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 인 더 홀 - 역경을 넘어 폭발적인 성공을 이루기까지
밥 파슨스.로라 모턴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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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성장 과정과 노하우들이
골고루 담겨져 있을 지 너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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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쓸 만해졌습니다 - 나의 활용도를 높이는 브랜드 마케터의 기록 에세이
위한솔 지음 / 필름(Feelm)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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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그쪽의 세상은 어떤가요?

솔직히 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한데....

저는 한 번씩 무섭습니다.

혐오 표현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빈도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시그널 같습니다.

양비론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양비론은 더 경계하려고 합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다고 느끼면..
저도 그 '이놈 혹은 저놈'에 속하겠죠...)

기본적으로 악을 전파하는 것은..
선을 전파하는 것보다 최소 몇 배는 더
쉬울 수밖에 없다고 평소에 생각합니다.

좋은 정보는 흘려 들어도
(나중에 후회가 남을지언정...)
사는 것에 별로 지장이 없지만..

나쁜 정보를 흘려 들었을 때는
생존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으니까요.

아주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우리는 나쁜 정보를 흘려 듣지 않은
조상님들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래 전 과거..
그러니까 인간이 생태계 먹이사슬의
중간 위치 쯤에 있었을 때를 상상해봅시다.
(원시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풀 숲 옆을 지나는 중에..
"그르릉" 소리가 들립니다.
(특정 짐승의 소리로 추정..)

두 명이 지나가던 중이었습니다.

한 명은 즉각 뛰어서 도망치고,
다른 한 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쪽을 맑은 눈으로(?) 쳐다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말 포악한 짐승이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도망친 사람이 살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 둘 중 도망친 사람의
후손이라고 보는 편이 확률적으로
더 높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직관적으로 와닿는 설명이라고
저는 받아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존하고
후대를 남긴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둘 수밖에 없다고
저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부정편향'이라고 부르지요.

이 이야기는..
이렇게도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서사에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노출시키면, 그것에 노출된 사람들은
그것에 의해 길들여질 수도 있다."

저는 그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편견의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편견의 피해자로 살아왔고,
지금도 어느 부분에서는 편견을
여전히 지니고 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는
진짜로 확신을 지녔거나..

아니면 의도를 지니고 선동을 하는
이들도 섞여있을거라고 예상됩니다.

그래서 저는 대화의 장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화의 장(혹은 링)은..
서로 싸워서 누군가 한쪽이
이기는 룰의 게임이 아니라..

합의를 도출하는 룰의 게임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토론이 아닌 숙론..)

어쩌면..
극단적 대립을 겪는 사람들도
대화를 시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감춤 없이 방송으로 보여준다면...
(나아가 방송에서 비춰진 당사자들도..
변화의 계기를 삼을 수 있을테고..)

희망이 보일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다만 전제는.. 사실과 주장에 대한 구분
지적을 분명히 사회자가 할 수 있어야겠죠.)

..

마무리가 어색하지만..
시간을 다 써서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쓰다보니쓸만해졌습니다
#위한솔 지음

#책추천 #에세이 #기록
#필름출판사

#편견에대한생각
#바닿늘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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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글쓰기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서, 주관적인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요약, 수정 하였음을
참조 바랍니다.



관점과 편견의 차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은 너무 즐거워"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자 여러 친구에게서 서로 다른 목소
리들이 튀어나왔다. 누군가는 차가운 웃음과
함께 "회사 너무 믿지 마. 등에 칼 꽂히기 싫으
면"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회사는 꿈을 준비하는 공간이야. 그래
서 많이 배우고 있어"라고 말했다. 같은 공간과
대상을 두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말은, 모두 틀리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경험
으로 만든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

각자의 관점으로 조화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이런 관점이 흑화되어 버
릴 때 생긴다. 이것을 '편견'이라고 한다. 관점
과 편견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누군가는 생각
을 관점으로 만들어 해석하고 누군가는 편견에
갇혀 버리는 걸까? '편견'의 사전적 뜻은 '공정
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전체
적인 맥락에서 둘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관점과 편견의 가장
큰 차이는 '치우침의 유무' 즉, 다른 것에 대해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이다. 관점이 편견이
될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
도 그래야 해' 혹은 '이 세상은 모두 이래야 해'
라고 한정 지을 때 생긴다.

