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싸이코패스
마틴 맥도나 감독, 우디 해럴슨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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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마틴 맥도나는 증오와 분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영화가 싸이코패스들이 총질을 하는 뼈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잔혹한 복수를 위해 총을 드는 홍콩 느와르 영화와 서부극을 비튼 것인데 총질은 멋있기는커녕 우스꽝스럽다.(총에 머리를 맞았는데 머리가 수박처럼 터진다거나 총에 머리를 맞았는데 즉사하지 않고 강아지한테 손짓을 하고, 장난감처럼 생긴 조명탄 총을 들고 있거나 하는 식이다.) 서부극의 매력인, 악당한테 복수를 하는 쾌감, 쫓고 쫓기는 빠른 속도감과 광활한 자연 풍광에서 오는 해방감을 차용했지만 그또한 반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속도감은 짜릿하지도 않고 광활한 자연 풍광이 해방감을 주지도 않는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디어 헌터>에서 베트남전으로 파괴된 청년 역할로 나왔던 크리스토퍼 워큰의 목소리로 베트남전에 참했던 베트남 사람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복수를 다룬 영화에서 가해자가 싸이코패스일 수는 있어도 복수의 총질을 하는 사람이 싸이코패스일 수는 없다. 복수라는 행위는 논리적인데, 싸이코패스는 비논리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복수의 총질을 하는 싸이코패스를 등장시킨다. 그것은  복수의 논리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베트남 사람에 대한 동일한 이야기를 여러 인물이 다르게 이야기하는데, 시나리오 작가는 그중에서 증오와 분노가 없는 이야기를 선택해서 영화를 만든다. 인생이라는 영화.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에서 분노는 나타날 수 밖에 없겠지만 증오와 분노는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 감독의 철학. 모두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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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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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은 순서대로 낱말을 모은 뒤 각각의 발음, 의미, 용법을 해설한 책을 일컫지만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가족어 사전>이라는 제목에서 ‘사전’을 가족이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 같다.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오며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2차대전이 끝난 후까지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규율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고,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아버지가 못하게 하니 속상해한다. 가족들끼리 소설책을 읽고 이야기하고, 시를 짓는 등 여느 가정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이어지는데 소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사회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전반부에서 아버지와 오빠가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후반부로 가면 2차대전이 심화되어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가족 중 누구는 파시즘에 희생이 된다. 전쟁으로 궁핍한 상황도 묘사가 된다.


가족의 말에 유머가 흐르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삶을 긍정하는 자세야말로 이 가족의 말, 가족어 사전이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슬퍼하던 어머니는 빨간색 옷을 사서 입는다. 빨간 옷을 입고 빈소를 지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웃기는데 어머니는 그 이유를 외할머니가 빨간 색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떠니? 우리 어머니는 검은색 옷을 정말 싫어하셨지. 어머니도 이렇게 예쁜 빨간색 옷을 입은 나를 보면 아주 좋아하실 거야.” p237


출판사에서 일했던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체사레 카베세와의 일화를 비롯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그중에서도 2차대전이 끝난 후 젊은 시인들이 출판사로 시를 보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출판사로 온 많은 시들은 가혹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다들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치가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자 “그렇게 세월이 흘러 이제 다들 각자 다시 자기 일을 어깨에 지고 가야 했고 그 일의 무게와 일상의 피로와 고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무게와 피로, 고독만이 똑같이 고독 속에서 절망하고 궁핍하게 사는 이웃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P239. 희망, 의지, 좌절, 인내, 망각은 가혹한 현실에 처한 사람들의 언어(현실의 고통을 드러내는 시를 씀, 시를 쓰지 않음, 시를 쓸 수 없음)에서 드러난다.


