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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 - 어떻게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 것인가
대니얼 챈들러 지음, 홍기빈 옮김 / 교양인 / 2026년 3월
평점 :
#협찬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찬 긍정..
정의로운 국제사회는
정말 가능할까요?
저는 어느 전제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로운 국제사회를 원하는
구성원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진다면...
그 열망이 시스템을 바꿀 거라 믿습니다.
특히 지금은...
정의의 도약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체로 아실 거라 생각됩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둘러싼 비극 속에서..
인류가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있는
아픈 감각이 전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김누리 교수의 저서,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봤던 내용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국제사회에..
미국의 민낯을 비췄다는 내용을 읽으며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TV 보급이 민중의 눈을 뜨게 했듯,
지금의 초연결 사회도 우리를 깨우고 있죠.)
저는 몽상가여서..
(비록 요즘은 희망 회로가
고장이 난 느낌도 크지만...)
여전히 우리의 참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솔직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당위가 실재를 만드는 법이니까요.)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따른다는 법칙을 좋아합니다.
<원칙>, <빅 사이클>의 저자 레이 달리오는..
지금이 거대한 변곡점의 한가운데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가 말한 '빅 사이클'의 정점은..
확 꺾일 수 있는 불안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질서를 세울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정의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합니다.
아주 큰 틀에서 본다면...
우리가 '무지의 베일'을 쓴 것처럼
상대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감각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네에 쓰레기를 함부로
투기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동네가 조금 더 쾌적해지듯이,
정의에 대한 인식도 얼마든지..
개인의 실천에서 시작해
사회 구조로 확장이 가능합니다.
인식해야 할 집단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커진 만큼..
어려움이 따르는 건 당연합니다.
그래도 아주 긴 흐름에서 보면..
인류는 비관과 냉소를 딛고
꾸준히 진보해온 게 사실이니까요.
인간으로 태어나 사는 동안에는~
각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기본 구조에 대해
공동의 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처럼..
'호모 사피엔스의 사회적 책임(HSR)'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요즘입니다.
그래서 대니얼 챈들러의 이 책이
더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비관과 분노, 소외가 가득한 시대에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찬 긍정"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책은 두껍지만..
추상적인 이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풀어낼 구체적인 사유의 틀을
매우 친절하게 제시해 줍니다.
마감 기한이 있어
조금 급하게 읽긴 했지만..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지는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만족도가 컸던 만큼..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고 싶은
많은 분께 꼭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롤스의 정의론은 유튜브에도
좋은 영상들이 참 많습니다.
(어제 스토리로 추천해 드린 영상은
꼭 한 번 보시길 권해드려요.
캡처 사진을 한 번 더 남겨놓겠습니다.)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우주서평단
#자유와평등
#대니얼챈들러 지음
#홍기빈 옮김
#교양인
교양인의 사회적 책임...?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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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법공부
#바닿늘인류학
#바닿늘정치
#바닿늘철학
이 책은 @woojoos_story 진행,
교양인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아래에서부터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왜 지금 다시 롤스인가?(머리말)
내가 종종 인용하는 문장이 있다. 1973년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sel)이 《정의론》 서평으로 쓴 것인데, 롤스의 사상이 지닌 독창성과 힘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관점은 이 시대의 특징과는 어긋난다. 왜냐하면 이 책은 비관적이지도 않고, 소외를 호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고, 또 유토피아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오늘날 사람들이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 어떤 정서를 전한다. 바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찬 긍정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러한 관점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바로 그러한 정신을 불어넣길 희망한다. 그래서 더 나은 사회가 가능하다는 새로운 확신과 함께 이를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에너지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p. 39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그러한 구조가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 공동의 도덕적 책임을 진다. 롤스에게 정의의 본질이란 바로 이것이며, 롤스는 이러한 제도들을 설계할 때 지침이 될 수 있는 명확하고 일관된 원칙들을 도출하는데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그의 출발점은 사회가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이론을 '공정으로서의 정의 (justice as fairness)'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일생에 걸친 작업은 사실상 이 기본적인 생각을 풀어내는 시도였다. 즉 모든 사람이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내는 것이었다. 머리말에서 보았듯이 롤스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이 '원초적 입장'이라고 부른 강력하고도 직관적인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공정한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자 한다면, 마치 '무지의 메일'을 쓴 것처럼 우리 자신의 여건을 전혀 모른 채,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기로 선택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에서 우리는 정의에 관한 두 가지 대원칙(자유의 원칙과 평등의 원칙)을 선택할 것이고, 더 나아가 세대 간 정의와 지속 가능성이라는 원칙도 추가로 선택할 것이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살펴보겠지만, 이 원칙들은 표현의 자유, 정치에서 돈의 역할, 빈곤과 불평등, 기후 · 생태 위기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도전적인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데 도움 될 수 있는, 놀랄 만큼 명확하고 강력한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 이 책 2부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을 기초로 삼아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적인 의제들을 제안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 세계의 도전들에 맞서기 이전에 먼저 그 원칙들 자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롤스의 원칙들은 영어 원문 기준 백 단어 남짓에 불과하지만, 롤스 이론의 정수라 할 수 있으며 엄청나게 풍부한 생각들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
제1원칙: 각 사람은 평등한 기본적 권리와 자유에 입각한 충분히 적정한 체계(scheme)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 체계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동일한 체계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체계에서는 평등한 정치적 자유, 오로지 그러한 자유만이 공정한 가치를 보장받아야 한다.
