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누구나 교양 시리즈 6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 이화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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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생각하는 힘, 철학에서 시작하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제가...
철학을 좋아하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주로 자기계발서나 대중교양서를
읽고 리뷰하던 터라, 철학은 제게
그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철학이..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철학을 찾아 읽게 되었으니,
정말 사람 일은 모를 일입니다.

---

돌이켜보면, 모든 배움에는
공통된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작은 쉽고, 재밌어야 한다는 것.

처음부터 어려운 일을 계획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재밌어서 하는 일'이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결국 방법을 찾아내죠.
(대표적으로 게임이 그렇습니다.
규칙이 복잡해도 결국 다 익혀내잖아요.ㅎㅎ)

배움의 본질은 사실 어릴 적
성장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뒤집고, 잡고, 걷고, 옹알이하던
그 시절처럼 조금씩 익숙해지며
재밌어지는 과정이 있었을 겁니다.

문제는,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그 '재미'가 점점 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며 배우던 것들이
의무로 바뀌는 순간부터,
배움은 짐이 됩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계속 이어가는 이유는
호기심보다 '해야만 하니까'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혼나지 않고,
공부를 끝내야 놀 수 있기 때문이죠.

---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 이유는
생각해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결국 '잘 되게 하기 위해서'죠.

하지만 정작
'어떻게 가르치는 게 잘 가르치는 건가'
이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ㅜㅜ....)

아이의 미래를 향한 걱정이
너무 크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의
배움이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돌아보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지점이 늘 아쉽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사라지는 순간,
배움은 방향을 잃기 때문입니다.

---

철학의 힘은 바로 그 "왜"에 있습니다.
철학은 정답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예전에 제가 읽었던 책,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에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매번 다리가 되어주는 것보다,
휠체어를 끄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더 효과적이다."
(워딩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철학은 바로 그...
'끄는 법'을 알려주는 학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힘.

이게 바로 철학이 가진
가장 큰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

철학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등산으로 비유하자면,
먼저 동네 공원부터
가볍게 걸어보는 겁니다.

조금 익숙해지면 뒷산을 오르고,
그다음 명산을 찾아가면 됩니다.

시작은 늘 가벼워야 오래 갑니다.

"해야 하나?" 대신 "어떻게 해볼까?"라고
질문을 바꾸면, 생각의 문이 열립니다.

돌이켜보면, 자기계발서 역시
나름의 철학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들
대부분은 이미 누군가 겪고,
사유했던 문제들이니까요.

우리는 그들의 사유를
'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시대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가 너무 많아 혼란스러울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안목'입니다.
그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

저는 요즘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결과는 통제할 수 없지만,
과정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과정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안전하고, 더 예측 가능해
진다고 믿습니다.

철학은 그 과정을 함께 걸어가는
좋은 동반자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길 바랍니다.

바램이 하나 있다면..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이..
그 길에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

결론을 짧게 요약하자면..
철학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왜?'를 묻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미 철학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생각하는 힘의 시작입니다.

일부 내용은 피드 내용에,
일부 내용은 댓글로 공유드리며..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끝!!

#철학최대한쉽게설명해드립니다
#페르난도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우주서평단
#이화북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북스타그램 #바닿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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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닿늘철학

★ 북스타그램_우주 @woojoos_story 모집,
@ehwabooks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_철학방 단톡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최소한으로) 수정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훌륭한 연설을 남겼다. 형을 언도받지 않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커녕 질문하고, 논쟁을 벌이는 자신의 영원한 과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것을 그 유명한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삶을 어떻게 다루 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는 일이었다. p. 41


플라톤
가장 정의로운 사회(공공선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사회)란 이성적 능력이 뛰어난 자가 통치하고, 용감한 자가 도시를 수호하며, 상업적 욕구가 강한 자가 경제 활동을 맡는 사회다. 바로 이것이 플라톤이 그리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국가에서는 문학이나 음악조차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p. 57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지식에 대한 열망은 우리가 세상을 접하며 느끼는 '놀라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곧 '사물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경이로움의 대상은 인간사보다는 자연이었다. 그는 의학, 동물학, 식물학, 천문학, 물리학 등 수많은 분야를 탐구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물질세계를 단순히 인간 삶의 배경 무대나, 어떤 더 높은 세계의 퇴색된 그림자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안에 숨겨진 신비로움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것들의 본질과 작동 방식을 반드시 밝혀내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자'의 개념에 가까운 그는 탁월한 관찰자였다. 예를 들어 그는 고래가 물고기가 아니라 포유류라고 주장했는데, 이 사실이 유럽 생물학계에서 진실로 받아들여
지기까지는 무려 23세기나 걸렸다. p. 59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제자들로서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들이다. 플라톤은 가장 고차원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영원한 이데아를 지향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주변의 자연, 그것도 가장 소박하고 물질적인 것까지. 살고 일어나고 작용하는 모든 것에 대한 관찰에 집중한다. 예컨대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지속하는 동안에는 실재하는 모든 것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철학자 이후의 철학자들은 플라톤 학파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라고 말한다. 둘의 사상을 절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엮어낸 철학자들 또한 많다. p. 66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인간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최초로 도덕적인 범죄를 저질렀던 아담과 이브로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아들과 손자와 종손자들도 같은 죄를 저질렀으며 그때부터 온 인류는 단지 '정죄 받은 자들의 무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영원한 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죄 없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중 아무도 지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수많은 인간 세대를 창조하시면서도 결국 그들을 지옥 불 속으로 보내는지를 결코 설명하지 않았다. p. 107~108


