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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ㅣ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8월
평점 :
난중일기.. 남의 일기를 옅보는 것보다 재미있는것이 뭐가 있을까..
이렇듯 일기는 자기만의 생각을 적어놓는 기록으로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이 뚜렷하다.
따라서 분명 사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나만의 이야기를
적는 상황도 생긴다.
하지만 역으로 이 일기를 토대로 과거의 일을 객관적으로
추리해 나가보면 어떠한가.
나는 객관을 찾기 위해 500여 년 전 과거로 올라가,
한나라의 장수였던 이순신의 일기를 들춰본다.
대중문화가 활성화된 이래로, 이순신장군과 같은 중요한
위인은 소설 및 영화로 각색되어 만들어졌다.
그 콘텐츠들속에서 얼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
미디어의 특성상 독자 및 시청자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조미료들은 첨가되고 있다.
왜 일기에서 객관을 찾으려 하는지에 대한 나의
이유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1인칭관점에서 현장에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볼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본 책은 출판사에서의 많은 노력이 돋보인다. 난중일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세로 쓰기 구조 및
페이지의 방향은 우철로 제본되어 있다. 거기에 가격까지
1592 로 맞추지 않았던가.
더욱 글씨체도 붓글씨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난중일기에
최대한 다가가려 노력한것이 엿보였다.
그리고 어려운 어휘의 경우 정의까지 내려주는 배려까지
보였다.
그렇다면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의 전란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를
살펴보자.
일기에서 보면 그는 평상시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잘 챙겨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아파 하는 효자였다. 또한 백성들의 농사 걱정을 할 정도로 인자하였으며, 아내의
건강을
걱정하는 평범한 남편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의 인간적 됨됨이가 깊게 깔려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또한 매일의 날씨와 전쟁의 흐름,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쏘는 일상,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전까지의
기록들을 보면 이순신 장군 스스로가 끌어안아야 했던 고뇌와 아픔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더욱이 간결하지만 문장 하나하나마다 절절한 심정이 담겨있는 문체는 이순신 장군의 충혼을 느끼게
해준다.
임진때 선조 25년 이순신의 나이 48세이다. 4월 13일 전쟁이 일어났으며, 충무공은 전라
좌수사가 되어
일 년 동안을 두고 온갖 방비에 주력했다. 전시에 기강을 잡기 위해서는 지엄한 군율이
필요했기에
전쟁 준비를 게을리하는 군관들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가해 병사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였다.
전쟁
하루 전인 4월 12일에 이르러서야 거북선을 전투대세로 완료하였으니 얼마나 숨이 가빴을까.
더욱
옥포, 당포, 한산, 부산 해전의 대승첩이 모두 같은 해에 벌어졌다. 그럼에도 망천안에 몰려든
피라미 떼를
잡아 전선 위에 앉아 술을 마시며 봄 경치를 즐기고, 영주의 산꽃과 들가의 봄풀을 그림 같다
이르기도
했으니, 이를 보면 풍류를 즐길 줄도 아는 무사였다.
계사때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몸을 빼어 돌어갔다. 나라를 걱정하던
충무공은
7월에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외로이 바다의 성벽이 될 수 밖에 없었다. 1593년 8월,
조정에서 삼도수군통제사
라는 새 직함을 맡겼다. 모친에 대한 걱정과 그림움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며칠동안 몸이 불편하고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종일 누워있는 허약한 모습의 장군도 목격된다.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만들어낸 조선의 조총이 왜총보다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갑오때는 명나라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며 싸움을 피하려고만 했다. 그래서 갑오년
3월에
명나라 지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다. 우리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하던 공의 가슴은 울분으로 짖어지는 것만 같았다.
을미때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충무공에게는 잠시도 휴전이 없었다. 한산도는 언제나 바쁘고
붐볐다.
소금 굽고, 고기 잡고, 농사짓고, 군복 만들고, 배만들고, 칼 만들고.. 어느날도 쉬는 날이
없었다.
그리고 공의 마음속에는 나라의 근심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병신때 공은 휴전 중의 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으로써 고작 큰
행복을
삼았다. 이 해는 공의 모친이 81세 되던 해였다. 10월에 진중에서나마 수연 잔치를 차려
드린것이 모자가
서로 만나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정유때 공은 나라를 위해 뼈와 살을 다 바쳤건만 공에게 돌아간 것은 감옥살이 뿐이었다. 그러나
공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마지막 생을 나라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말없이
백의종군
하였고 또다시 공은 삼도수군동체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의 신뢰는 얻었으나 조정의
신뢰는
잃은 셈이었다.
무술때 임진란 이후 칠년의 전쟁은 무수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이제 충무공 자신이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량 앞바다로 출동한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왜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왜란이 낳았던 가장 큰 별을 제물로 하며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
수많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순신의 이미지에 강한 장군만 자리잡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가장 깊은 내면에는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는 깊은 정 또한 자리잡고 있다. 누구의
말도 거치지 않고,
그냥 이순신, 그 인물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객관에 가까운 그의 주관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