제2원칙: 사회적 · 경제적 불평등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지위와 직책과 결부되어야 한다. 둘째, 정의로운 저축의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어야 한다.
얼핏 보면 이 원칙들은 이해하기 상당히 어럽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왜 그렇게 특별한 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 장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 원칙들이 무엇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또 우리가 친구와 가족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지와 같은 포괄적인 도덕적 질문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회 제도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정치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사회 정의', 다시 말해 개인행동의 정의와 대비되는 제도의 정의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롤스는 자유주의 전통의 다른 많은 사상가들과 구별된다. 한 저명한 철학자는 롤스 이론의 이 측면을 두고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성숙'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p. 44~46
시민 교육이 필요하다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신뢰
헌법 구조를 아무리 잘 설계한다 하더라도, 결국 자유민주주의의 존속과 번성은 시민들이 일정한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를 공유하고, 또 최근 들어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는 것처럼 그 가치들을 실현하는 제도들이 공격받을 때 기꺼이 수호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은 시민들 스스로가 일상적인 행위와 상호 작용 방식 속에서 이러한 가치들을 구현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즉 시민들은 합당하고 관용적이며, 공정과 타협의 정신으로 정치에 임하고,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기꺼이 공적 이성에 호소할 수 있어아만 한다.
지난 10년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적 정치 운동의 발호는, 이 모든 것을 이제 더는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절실하게 일깨워주었다. 비록 유럽과 북미의 대다수 사람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지만, 약 40퍼센트는 '기술관료제' 역시 좋은 정부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6명 중 1명 꼴로 군사 통치어 대해서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의 거의 모든 사 람이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유럽인 가운데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57퍼센트에 불과하고,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같은 응답을 한 비율은 약 75퍼센트에 그쳤다. 더 우러스러운 점은, 20세기 권위주의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서 자유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지지가 더 약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1930~1940년대에 태어난 미국인들 가운데 약 3분의 2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에서는 그 비율이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건강한 민주주의의 생명줄과도 같은 태도나 '정치적 미덕'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 롤스에게 이것은 '안정성(stabilit)' 이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 곧 사회가 장기적으로 스스로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지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다.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시민들이 그 사회에서 살아가며 실제로 어떤 이득을 얻는가이다. 즉 자신의 목표를 추구할 자유, 동등한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자원의 공정한 몫을 얻을 가능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의가 식어 가는 문제에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대응은 기존 제도들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유층이 정치 과정을 장악할 수 있는 방식이나 현대 자본주의가 낳은 빈곤, 불평등, 불안정을 직시하고 사람들의 충성심을 얻어낼 가치가 있는 제도들로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논의하면서 이미 언급했듯이, 국가는 '표현적' 권력을 활용하여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가치와 태도에 대한 지지를 강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기념하는 기념비 건립과 국경일 지정, 영국의 기사 작위, 프랑스의 명예 훈장, 미국의 대통령 메달 같은 공적 훈장 제도가 있다. 하지만 아마도 국가가 이러한 가치와 미덕을 장려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교육 제도일 것이다.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가들은 오래전부터 교육 제도가 시민을 길러내는 데 지극히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해 왔다. 이러한 생각은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대중화되었으며 조지 워싱턴과 제임스 매디슨 같은 인물들이 미국에서 공교육 제도의 발전을 지지한 이유이기도 했다. 롤스 역시 시민들을 "완전히 서로 협력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합당한 태도와 상호 존중 같은 "정치적 미덕을 장려하는" 교육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시민 교육의 중요성은 원칙적으로 오래전부터 인정되어 왔지만, 현실에서는 갈수록 무시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육 제도의 초점은 압도적으로 경제 생활을 대비시키는 데 쏠려 있다. 물론 이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며, 모든 아이가 진정으로 동등한 기회를 누리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 교육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버렸다.