윌리엄 오컴
우리의 지식을 늘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경험적으로 입증된 것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는 과학적 사유 영역에서는 아무리 존경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교리나 도그마는 통하지 않으며, 오직 경험적 자료에 기반한 검증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여 과학에서의 사상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더불어 그는 교회의 영적 권력과 국가의 세속 권력의 분리를 주장했다. 국가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 동시에 교회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와 함께 비로소 새로운 철학적 세계, 나아가 새로운 정치적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 119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군주는 무엇보다 훌륭한 정치가여야 하지만(유능하고 단호하며 나라를 구석구석 알고 있어야 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훌륭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도덕은 사람들 간의 일상적인 관계에서는 좋은 것이지만 사회 전체를 이끌고 음모와 반란을 일으키려는 적과 싸워야 하는 군주에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는 각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전체 국가를 구원하려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통치자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를 속이거나 반대파를 과감하게 제거하라고 직접적으로 권고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수단들이 정당한 이유로 필요하다면, 과도하게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약 시민들이 군주를 사랑한다면 서로를 위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하지만 더 안전한 방법은 시민들이 군주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p. 140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사람들이 무지 속에 머무르는 이유는 '우상(idol)'이라 부르는 것들, 즉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의견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여러 종류의 우상을 지적한다.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종족의 우상'이 있고. 특정 개인과 문화가 공유하는 우상도 있다.(…)
우리가 진정한 지식을 얻고 싶다면 모든 사회적, 개인적 우상에서 벗어나 편견 없이 자연을 연구해야 한다. 물론 프랜시스 베이컨의 저작들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완전히 체계화된 것은 아니며, 그 자신도 여전히 많은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서는 이미 근대 과학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우주에 대한 무관심한 관조를 넘어서 인간의 목적과 야망을 위한 지식의 활용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p. 145


파스칼
파스칼은 지식이나 과학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무한 사이에 놓인 존재다. 하나는 우주의 무한한 거대한, 또 하나는 분자와 원자의 무한한 미세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한 지성과 경험만을 가졌기에 이 두 극단의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사고하는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의 가벼운 바람에도 쓰러지는 약한 같대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우리는 비참 한 존재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비참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나무도, 허리케인도, 별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안다. 무한한 우주는 손쉽게 우리를 파괴할 수 있지만 지적 자각, 즉 자기 인식의 능력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 p. 171


몽테스키외
몽테스키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법의 정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법의 원리를 연구한다. 물론 자연의 법칙(각 나라의 기후. 지형, 농업 등)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 제약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고 저항적인 존재다. 각국의 법은 신이나 자연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각각의 정치 체제는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성향이 다르다. 전제적 독재 체제는 '공포'를, 귀족적 편견 위에 세워진 군주제는 '명예'를, 공화정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물론 각 체계는 저마다 장단점이 있지만, 몽테스키외는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분립이 보장된 정치 체제를 공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로 보았다. p. 192


데이비드 흄
흄은 철저한 회의주의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객관적으로 확실한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의심한다. 왜나하면 우리의 모든 인상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회의주의 자체도 의심한다. 그는 우리가 철학 하는 버릇을 잠시 멈추기만 해도 곧바로 다시 외부 세계에 어떤 속성을 가진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고,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으며, 인과관계란 확고한 것이라고 여길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은? 종교는? 흄에 따르면 종교의 기원은 다신교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현상 가운데 자신에게 이익이 되거나 해를 끼치는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유리하거나 불리한 성향을 지닌 온갖 환상적 존재들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행운과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마법 같은 대상을 상상해낸다. p. 204


