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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평점 :
테리 이글턴은 ‘비극은 죽었는가.’ 라는 챕터로 책을 시작한다. 그 챕터에서 지젝, 라캉, 조지 스타이너의 견해를 반박한다. 비극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챕터는 비극의 정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준다. 수많은 희곡, 소설, 니체를 필두로 무수한 철학자의 저서를 인용하는 그가 영화팬이 아닌 게 다행이다. 글이 난삽해서 같은 문장을 두 번 읽기 일쑤였는데 영화까지 언급했다면 책 읽기는 더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논의는 좋다. 나도 테리 이글턴의 주장에 동의를 한다. 비극의 정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가 쓴 글을 보다 보면 비극은 운명(또는 갈등의) 폭풍우가 인간을 몰아칠 때 인간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인간이 폭풍우에 패배할지라도 인간이 일어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비극은 삶의 관점에서 해석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요즘은 햄릿이 여성인 극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 모두가 여성인 극으로 나타나고 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무수히 재해석되었는데 집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는 당대 사회의 인식이 깔려 있다. 장정일은 한국일보 칼럼에서 <인형의 집>에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형성되어 가던 남편 헬메르도 있다고 했는데, 제2의 IMF가 한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언론이 경고하는 상황에 <인형의 집>에서 자본 문제를 읽는 것은 유의미한 해석일 것이다. 이렇듯 비극은 시대를 투영하며 끊임없이 변주된다.
테리 이글턴은 왜 이런 글을 썼나. 서문에서 그는, 학생 때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하고, 비극 예술 연구를 시작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만일 비극의 어떤 특질이, 애도와 죄책감이 없지는 않다 해도, 어쨌거나 죽음으로부터 삶을 끌어내는 것이라면 이것은 내가 학생 시절 이 주제에 처음 다가간 조건이었고, 또 축소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주제와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p10 이 말이 의미심장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지만 그를 깊게 적신 염세주의를 비극을 통해 극복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삶에 고통은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비극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비극은 죽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