요즘 자신의 경험을 강연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꽤 많다. 그들을 향한 시선이 두 갈래 길처럼 나
뉜다. 한쪽에서는 "진짜 실력자는 강연할 시간
도 없어"라는 냉소와 "진짜 중요한 정보를 누가
공개하겠어?"라는 의심으로 가득하고, '강의
팔이'라는 단어로 그들을 욕하기 바쁘다.
이들의 말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그런
경험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순수하게 좋은 정보를 나누는 이들도 만
났고,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도 보았다.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주말에 시간을 쪼개 강연을 준비하는 사람도
만났다.

이처럼 이 세상은 어떤 문제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편견은 왜
하나만을 정답처럼 고집하게 하는 걸까? 세상
은 이렇게 여러 가지 시선으로 뻗어나가는데
누군가는 왜 나와 다른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
려 하는 걸까. 그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어서
일까? 아니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두려워
서일까? 편견이 아닌 관점이 되기 위해 중요한
건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챙기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내가 보지
못한 곳에도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
정하는 것. 그것이 관점과 편견을 가르는 결정
적인 차이일 것이다.(…)

내 경험이 만든 가치관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
부가 아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관점이라고 주장하지만,
편견의 시선으로 가득찬 영역들이 생기곤 한
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넓은 마음을 갖고
묻고 싶다. "제 세상은 이런데, 혹시 그쪽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때요?" p. 206~211


독서의 이유
유튜브를 보든, 팟캐스트를 듣든, 강의를 찾아
듣든, 중요한 건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와 호
기심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책이 최고의 수단이
아닐 수도 있다. 전문가 중 일부는 이미 "책 출
판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므로, 최신 정보
는 유튜브 등 온라인 매체가 훨씬 빠르게 전해
준다"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책 《시대예
보: 호명사회》의 저자이신 송길영 작가님도 한
인터뷰에서 이제 지식을 얻는 방법은 다양해졌
다고 말한 바 있다. 유튜브 재생목록 만으로도

책 한 권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라
고 말이다. 실제로 2022년 서울기술연구원에
서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
면, 10대의 약 20%가 '유튜브를 통한 정보
습득도 독서'라고 여긴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흐름을 보면, 우리가 정보를 '글'로
만 소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고 있는지도 모
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 읽기가 의미 없다
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단지 나처럼 "왜 책을 읽
는가?"라는 질문을 명확히 한 채로 접근해야,
비로소 목표 달성에 있어 독서가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

목적지가 불분명하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길을
잃기 쉽고, 그렇게 방향 감각을 잃은 채 움직이
며, 왜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순간이 와서 그만
두게 된다. 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
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독서를 계속
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 답이 항상 책 속에만
있지 않다는 믿음도 유지할 것이다. 때로는 드
라마가 나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고, 다큐멘터
리나 웹툰에서 답을 얻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
와의 긴 대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중요
한 것은 그때그때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그리고 그 질문에 대응하는 '최적의 수단'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p. 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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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쓸 만해졌습니다 - 나의 활용도를 높이는 브랜드 마케터의 기록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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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은 어떻게 생겨날까? 관점이 흑화되어 버릴 때 생겨나는 게 아닐까??(부제: 그쪽의 세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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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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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찬 위험한 철학에 대한 생각..

평소에..
철학을 좋아합니다.

아직 알아가는 단계여서
깊이는 많이 부족합니다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 중 아주 좋은 것(??) 하나가..