<가족어 사전>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인간이 혹독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했지만 삶을 긍정하고 있다는 것. 당대 사회와 일반인들의 삶과 지식인들의 삶을 현미경처럼 보여준다는 것.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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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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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은 ‘비극은 죽었는가.’ 라는 챕터로 책을 시작한다. 그 챕터에서 지젝, 라캉, 조지 스타이너의 견해를 반박한다. 비극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챕터는 비극의 정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준다. 수많은 희곡, 소설, 니체를 필두로 무수한 철학자의 저서를 인용하는 그가 영화팬이 아닌 게 다행이다. 글이 난삽해서 같은 문장을 두 번 읽기 일쑤였는데 영화까지 언급했다면 책 읽기는 더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논의는 좋다. 나도 테리 이글턴의 주장에 동의를 한다. 비극의 정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가 쓴 글을 보다 보면 비극은 운명(또는 갈등의) 폭풍우가 인간을 몰아칠 때 인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간이 폭풍우에 패배할지라도 인간이 일어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비극은 삶의 관점에서 해석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요즘은 햄릿이 여성인 극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 모두가 여성인 극으로 나타나고 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무수히 재해석되었는데 집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는 당대 사회의 인식이 깔려 있다. 장정일은 한국일보 칼럼에서 <인형의 집>에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던 남편 헬메르도 있다고 했는데, 제2의 IMF가 한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언론이 경고하는 상황에 <인형의 집>에서 자본 문제를 읽는 것은 유의미한 해석일 것이다. 이렇듯 비극은 시대를 투영하며 끊임없이 변주된다.


테리 이글턴은 왜 이런 글을 썼나. 서문에서 그는, 학생 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비극 예술 연구를 시작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만일 비극의 어떤 특질이, 애도와 죄책감이 없지는 않다 해도, 어쨌거나 죽음으로부터 삶을 끌어내는 것이라면 이것은 내가 학생 시절 이 주제에 처음 다가간 조건이었고, 또 축소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주제와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p10 이 말이 의미심장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를 깊게 적신 염세주의를 비극을 통해 극복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삶에 고통은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비극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비극은 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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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디 - 초특가판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 마리아-피아 카실리오 외 출연 / 스카이시네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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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움베르토가 살아가기에 연금은 충분하지 않다. 연금은 집세를 내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품위를 유지하기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노인은 일을 하지 않는데, 일할 능력이 없는 건지 의지가 없는 건지 수입이 생기면 연금이 끊기기 때문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영화가 말하는 건 움베르토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연금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움베르토는 자신이 아끼는 것을 하나 둘 팔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결국은 자살을 기도한다.


노인 주변 사람들이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녀는 집안일을 하고, 집주인은 음악회를 갖고, 거지는 구걸한다. 이들이 즐거움이든 경제활동이든 삶을 사는 것과 노인의 상황이 대비된다. 집주인은 품위있는 삶을 즐기지만 노인은 그럴 수 없고, 하녀는 일을 하고 애인과 사랑을 나누지만 노인은 그러지 아니하고, 거지는 당당하게 구걸을 하지만 노인은 구걸조차 하지 못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는 평범한 장면을 보여주며, 그 평범한 일조차 하지 못하는 노인의 상황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평범함으로 긴장감을 만드는 솜씨가 대단하다.  노인이 느끼는 고통을 깊게 만든 뒤 노인이 다시 살아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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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Buddy & Soul
이엠아이(EMI) / 196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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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디 리치를 들으면 데미언 샤젤의 영화 <위플래쉬>를 떠올리게 된다.영화에 버디 리치의 그림자가 짙은데, 일단 버디 리치는 앤드류와 플레처 교수에 투영되어 있다. 앤드류의 방에 버디 리치의 포스터가 붙어 있기도 하고, 앤드류의 연주 기법-소나기처럼 때려 붓는 속주는 버디 리치의 그것과 유사하다. 영화에서 앤드류가 연주하는 장면은 버디 리치의 연주 실황과 카메라 구도부터 연주 자세까지 비슷하다. 플레처 교수가 학생들한테 폭언을 하는 장면은 버디 리치가 밴드원들한테 마더xxxxxx 욕설을 한 것을 떠올리게 하고.


아름다운 재즈 음악과 폭력이 공존할 수 있을까. 군대식 훈련이 창의적인 재즈 음악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의 아이러니. 또는 신비와 모순. 또는 인간의 연약함과 가능성을 감독은 <위플래쉬>를 통해 질문하고 있다.


버디 리치의 1969년 앨범 <Buddy and Soul>을 들었다. 소울 리듬을 끌고 가는 드럼과, 소나기처럼 때려 붓는 드럼이 일품이다. 앨범 이름이 버디 앤 소울인 게 이해가 됐다. 버디는 곧 폭발적인 속주인데, 버디가 소울을 연주했으니 버디와 소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플래쉬>를 떠올리자 앨범 밑에도 아이러니와 모순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 버디 리치는 엄청나게 노력을 했겠지만 그에 비례하여 얼마나 많은 폭력을 주변에 가했을 것인가. 멋진 연주의 이면에 자리잡은 눈물과 아픔같은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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