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11~2016.03.21

본격적으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니까 책 한 권을 읽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것저것 할 일도 많고 학교 왔다갔다 하는 데만 해도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려서 쉬느라 바쁘다. 이번 책 <상실의 시대>는 길이도 길고 읽는 도중에 과제까지 겹쳐서 더 오래 걸리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책`이라 칭하는 이 책. 나는 이제야 읽었다. 하지만 충분히 재밌었음에도 인생책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이야기랄까? 책에서 나오코인가 레이코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 비정상이며 소수만이 그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나에겐 이 책 속의 인물들이 그렇게 느껴졌다. 책 속 인물들 모두 비정상같았다. 기즈키도 나오코도 레이코도, 화자인 와타나베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기준에서 정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인물은 절대 없다. 그렇지만 모두 비정상적이라 인상적이다. 이상한 인물들은 나를 계속 생각하게 했다. 그들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p.49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야.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p.93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정한 건 정말 이 출판사의 신의 한수라고 생각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인데, 원제보단 상실의 시대란 제목이 더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내용이 궁금하게 한다. 실제로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의 표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민음사의 <노르웨이의 숲>을 구매하려다가 제목 때문에 이 책을 구매했다. 그만큼 제목이 마음에 든다. 실제로 책 속 와타나베는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상실해간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주위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서서히 상실해간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모두들 죽기 전까지 하나씩 상실해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들어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뭔가를 새롭게 배우고 털고 일어난다. 그것에서 얻은 교훈 덕에 다음에 찾아올 상실의 순간에는 괴롭지 않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똑같이 괴롭고 또 새로운 걸 배운다. 이것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 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제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p.129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중략)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p.355

˝우리는(정상인과 비정상적인 사람을 다 포함한 총칭이야) 불완전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야. 자로 길이를 재고, 각도기로 각도를 재서 은행 예금처럼 빡빡하게 살아갈 순 없어. 안 그래?˝
p.407


이 책은 참 섹스가 많이 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공식적으로 출판된` 책보다 자세히, 자주 나온다. 하루키는 섹스에 대해 굉장히 개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와타나베는 밤늦게 번화가로 나가 마음에 맞는 여자와 수차례 원나잇을 한다. 나오코를 사랑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나오코와의 관계를 잊지 않기 위해 원나잇도, 미도리와의 잠자리도 하지 않지만. 거기까지는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와타나베와 레이코가 소박하게 나오코를 위한 즐거운 장례식을 하고 난 뒤에 한 섹스는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정말 경악했다. 그때 그 둘이 한 섹스는 위로의 의미였을까? 지친 서로를 안아주고 품어주는 위로의 행위?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난 정말 모르겠다. 섹스가 단순이 쾌락적 행위가 아닌 서로 교감하는 행위임은 분명히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섹스는 그것보다 더 넓은 의미의 행위인 듯 하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의미임은 분명하다.

솔직히 아직까지 `상실`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사람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간이든 내가 상실한 것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크게 충격을 받거나 괴로운 적은 없다. 그저 당연스레 지나가는 것이라 여겼다. 언젠간 나도 상실의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는 순간이 오겠지. 끝이 없을 것처럼 괴로워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빠져나오는 경험도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문득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그땐 와타나베를, 그리고 그 외 인물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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