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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수업 - 오늘의 시민을 위한 칸트 입문 강독 ㅣ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36
김선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10월
평점 :
2025. 11. 10. 작성 글.
#협찬 칸트 철학의 핵심은 '양심'이 아닐까??
저는 언제부턴가(최근 들어..)
철학을 특히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의 저는 철학을
(정확히 말하면, 도덕·윤리 과목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았거든요.
"저걸 왜 굳이 깊게 파고들어
공부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 컸습니다.
어려운 개념을 잔뜩 늘어놓는 게
'철학'이라고 느껴졌고요.
공부도 제대로 안 했던 터라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입니다;;
다만 확실한 건,
철학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는 사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 과목 선생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를 정도니까요.
그 선생님은 유독 저를
자주 혼내셨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 교실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태도로
수업에 임했던 게 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지 싶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거였습니다.
"야, 야…
너는 왜 내 수업에서 그렇게 조냐??"
졸렸습니다. 유독 더.
(사실 다른 과목에서도 뭐.. 비슷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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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제가
요즘 철학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저 스스로도 참 신기합니다.
철학을 처음부터
찾아 읽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철학에 눈길이 가더라고요.
(쉬운 철학부터.. 조심스럽게....)
그러다 결국 칸트까지
만나게 되었는데, 솔직히 좀 쫄렸습니다.
"내가?? 칸트를????"
그런데, 해설과 해석을 곁들여 읽다 보니,
우와...
진짜 신세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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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저에게 관심 분야가 많기도 하지만,
그 중 특히 세 가지는 계속 붙잡게 됩니다.
진화론, 행동경제학.. 그리고 철학.
(특히 철학 중에서도 법철학, 윤리철학,
도덕철학, 정치철학 등에 관심이 큽니다.)
그래서 조금씩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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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다 썼기에 마지막으로,
오늘 발췌해서 공유하는 내용을
챗GPT 요약으로 간단히 정리합니다.
1. 자율과 자유
도덕은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옳다고 판단해서 하는 것이다.
욕망이나 타인의 명령이 아닌,
내가 만든 규칙을 따를 때 비로소 그것이 자율이고 진짜 자유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 영혼 불멸성과 신의 존재(요청)
현실에서는 착한 사람이
항상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선한 삶이 결국 보상받아야 한다는
이성적 요구가 존재하기 때문에,
칸트는 영혼이 계속 존재하며
신이 있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도덕을 위해 필요하니까 전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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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용을 읽으며 저는 문득,
"칸트 철학의 핵심은
'양심'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 판단해보시길 추천드려요.)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흔들리는 판단의 시대,
다시 '이성'으로 답하다!!
(김선욱 교수의 한 권으로 읽는 칸트 3대 비판서)
#칸트수업
#김선욱 지음
#21세기북스
이성.. 그리고 양심.....
#북스타그램 #바닿늘
비슷한 주제의 글은..
#바닿늘철학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최소한으로) 수정 되었습니다.
자율과 자유
정언명법은 인간이 자율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외부 조건에 의해 규정되고 규제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형성한 법칙에 의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자율성이란 우리가 자신에게 스스로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동시에, 그 법칙을 형성할 수 있는 입법자와 같은 능력을 지닌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법적 처벌을 받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인 나 자신이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행위자인 나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자신의 이성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만든 명령을 따르는 타율적 행위가 아니다.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도덕법칙을 따르는 자율적 행동이다. 인간은 자율적으로 도덕적이 되는 것이다. 외적 목적이나 내부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이 발견한 법칙을 스스로 따른다는 말이다.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이 발견한 도덕법칙을 따르며 행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타인, 즉 외부에 구속 당하지 않는다. 자신의 외부에서 만들어진 명령을 따르는 삶은 자유가 아니다.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의적인 삶도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거나 외부 환경의 조건에 부합해 처신하는 행위이므로 그 또한 자유로운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은 내가 스스로 만든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자율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유는 자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의 존엄은 자율성과 이성에 기반한다. 누구든 자율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즉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때 그 삶은 존엄을 형성하는 뿌리가 된다. 인간은 자연의 인과율에만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진 윤리의 전통을 현대에까지 밀고 온 깊은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지만, 그 존엄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실천할 때 비로소 존엄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생긴다.
영혼 불멸성과 신의 존재
앞서 우리는 칸트가 행복을 추구하는 길을 제시하지 않고 옳은 삶의 길을 제시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칸트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칸트는 행복 추구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칸트는 도덕의 관점에서 행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칸트는 도덕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성적인 사람은 선의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을 볼 때 만족하지 못한다. 이성적 존재라면 심지어 스스로가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를 통해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도 만족하기보다 오히려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칸트는 선의지가 곧 '행복을 누릴 자격'이라고 말한다.
행복은 인간의 본성이 추구하는 바이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이성보다 본능이 더 잘 인도한다. 이성이 제시하는 도덕법칙을 따르면 현실에서는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사회에서는 덕을 갖춘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개인의 행복 조건은 덕을 갖추는 것과 좋은 사회를 만들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덕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선한 노력이 현실에서 부정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선의지와 행위의 좋은 결말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사이에 놓인 온갖 우연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위가 배신을 당하고 선의지가 부정당할 수 있으며 덕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것이 현세이지만, 칸트는 최고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결국 선이 이루어지리라는 요구가 충족되는 것 또한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가 요청(postulate) 된다고 주장한다. 요청이란 입증될 수는 없어도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으나, 현세를 도덕적으로 살아가라는 이성의 명령을 받는 인간은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반드시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영혼 불멸성과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맥 빠지는 일일 수 있다. 요청한다고 그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더욱이 신은 절대적 존재일 터인데, 그런 신의 존재가 이성의 요청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거나 강력한 주장일 수 있을까? 현대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자신의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요청으로 주장되는 신의 존재는 무력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서구 개신교 신학은 신을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존재로 주장하는데, 도덕적 요청으로 신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것은 그에 비해 너무나 약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요청으로서의 영혼 불멸과 신의 존재에 관한 주장은 내게는 하나의 절규처럼 느껴진다. 현세에서는 선의지에 기초한 도덕적 삶이 좋은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배신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그런 삶을 요구하는 한 그 삶의 결과 또한 궁극적으로는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려야 한다는 절규의 말이다. 이성의 논리성이 필연적인 것만큼이나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 또한 필연적이라는 믿음이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칸트 주장의 근거로 여겨진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삶은 그런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p. 13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