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그 시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엄마는 그때 깨달았다.
세상이란 건, 순하고 선한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너무 멀어 손이 닿지 않는 불가해의 영역이라고.
거기서 살아남고 뚫고 나가려면, 세상이 여태껏 포장하고 감추어놓은 걸 까발려야 하겠지.
착하게 살면 복이 온다는 거짓을 말이다.
p.36
거짓된 생. 지금 나의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나를 속이고 최재건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힘없는 약자가 세상을 상대하기에는 정의로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게 모두를 기만하고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p.96
그래, 걸어보자. 다 거는 거다. 어차피 인생 자체는 성가신 일이다. 운명보다 더 강한 것은 그것을 이기는 용기라지 않나.
살면서 단 한 번, 극한의 용기를 내야 할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태은은 숨을 가다듬었다. 눈빛을 단정히 하고 표정을 수습했다.
이제 나는 내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직진해 들어갈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뭘 어떡하면 되죠?"
p.165
"누구보다 공동체 가치를 우선하고 어떤 난관도 뚫고 옳은 길을 가던 정직하고 윤리적인 분이었죠. 그런데 이젠 양면의 탈을 뒤집어쓰셨네요.
과거의 가치는 허울 좋은 이미지에 불과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는 그럴듯한 방패를 장착한 채 거짓 미소를 짓는 게 뭐랄까, 역겹달까?"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