로나 시대에는 어떤 예술사조, 어떤 운동이 나올지 궁금하다. 현재의 불안을 반영할 예술사조는 무엇인지, 현재의 불안을 극복하려 예술가들이 어떤 운동을 할지 말이다. 동시대 예술에 자꾸만 관심이 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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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의 은밀한 매력
데즈먼드 모리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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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이 사람들과 모여서 공동으로 시를 쓴 걸 본 적이 있는데, 공동의 시란 이런 것이었다. 시인이 종이에 아무 문장이나 써서 상자에 넣고, 다른 사람이 다른 종이에 역시 아무 문장이나 써서 같은 상자에 넣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각각 문장을 써서 종이를 상자에 넣는다. 상자에서 종이를 꺼내 적힌 글을 칠판 위에서부터 하나씩 적는다. 문장은 상자 밖을 나와서 쌓였다. 이어진 문장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말이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시라고 불렀다.


이게 시인가? 시는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시가 아니다. 문보영 시인은 공동의 시를 통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시가 그러한 것이라면, 계획을 세우지 말고, 무의식과 우연이 이끄는 대로, 시가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하는 건 어떤가. 그것이 우리의 무의식을 발견하게 하고 틀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면 그것을 시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문보영 시인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운동과 같다.


“그들은 초현실주의 철학의 기본 규칙을 따르고 있었다. 분석하지 말고, 계획을 세우지 말고, 오로지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그리는 것이다. 가장 어둡고 가장 비합리적인 생각이 무의식에서 솟구쳐 나와서 캔버스에 자신을 드러내도록 하라.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림이 스스로 그려지도록 하라...(중략)...초현실주의 작품은 마음의 더 깊숙한 곳을 건드리기에,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로 관람자에게 직접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모두 동일한 희망과 두려움, 동일한 증오와 사랑과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p18-19


100년 전에 있었던 운동을 행하는 시인이 있고, 100년 전에 있었던 운동을 조망하여 책을 낸  데즈먼드 모리스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떠올리며 흥미를 느끼는 내가 있다. 초현실주의자 선언은 지금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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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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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개발국가를 개발하는 유네스코 직원인 파버는 인간이 과학기술로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삶이 통제되지 않자 불안해한다. 그가 죽음을 피해다니는 이유는(자살한 친구를 닮은 사람을 피한다든지 친구가 자살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닥치는 사건은 우연으로 진행된다. 우연은 과학기술의 합리성과 대척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얼마나 흥미로운 진행인가. 그는 죽음을 직면한다. (딸이 죽고, 그도 죽는다.) 죽음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죽음(자연의 일부인)을 통제할 수 없어서 피해 다녔건만 막상 죽음을 맞닥뜨린 뒤에는 기존의 세계관이 바뀌어 버렸다.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니 죽음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재 삶을 즐기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8월 22일에 방영한다는 SBS 스페셜 예고를 봤다. <엄마를 얼렸어? 냉동인간, 과연 부활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예고편은 죽고 싶지 않아서 나를 냉동보존을 하겠다는 사람들, 영영 떠나 보내기 싫어서 사랑하는 이를 냉동보존하겠다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었다. 파버는 기술을 신봉했지만 죽음까지 지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설 당시의 기술로는 여기까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는데 만약 파버가 현재의 사람이라면(소설은 1950년대가 시간적 배경이다...) 소설은 결말이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소설에서 파버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즐기려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1에서부터 10까지 밖에 없다면 그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할 것이니 말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선 하찮고, 마음에 들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사건조차도 아름답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1에서 50으로 늘어날 수 있다면 현재를 즐길 것인가. 돈이 있으면 1에서 100까지도 늘릴 수 있다면 현재를 소중히 할 것인가. 사소하고 불만스러운 하루가 아름답게 보일 것인가. 내 삶의 시간을 늘릴 수 있는데 그까짓 것 새로 고치면 되지. 돈 주고 사면 되는 걸.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고 SBS 스페셜 예고를 보니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계는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한계를 넘으려 도전하고, 도전하다가 패배하고,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한계 속에서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실 것이다. 나는 애인을 사랑하지만 애인은 죽거나 (또는 내가 죽거나)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나는 이 골목을 사랑하지만 골목은 재개발될 것이다. 나는 비를 사랑하지만 비는 그칠 것이다. 죽음과 이별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깨달음은 언제나 뒤에 온다. 후회와 한탄을 동반한다. 현재를 즐겨라. 지금 현재를 사랑하라. 라는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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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 종(種)의 최후 현대 예술의 거장
정준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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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평전에는 예술가가 남긴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쓰여 있지만 반대로 그 예술가의 사생활이 얼마나 존경스럽지 못한지도 쓰여 있다. 이건 예술가가 쓴 자서전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비난받기를 두려워하고, 욕망 앞에서 눈이 어두워지니 거짓말을 하고 과대포장하고 자신한테 불리한 사실은 침묵한다. 비겁해진다. 그 누구도 예외 없다. 평전은 작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파고 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자서전에 비해서는 대상자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더 말한다. 다만 대상자의 이해관계인이 평전이 사실과 다르다며 항의를 할 수는 있으므로 평전 작가가 서술을 일부러 누락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는 스트라빈스키의 사생활을 이렇게 말한다. 스트라빈스키는 계산적이었고, 속임수를 썼고, 자기중심적이었고, 가정에서는 권위적이었으며 불륜을 저질렀다고. 니진스키가 스트라빈스키를 비난하는 글을 일기에 쓴 것도 그렇고 쇼스타코비치가 스트라빈스키에 실망한 것도 스트라빈스키의 사생활을 엿보는 단초가 된다. 스트라빈스키가 현재 한국에 살고 있다면 작품 활동을 못할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예술가한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많은 비난이 일어날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존경스럽다고 사생활까지 존경스러워야 할 이유는 없는데 한국 사회는 왜 그렇게 예술가한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예술가의 작품에 집중하지 않고, 예술가의 사생활에 더 집중한다. 한국사회가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할 안목이 없기 때문인가? 또는 예술가의 사생활에 감정적으로 더 빠져들기 때문인가?


나는 누구나 범죄를 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반대로 누구라도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비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술가의 사생활로 작품을 비난하는 건 동의하지 않는다. 그 말이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제3자인 대중이 풍문만 가지고 과연 당사자의 삶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나.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생활이 존경스럽지 않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반성을 하면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스트라빈스키 : 종의 최후>에는 정준호가 인용한 책들과 정준호가 했던 여행과 정준호가 추천하는 스트라빈스키 작품 연주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정준호가 스트라빈스키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성실히 노력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을유문화사에서 서평단을 모집하는 이벤트를 했을 때 신청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에는 예술가의 삶을 성실하게 복원하려는 노력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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