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2~2016.03.25
책으로도 영화로도 참 유명한 은교. 남들 다 읽을 때 안읽고 이제서야 읽었다. 나에게 은교는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영화를 본건 아니지만 워낙 말이 많았기 때문에, 대강 들은 영화 이야기로 책 내용을 예상하고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 속 인물을 자연스럽게 대입했다.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크게 독서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책은 초반까지는 이해하기 쉬웠다. 은교를 사이에 두고 사제지간인 서지우와 이적요가 서로 질투하는 사랑 싸움처럼 보였다. 질투심 뿐만 아니라 열등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서지우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스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며 그에게 계속해서 멍청이 취급 당한다는 사실에, 이적요는 서지우의 젊고 건강한 육체 뿐 아니라 그의 젊음 자체에서 열등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점점 복잡해지고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야기는 단순한 애정의 문제가 아닌 더 깊은 내면의 문제까지 나를 끌고 갔다. 이적요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욕망을 옥죄어 살아왔다. 자신을 이성적으로 다스렸고 그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하지만 은교를 만나고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본능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전이되는 사랑도 은교를 통해 처음 경험한다. 그에게 은교란 젊음에의 이끌림이고 욕망이고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관을 닮은 노인에 불과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한다. 반면 젊은 서지우는 달랐다. 서지우가 은교에게 키스하고 가슴을 만지는 장면, 심지어는 정사장면까지 목격하면서 그는 점점 미쳐간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p.13
˝별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별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별일 뿐이네. 사랑하는 자에게 별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배고픈 자에게 별은 쌀로 보일 수도 있지 않겠나.˝
p.30
모르는 것은 아냐. 왜 이렇게 문장을 쓰면 쓸수록 네가 더 멀어지는가.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근원을,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 그 가파른 시간의 단층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별빛처럼 단번에 네 눈, 머리, 가슴에 나의 열일곱 시절을 박아넣어, 너의 온 정신을 적실 길이 있다면 좋으련만.
p.109
서지우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적요의 글을 발표함으로써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까지 빼앗겼다. 작가로서 인터뷰를 할 때도 온전히 자신만의 대답을 할 수 없다. 글을 계속 쓰고는 있지만 선생님의 글을 따라갈 수가 없다. 형편없기 그지없다. 얼마나 참담하고 무력한 기분일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그는 은교를 향한 스승의 욕망을 발견하고 나서 자기 자신을 그에게 빼앗긴 것처럼 은교마저 빼앗길까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일부러 스승의 평판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에게 모욕을 주기도 한다. 대놓고 은교는 겨우 여고생에 불과하다며 면박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에 괴로워 하기도 한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p.202~203
하지만 그들은 은교를 사랑해 다투고 질투하고 분노한 것이 아니라 서로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비극에 다다랐다. 책에서도 은교는 둘이 서로를 너무 사랑해 오히려 자신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표현한다. 이적요는 진심으로 서지우를 아들처럼 아꼈고 때론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서지우가 죽고 난 뒤 이적요는 스스로를 집이라는 무덤에 가두고 매일 술로 지새우며 죽음의 마차를 재촉하는 모습을 보인다. 분명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특히 서지우가 죽기 전 그의 코란도를 타러 갈때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가 서지우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가 서지우를 사랑했음을 확실히 알았다. 서지우 역시 그를 아버지처럼 극진히 모셨다. 그는 스승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은교에게 빼았겼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죽기 전 스승이 차를 일부러 고장냈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슬프게 울었다는 대목에서 사랑하는 스승에게 버려진 그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p.399
많은 사람들이 은교를 `야한 소설` 혹은 `야한 영화`로만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걸 보고 한 아이는 대놓고 야한 것 읽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은교는 야한 소설이 아니다. 그렇게만 치부해 버리기엔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도 많다. 난 이 책을 읽고 젊음, 늙는다는 것, 욕망, 사랑, 죽음에 대해 아주 깊게 생각해봤다. 늙은이의 욕망을 천박하다고 여긴 나 자신이 오히려 천박한 사람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고 진정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봤다. 죽음이라는 것이 끝없이 두렵고 무서워지기도 했고 생의 끝에 맞이해야만 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정답은 없으니 지금도 그저 끊임없이 생각할 뿐이다. 나는 분명 이 책의 메시지를 백퍼센트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고 적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다. 하지만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은교, 욕망, 당나귀, 노인, 죽음, 사랑과 같은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절대 정리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은교를 떠올렸을 때도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