미국의 경우, 공교육의 전반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초당적인 '미국 공통 핵심 기준(Common Core State Standards Initiative)'은 교육이 모든 학생을 "세계적 경제 현장"에 대비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학생들이 시민적 삶에 참여하도록 역량을 준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1년 과정의 시민 교육을 의무화한 주는 9곳에 불과하고, 시민 교육에 대한 독립적인 평가 제도를 갖춘 주는 8곳 뿐이다. 연방 정부가 시민 교육을 위해 학생 1인당 지출하는 돈은 과학 · 기술 · 공학 · 수학(STEM) 과목에 지출하는 돈의 0.1퍼센트도 안 된다.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 시민 교육을 강화하려는 시도기 있었지만, 2017년의 초당적 보고서는 "현재의 시민 교육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유럽연합집행위원회 (Europen Commission)의 한 보고서는 EU 국가들의 거의 절반이 교사 양성 과정에 시민 교육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3분의 1 이상의 국가가 시민 교육과 관련하여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그 지침조치 갖추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교육 제도가 시민을 길러내는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하다. 최소한 모든 젊은이에게 자신의 권리와 자유가 무엇인지, 정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회 내 종교적 · 도덕적 · 정치적 신념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일깨워주어야 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시민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특정한 기술과 역량을 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 시민들은 사회의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사회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개발할 수 있는 분석 능력이 필요하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소통 능력도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직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사회적 · 관계적 능력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키우고 그 가치를 반영하는 태도와 성품을 함양해야 한다.
시민 교육만 전담하는 수업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수업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알려주는 데서 그치지 말고, 다양한 정치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함양할 수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논란이 되는 사회적 · 정치적 이슈에 대해 존중에 기반한 토론을 장려하거나 '모의 선거'를 실시하는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나와 사회적 배제나 인종적 불평등 같은 문제를 직접 배울 수 있도록 '봉사 학습'에도 참여해야 한다. 나아가 일종의 의무적인 '시민 국가 봉사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가 청소년의 직업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교육 참여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시민으로서 역량을 키우고 계급, 인종, 종교의 경계를 가로질러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도 그러한 참여를 요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교육 제도를 훨씬 더 포괄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비판적 사고력을 개발하는 것은 모든 과목의 교수법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민적 삶을 준비시키는 데 특별히 중요한 과목들이 있다. 철학자 대니엘 앨런(Danielle Allen)이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경제학 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이 학문들은 우리의 정치적 역량을 개발하는 데 필수적이며, 실제로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들이 시민 의식이 더 강하고 정치적으로도 더 적극적인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교육 정책의 초점이 STEM 과목에 맞춰져 있고 인문학은 뒷전으로 밀릴 때가 많다.
우리는 또한 학교 제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청소년들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핵심은, 서로 다른 정치적 신념과 삶의 방식에 대한 존중과 관용을 기르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어는 정도까지는 '가르칠' 수 있지만, 최근의 많은 연구들에 따르면, 최소한 제대로 된 조건 아래에서는 사회와 직접 접촉하는 것이 그러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하다. 예를 들어 영국의 학교들을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종적 · 민족적으로 다양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다른 인종 · 민족의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친구가 될 확률이 휠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의 입학 정책은 다양한 배경을 지닌 아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배타적 민족주의, 포용적 애국주의
국민 정체성
자유민주주의가 번성하려면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정치적 가치를 배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정서적 소속감 역시 필요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진정으로 포용적인 공동의 국민 정체성(national identity )을 키워낼 수 있을까?
