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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평점 :
저개발국가를 개발하는 유네스코 직원인 파버는 인간이 과학기술로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삶이 통제되지 않자 불안해한다. 그가 죽음을 피해다니는 이유는(자살한 친구를 닮은 사람을 피한다든지 친구가 자살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닥치는 사건은 우연으로 진행된다. 우연은 과학기술의 합리성과 대척된다는 걸 생각한다면 얼마나 흥미로운 진행인가. 그는 죽음을 직면한다. (딸이 죽고, 그도 죽는다.) 죽음은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을 지배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죽음(자연의 일부인)을 통제할 수 없어서 피해 다녔건만 막상 죽음을 맞닥뜨린 뒤에는 기존의 세계관이 바뀌어 버렸다.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니 죽음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재 삶을 즐기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8월 22일에 방영한다는 SBS 스페셜 예고를 봤다. <엄마를 얼렸어? 냉동인간, 과연 부활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예고편은 죽고 싶지 않아서 나를 냉동보존을 하겠다는 사람들, 영영 떠나 보내기 싫어서 사랑하는 이를 냉동보존하겠다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었다. 파버는 기술을 신봉했지만 죽음까지 지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설 당시의 기술로는 여기까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지 모르겠는데 만약 파버가 현재의 사람이라면(소설은 1950년대가 시간적 배경이다...) 소설은 결말이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소설에서 파버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현재를 즐기려는 게 인상적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1에서부터 10까지 밖에 없다면 그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할 것이니 말이다. 한정된 시간 속에선 하찮고, 마음에 들지 않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사건조차도 아름답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1에서 50으로 늘어날 수 있다면 현재를 즐길 것인가. 돈이 있으면 1에서 100까지도 늘릴 수 있다면 현재를 소중히 할 것인가. 사소하고 불만스러운 하루가 아름답게 보일 것인가. 내 삶의 시간을 늘릴 수 있는데 그까짓 것 새로 고치면 되지. 돈 주고 사면 되는 걸. 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고 SBS 스페셜 예고를 보니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계는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한계를 넘으려 도전하고, 도전하다가 패배하고, 한계를 알기 때문에 한계 속에서 즐기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실 것이다. 나는 애인을 사랑하지만 애인은 죽거나 (또는 내가 죽거나) 우리는 헤어질 것이다. 나는 이 골목을 사랑하지만 골목은 재개발될 것이다. 나는 비를 사랑하지만 비는 그칠 것이다. 죽음과 이별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깨달음은 언제나 뒤에 온다. 후회와 한탄을 동반한다. 현재를 즐겨라. 지금 현재를 사랑하라. 라는 말은 쉽지만 결코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