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4 : 세조·예종·성종 - 백성들의 지옥, 공신들의 낙원 조선왕조실록 4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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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조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조선은 낙후되고 정체된 나라', '조선은 타율적이고 나약하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의 영항 탓이다. 조선후기에 노론 중심의 부패한 정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사실이나, 5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조가 유지되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조선의 기록 유산  <조선왕조실록>과  '제도'라고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멸망 후 일본인이 편찬을 지휘한 <고종실록>, <순종실록>을 제외하면 조선인이 직접 편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뒤의 임금이 앞의 임금 때 있었던 일들을 날짜별로 기록한 편년체(역사 서술 체제의 하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역사서다. 


선왕이 세상을 떠나면 후왕이 실록청을 설치해 선왕 때의 역사를 편찬하는데, 선왕 때 사관의 기록과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등 정부 기관의 기록은 물론 경영에 참석했던 신하들의 <경연일기>등 선왕 때 기록된 모든 자료를 모아서 편찬한다. 


실록에 기록되는 왕은 대부분 현왕의 아버지여서, 신하들이 생존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실록 편찬에 살아 있는 권력의 간섭을 막는 것이 절대 과제였다. 이런 연유로 대신들은 물론 후왕도 실록을 볼 수 없었다. 선왕 때의 일이 필요한 경우, 해당 부분만 따로 등사해 국정에 참고하게 했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권력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연산군 때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화'의 단초가 되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그대로 실록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 감추고 싶은 기사까지 그대로 실려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당대의 진실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조선왕조실록>은 197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계유정란


단종에게 사약을 들고 갔던 금부도사가 왕방연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왕방연은 <세조실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숙종실록>에는 나오는데 <승정원일기>의 날짜 기록과 내용이 거의 같다고 한다(p100). 이때 숙종은 강원도에 단종을 죽인 공생의 이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면 찾아서 보고하라고 명했다. 숙종의 언급 이후, 금부도사가 왕방연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단종 1년(1453년) 10월 수양이 일으킨 쿠데타는 4년 후인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의 목숨까지 빼앗는다. 이 일은 조선 유학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후유증을 남기면서 백성들의 살과 뻐를 갉아먹는 공신들의 나라가 되는데 일조했다. 


이후 성군을 꿈꾸었던 참군 세조, 공신 집단에 칼을 겨눴던 젊은 왕 예종, 공신과 사림 사이의 줄타기를 하던 성종은 각기 다른 역사를 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으로 남았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조선 왕조 518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있었다. 한 임금이 평균 19년 정도 왕위에 있었다고 보면, 성공적인 정치가였다는 평을 받는 왕은 그리 많지 않다. 성공과 실패는 당대의 환경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군주상을 이해하고, 현실 정치에 얼마나 구현했느냐에 따라 후대의 평가가 갈린다. 


또한 조선은 어느 한 기관도 독주할 수 없는 상호 견제의 원칙을 제도로 확립했는데, 이는 국왕과 신하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지계제를 번갈아 시행했는데, 전자는 의원내각제, 후자는 대통령중심제와 비슷하다. 조선은 번갈아 사용하는 운용을 묘를 살리면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했다. 


의정부와 육조 판서 등 고위 관료들의 전횡은 대간이라 불린 사헌부·사간원의 중하위 관료들이 지닌 탄핵원으로 견제했다. 수사권 역시 사헌부를 비롯해 의금부, 형조, 포도청 등 여러 기관에 나눠줘 수사기관의 부패와 전횡을 방지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오늘날처럼 수사와 기소의 독점권을 가진 대한민국 검찰의 폐단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게다가 수사는 문과 출신이 담당했지만, 수사 기록에 대한 판결은 사율원의 중인들이 담당했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신뢰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재량권 남용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조들의 운용의 묘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대의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었다.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우리 사회나 한 조직의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청사진으로 삼을 수 있다. 둘째, 자신이 속한 사회나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셋째,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우리 개개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공직에 진출한 유학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국왕이나 상급자의 명령을 거부해 받는 처벌이 아니라, 선비들의 공론인 '사론'이었고, 국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왕세자가 받는 교육에서 가장 중시된 것도 <대학>의 다음 구절이었다. 


먼저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만들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조선의 국왕은 스스로 선비임을 내세웠고, 사론을 중시했다. 이것이 때로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 옹호나 사대주의 성리학에 대한 신봉으로 나타나는 폐단도 있었지만, 선비 정신이야말로 조선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아부해 출세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지키는데 급급하지 않고, 선비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선비 정신이다.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왜곡 


조선 초의 사대주의는 국체 보존을 위한 실용적 사대주의였다. 그러나 중화 사대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운 인조반정 이후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점점 약해졌고, 숙종 때 백두산정계비를 통해 압록강 북쪽 강역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도 간도(지금의 연변 지역)는 조선 강역이었다. 


조선의 최대 강역을 지금처럼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식민 사학자들의 악의적 왜곡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왜곡을 최대한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국은 과거를 지우고 역사를 새로 만들어가는 중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이고, 지키는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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