'위험한 철학을 알아보는 능력'이
강화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사이비 종교를 알아보는 능력'과
비슷하다고도 생각됩니다.

...

제가 잠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철학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능력의 수준'

그렇다보니..
철학적 사유가 유독 더
깊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말에는..

지혜를 사랑해온 시간들이
고스란히 함께 느껴집니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더 알고 싶어지니..
결국 철학의 사유가 깊어질수록
더 다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랑이 아름답지 않듯,
모든 철학이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랑은 나쁘고,
어떤 철학은 위험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철학을 알아보는 것이나
사이비 종교를 알아보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폭력성'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침에는 이성에게
사랑한다며 안아주고,
저녁에 폭력을 휘두른다면..

그건 건강한 사랑이 아닐테죠.

아침에는 신도들에게 축복을 말하고,
저녁에는 신도들에게 폭력을 조장하면..

그 역시..
건강한 종교가 아닐테죠.

깊게 들어가면..
정당방위라는 둥..
그럴만 했다는 둥..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읽을수록..
더 확신이 듭니다.

아이히만이 보인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니라..
'악의 확신성'에 더 가깝다는 것이..

덧붙임 글은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슈탕네트 지음
#이동기 #이재규 옮김

#글항아리
@bookpot

#한나아렌트
#악의평범성

#베티나슈탕네트
#악의확신성

#위험한철학알아보기..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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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역사
#바닿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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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발췌하여 요약, 수정 하였음을
참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서 아이히만은 자신이 평생 이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을 따라 살아왔다고 말해 방청객
을 놀라게 했다. "칸트를 믿는다"라고 그는 진지
하게 말했다. 다만 자신이 받은 명령이 때로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방해했을 뿐이다.
추가 질문을 받자 그는 심지어 칸트의 정언명령
에 대해 그럭저럭 무난한 정의를 제시하기까지
했다. (…)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그리 대단치 않다
할 지적 천품(*타고난 기품)"과 복종이라는
문제의 철학적 차원에 대한 그의 "모호한 개념"
에 대해 쓴 바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의 선례를

따라, 아이히만의 말을 역설적인 헛소리이자
사이비 철학으로 일축했고, 각주로 언급할 만
한 것 정도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
게 성급하고 위험한 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
히만이 심문과 재판 중에 했던 몇 가지 진술에
근거해 그를 판단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히
만이 쓴 긴 에세이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이스라엘에서 쓴 글들, 즉 칸트에
대한 사랑을 전제해 쓴 글들에 대해 알지 못했
고, 그가 급진적 신학자 윌리엄 L. 헐과 벌인
종교철학 논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 문서들은 다른 자료들과 함께 재판 방청객들

에게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거의
전적으로 이마누엘 칸트에 의지해 최후 진술을
하려고 계획했다가 변호사의 설득으로 그 생각
을 떨쳐버렸다는 것을 아렌트는 알지 못했다.
아렌트가 제대로 본 것은 아이히만이 의도적으
로 철학도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이런 꾸민 태도의 주된 이유가 어설픈 허영심,
그리고 수사적 기술과 철학적 지식의 부족 때문
이라고 상상해 잘못된 결론을 도출했을 뿐이다.
스스로 철학을 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 철학의
기초를 잘 알 수는 있지만 철학의 가르침을 적
극적으로 따를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바로 이 점이 자신의 결론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이라는 아렌트의 추측에
서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기록
에서 드러나듯이 아이히만은 강력하게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아이히만을 거의 300시간에 걸
쳐 심문한 아브너 W. 레스는 그를 "자수성가
했고, 박식하고, 매우 지적이고, 매우 노련한"
사람이라고 묘사했으며, "그는 언제나 내 질문
이 어떻게 전개될지 귀기울여 듣고 그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밝혔다.
아이히만은 결코 일반 교육에 속하지 않는
철학 사상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칸트, 니체, 플라톤에 더해 쇼펜하우어도
언급했고, 최고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도
ㅡ아주 진지하게ㅡ 언급했다. 그는 감옥에서
어느 근본주의 기독교인과 종교철학 원칙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 사람은 그를 극우 신조
로 끌어들이고자 필사적이었고, 그의 어떤 주
장들은 너무나 훌륭하게 구성되어, 그 신학자
가 불쾌해하며 이렇게 외칠 정도였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의 유치한 신념을 고수하고 스
피노자와 칸트의 철학 사상에 관여하지 않았
다면, 당신은 지금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계몽된 국가에서 종교는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
는 만큼, 심지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특히 이 종
교 논쟁은 재판이 끝난 후에야 시작된 것이었
다. 책임 문제에 대한 글을 쓸 때와 달리 아이히
만은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려
전략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그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휠씬 더 조심스럽고 무뚝뚝
하게 보인다면, 이는 그가 이스라엘에서 한 모
든 말이 자신만의 체계적 생각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문서들과 비교
해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생각은 분명히 존재
했지만, 이스라엘에서 그는 나치 집권기에 자신