비자유주의적 민족주의가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다시 부상하면서, 이러한 종류의 질문들이 새로이 긴급하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에서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은 협소한 혈통적 혹은 종교적 국민 정체성을 고취하는 데 갈수록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흔한 반응은 모든 형태의 국민 정체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민족주의라는 것은 배제와 박해의 힘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국주의의 사례처럼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복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미국의 노예제와 인종 분리 그리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처럼 국가 내부의 소수 집단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쓰이기도 했다. 역사를 아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민족주의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의 국민 정체성 개념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첫째, 기본적인 정치적 현실주의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사람들에게 국민 정체성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며, 집단을 형성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고려할 때 국민 정체성이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국민 정체성의 어떤 표현이든 본능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이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소외시키고, 결국 배타적 민족주의가 들어설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둘째, 좀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공동의 국민 정체성은 사회적 연대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이 개인적 이익을 넘어 자신이 더 큰 공동체의 일부임을 인식하도록 이끌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동료 시민들과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때, 더 평등주의적인 사회 · 경제 제도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금처럴 갈수록 다양성이 커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히 중요한데, 국민 정체성은 우리가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종교적 · 혈통적 집단의 이익도 넘어설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민 정체성을 완전히 거부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포용적인 '자유주의적' 애국주의를 키워냄으로써 사회적 정의를 위해 활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애국주의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한 국가를 이루는 여러 요소 중에 모든 사람이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요소에 기반해야 하며, 이에 따라 혈통이나 종교 같은 것들은 즉각 배제된다. 그 대신 그 핵심에는 자유, 관용, 평등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가치와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사회를 함께 건설하자는, 진정으로 공유된 프로젝트에 대한 신념이 자리 잡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모두 동일시할 수 있는 역사와 함께 만들어 갈 미래가 담길 것이며, 우리는 그 성취를 함께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포용적인 정체성
이러한 포용적인 국민 정체성 비전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천진무구한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정치 담론은 민족적 · 종교적 분열이라는 정서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상은 국민 정체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거의 정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2016년과 2020년 사이(유럽에서 전례 없는 난민 위기가 발생한 이후 인종을 둘러싼 분열적 논쟁이 이어졌던 시기)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보면, 국민 정체성은 오히려 덜 배타적이고 더 포용적으로 변해 왔다. 이 나라들에서 국민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특정 출생지나 종교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유의미하게 감소했으며, 이제 이러한 견해는 소수 의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성격이 뚜렷한 가치와 제도를 중심으로 삼아 유의미한 공동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이런 것들이 과거에 종교나 혈통이 했던 역할을 정말로 수행할 수 있을까? 최소한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가치를 지지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다. 롤스가 말했듯이. "다른 시민들을 평등하게 대우하겠다는 우리의 다짐, 그리고 그에 따라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겠다는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종교를 신봉하고 그 의례를 행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정체성의 기본 요소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정치적 가치는 유의미한 공동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유용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에서는 (대체로 헌법에 구현된) 자유주의적 ·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가치들이 애국적 정체성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물론 미국의 헌법은 본래 형태로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는데, 흑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허용하고 여성을 이등 시민의 지위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포용적이고 정치적인 미국의 정체성은 항상 배제적이고 백인 중심적인 경향과 공존했고, 후자는 오늘날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에게 헌법에 있는 정치적 이상과 불완전하게나마 그 이상을 실현하는 핵심 제도들은(의회, 대법원 등등)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 다. 프랑스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공화주의적인 정치적 가치의 중요성이나, 많은 영국인들이 느끼는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를 통한 보편적 공공 의료 제공에 대한 자부심이 그 예이다.
설령 정치적 가치가 혈통적 · 종교적 유대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해도, 이것이 포용적 애국주의를 거부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내고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며, 혈통이나 종교에 기반한 민족주의는 소수자를 소외시키고 급진화시키는 경향이 있 다. 결국 자유주의 사회의 안정성은 시민들이 경험하는 실질적인 이득에 달려 있으며, 이는 우리가 마땅히 높이 평가할 만한 지점이다.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고 사회적 불화의 씨앗을 심는 데 의존할 때가 너무나 많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우리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 p. 20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