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문 너머에서 날 선 말들이 드문드문 이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방문앞을 서성이게 된다.
'지겨워, 당신 그럴 때마다, 나가, 차라리, 집에서 괜히 화풀이, 그래 잘났다······, 같은 말들을 구멍난 양말 깁듯이 하나로 이으면 엄마가 아빠를, 아빠가 엄마를 못마땅해하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바람으로도 환기시킬 수 없는 정체된 불화라는 것 또한.
p.10
"괜찮아요."
괜찮다고, 이 모든 우발적인 만남에 혹여라도 부담을 갖지 말라고 속으로 덧붙였다.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아빠의 얼굴이 물웅덩이에 비친 듯 어른거린다. 이젠 복원불가능한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까. 나와 엄마를, 우리를 조금쯤은 생각할까. 생각해줄까
p. 34
세상에는 갈라져야만 하는 사이도 있는 거다. 멀어져야 비로서 평온해지는 관계도 있는 거니까. 그렇다 해도 역시 궁금하다. 사람과 사람이 복원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관계가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변색되고 헤어진 관계를 처음처럼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런 일을 사람이 할 수 있을까.
p.37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으며 아무리 지독한 건달의 마음으로 쉽게 가려고 마음먹어 봐도 어느 순간 내가 붙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어져서 꾀부리지 않고 걷고 만다. 엄마는 어떻게 이 모든 길을 걸어왔을까. 내가 아직 가죽에 기대지 않았던 시절에는 엄마 혼자 고군분투했을 텐데 그 길을 어떤 심정으로 걸어온 걸까.
"모든 일이든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
p.82
어째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덧대어진 인연이라는 표면은 수선할 수 없을까. 왜 많은 변수가 끼어들고 기어코 훼방을 놓는 건가. 마음처럼 되는 일이라고는 세척과 염색 약품이 구비된 가죽제품을 다루는 일이나 가능한 걸까. 얼룩지거나 해진 관계를 닦고 꿰매는 일은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인데, 가죽아닌 가족만은 어째서 이토록 이전처럼 회복하는 게 어려운걸까.
p.85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건 없다. 이념이나 관념이 아닌 이상 물성과 살아 숨 쉬는 힘을 가진 모든 것들은 닳으면서 시간을 견뎌낸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가죽을 만질까. 복원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물건이나 사람을 얼마나 만나게 될까. 물건과 그 물건의 주인이 가진 사연에 동화되어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할 텐데.
p.94
육 년. 그에게 육 년은 긴 시간이었을까. 나는 비스듬히 시선을 떨구는 남자를 살피며 그의 의중을 짚어보았다. 버리고 싶었을까. 죽은 연인이 남긴 물건을 잊고 싶었을까. 내내 기억하는 일이 괴로우니 찾지 않는 것으로 애도를 마무리 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나로선 감히 어림짐작도 할 수 없는 무게일 것이다.
p.126
알고 있다. 아예 관계를 끊는 게 아니라 근거리에서 따라 살기만 할 뿐인 이별이 있다는 것을. 관계 청산 후에 남은 감정이란 게 오로지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그런 이별이 간으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p.200
복원소에 들어서는 거의 모든 손님은 제각기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지닌 채 유쾌하거나 슬프다. 눈물이 많거나 웃음이 많다. 그들을 대하는 날이 허투루 지나가지 않고 내 안에 고스란히 쌓이는 걸 느낀다. 칙칙하기만 하던 일상에 일정량 이상의 설탕이 뿌려진다. 매일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나는 다음 순서로 수선을 해야 하는 가죽제품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내 손으로 복원하는 물건의 주인이, 언젠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꼭 붙들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