이 몰아내려 했던 대상인 자애로운 인문주의자
이자 철학 숭배자라는 바로 그 유형으로 자신을
묘사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 역할을 연습할
기회가 별로 없었을 뿐이었다.
물론 아돌프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자신의 철학
사상을 자세히 설명할 때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가 철학 사상에
대해 글을 썼다는 사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보여준 겉모습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
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진짜 신념은 아르헨
티나 문서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문서들은
피할 수 없는 자연법칙들의 비생기론적 철학을

보여준다. 오직 민족성에 기초한 사고만이 모든
생명체의 투쟁에서 최종 승리의 가능성을 제공
한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생각을 "가짜 철학"
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자유의 여지가 없는 순
수한 자연적 인과관계의 위험한 도그마(*독단
적인 신념이나 학설)를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
다. 또한 우리는 이 계몽주의 철회와 도덕적 요
구 없는 과학의 선포를 두고 싸울 기회를 허비
하고 있다. 우리는 철학에 대한 이 선전포고에
더 나은 것으로 맞서는 대신에, 우리가 철학 자
체를 이상화하고 있다는 의심에 스스로를 노출
시킨다. 철학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이히만이 전체주의 체제에 그토록 수용적이
었던 것은 그가 이미 전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이데
올로기는, 그 이데올로기를 선언하는 지배자 민
족의 일원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정의와 도덕에 대한 전통적 개
념에 의해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정당화한다면,
매우 매력적일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한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무엇보다 올바른 일을
했다는 존중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사람들
을 전향시키고 싶어했다. 바로 그것이 그의 글
들을 역겹게 만드는 점이다.

아이히만은 일관되게 "다음 세대들"에 희망을
걸었고, "다음 세대들"이라는 말을 지치지 않고
반복했다. 그는 다음 세대들의 사고 방식을 바
꾸고 싶어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다음 세대
들은 대량학살 혐의에 대해 그에게 무죄를 선
고할 것이었다. 그런 혐의는 아직 진정한 민족
사회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이질적인
세력의 가르침을 주입받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약 사람들
이 인종 간 최종 투쟁을 믿는다면, 단 하나의
적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 한 이 투쟁은 결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

1956년에 그는 1930년대 초 자신의 출발 지
점, 즉 "이데올로기 전쟁" 수행이라는 지점으
로 돌아왔다. 그는 해석 주권을 위한 이 싸움에
서 "관습적 방식과 비관습적 방식을 다 동원해"
이기고 싶었다. 그가 생산한 엄청난 양의 텍스
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성을 드러내
지만, 설득력 있는 수사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는 선동가가 되고픈 그의
욕망을 더 많이 드러낸다. p. 375~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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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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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의 철학이 위험한 이유는.. 폭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 아닐까?? (부제: 왜 어떤 철학은 나쁘고, 어떤 사랑은 위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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