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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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비록 황사가 하늘을 누렇게 덮은 날일지라도 3월, 봄이다. 생각만 해도 향기 나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그 향기가 톡 쏘는 향기든, 달콤한 향기든, 사늘한 향기든 상관없었다. 냄새가 아닌 향기가 나는 이야기를 읽어 보고 싶었다. 그런 와중 때마침 천운영 작가의 <생강>이 출간되었다. 신간이 나오면 관심이 가는 작가 중에 한 명인 천운영 작가라기에,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향기가 날 것 같은 제목의 <생강>도 내가 이 책에 이끌리게 된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제목만 놓고 봤을 때는, 말 그대로 생강 같은 향기가 나는 소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고문 기술자의 내용이라니. 그리고 그 사람의 딸의 이야기라니. 솔직히 적잖이 당황하긴 했다. 그래도 천운영 작가답다, 라는 생각과 함께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다 읽고 났을 때, 말 그대로 천운영 작가의 작품이다, 하는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다.


고문 기술자 안과 그의 딸인 선의 이야기. 안은 우연찮은 계기로 쫒기는 신세가 되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결국 자신의 아내가 일하는 미용실 다락방, 자신의 딸의 궁전인 다락방으로 숨어든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딸에게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르게, 짐승의 모습이 되어간다. 잘못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하는 말을 어릴 적 딸에게 해주었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선은 멀리하고 피한다. 그러다 자신의 아버지가 고문했던, 남자가 틈만 나면 미용실 앞인 레코드점에 와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결국엔 그가 건넨 종이로 스케치북을 만들어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다락방에 밀어 넣는다. 속죄하라는 뜻일까. 글쎄, 나는 읽으면서 이 부분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들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뭐랄까. 소재부터 천운영 작가답다는 생각과 함께, 이야기의 서사 과정이 조금은 전과 달라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장들도 말이다. 데뷔작이자 첫 소설집인 <바늘>에서는 그런 점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세 번째 소설집인 <그녀의 눈물 사용법>에서부터 슬슬 기미를 보이던 조금은 관념적으로 흐르는 문장이, 이번 <생강>에 까지 이어진 것 같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문장을 나열한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은 문장들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봤다. 그것이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효과가 놓아지겠지만, 내 생각에는 심리를 표현하는 부분 외에도 그런 부분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주로 딸의 시점인 선의 이야기에서 그런데, 선이 서술하는 부분을 읽을 때면 숨이 턱턱 맞힐 정도였다. <바늘>에서처럼 빠르게 치고 나가는 그런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조금은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앞에서처럼 공간이 이동하는 것이 아닌, 다락방과 미용실 안팎에서만 빙빙 도는 인물들의 동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동선이 크면 오히려 늘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생강>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동선이 좁으면 오히려 더욱 늘어지는 구나, 하고 말이다. 내 생각에는 앞에는 인물들의 동선이 무척이나 다이내믹하고 큰 반면, 후반에서는 그렇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쉬웠던 점이 이렇듯, 좋았던 점도 있다. 우선 제일 먼저, 천운영 작가의 신작을 볼 수 있었다는 것과, 역시 천운영답다, 라는 생각, 가장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큰 무리 없이 자연스레 흘러간다는 점이었다. 덧붙여 도입에 등장하는 고문하는 부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상상을 하면서 읽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소름이 돋고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무척이나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장면을 상상하면 내가 고문을 받는 것 같았다.


읽으면서 이야기가 서사 중심이 아닌, 묘사 위주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천운영 작가의 첫 장편인 <잘가라, 서커스>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책도 이 <생각>과 비슷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싶다. 이 <생강>은 아쉬운 점과 좋았던 점이 비례하는 책이었다. 무조건 적으로 아쉽지도, 무조건 적으로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책을 기다리면서 색안경을 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제목만 보고 느꼈던 것처럼 향기가 나는 책은 비록 아니었지만, 색다른, ‘생강’이라는 것에 대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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