칸트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영토에서 칼리넌그라드라 불리는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을 떠난 적 없이 살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세상을 더 잘 알기 위해선 반드시 여행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칸트는 반례를 제시하는 셈이다. 그는 단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당대에서 가장 박식하고 지혜로운 인물일 뿐 아니라, 서양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사상가가 되었다. 그의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나 파란만장한 일화가 거의 없었다. (…)
칸트는 위대한 전환과 혁신의 순간들을 온전히 책상 앞에서, 고요한 사색과 집필을 통해 이루어냈다. 그는 철학 교수로 생계를 유지하며 오늘날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사상가이자 교수'라는 전형을 처음으로 연 인물이기도 하다. p. 206


헤겔
가장 고차원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은 역사보다 앞서 예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은 역사의 뒤를 따라 나타나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사유 속에서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정리한다. 헤겔의 비유에 따르면, 철학의 상징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가 저물고 하루가 끝난 뒤 황혼 속에서야 날기 시작한다. p. 225~226


마르크스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과거에 봉건제와 귀족제를 무너뜨리는 데 역사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미래 사회의 실현, 즉 계급과 사회적 위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해방되고 모든 사람이 공동의 재산을 평등하게 소유하는 사회 (다시 말해 '공산주의'라 불리는 사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사회혁명은 도덕적 요구나 윤리적 명령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을 비관과 교화를 통해 반란에 나서게 함으로써 앞당겨져야 한다. p. 229~230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현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곧 칸트가 '(사물 자체가 아닌) 현상'이라 부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에 영향을 주는 모든 외부 사물들을 말한다. 하지만 그 표상은 우리의 이해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본능적 직관에서 비롯된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이성이나 추상적 개념들이 작동한다. 결국 우리가 보고 아는 세계란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의 베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과 생의 갈망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으로, 우리가 관심 없는 것은 감추고 원하는 것은 아름답게 꾸며서 보여준다. p. 234~235


니체
쇼펜하우어는 맹목적인 의지를 현실의 근본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에게 '힘에의 의지'라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곧 창조와 환호를 통해 자기를 초월하려는 능력이자,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때로는 과감히 파괴하는 의지다. 이 힘에의 의지는 위대한 예술가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는 이성적이고 고전적 조화를 사랑하는 아폴론이 아니라 모든 질서를 뒤흔들고 극한의 정신적 위협까지 감수하는 열정과 광란의 신, 디오니소스의 상징 아래에 자신을 둔다. p. 252


프로이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psique, 그리스어로 영혼 또는 문자 그대로는 '나비'라는 뜻)에는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있으며 무의식은 의식보다 휠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마치 빙산의 대부분이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본능적 욕망들과, 고통스럽거나 수치스러운 기억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잊어버린 척하며 무의식 속에 묻어두려 한다. 이 무의식의 영역을 프로이트는 '이드(원초아)'라고 불렀고, 여기에 대응하는 것이 의식적인 자아인 '에고(자아)'이다. 에고는 단순한 즉각적 쾌락뿐 아니라 현실과 안정, 안전까지 고려하며 삶을 조직하려 한다. 그러나 이드의 본능적 충동과 에고의 현실 원칙은 자주 충돌하고, 이 갈등이 바로 신경증이나 심리적 문제의 원인이 된다. 여기에 '슈퍼에고(초자아)'라는 세 번째 요소가 개입하는데, 이는 우리가 어린 시절 내면화한 도덕적 · 사회적 관념의 목소리이며 억압과 죄책감을 형성하는 원천이다.
정신분석은 이런 무의식을 언어를 통해 의식으로 불러내어 억눌린 갈등을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말의 힘으로 무의식 속 망각된 것을 의식에 끌어올려 우리를 옥죄는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p. 276


알베르 카뮈
그는 삶에 의미와 조화를 찾으려는 인간의 열망이 불투명하고 침묵하는 세계와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종말과 부딪히는 잔혹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 충돌이 낳는 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이며 이는 어떤 것으로도 감출 수도, 없앨 수도 없다.
부조리한 삶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살을 통해 모든 것을 끝내는 것, 종교적 신앙에 몸을 맡기는 것 혹은 부분적인 이해에 만족하며 전체를 포기하는 이성적 태도다. 하지만 카뮈는 이런 모든 '도피'를 거부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모험이나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p. 290~292


버트런드 러셀
러셀은 우아하고 명료하며 정교한 문체로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을 쓴 적은 없지만, 수상 이후 볼테르풍의 풍자 단편을 몇 편 집필하기도 했다. 문학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은 그의 『자서전』으로,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지적 · 정치적 여정을 담았다. 그는 이 책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다.
"세 가지의 단순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열정이 내 삶을 이끌어 왔다. 지식을 향한 추구, 사랑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 p. 295


한나 아렌트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은 관조적 삶을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두어왔다. 그러나 아렌트는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후자라고 보았다. (…)
그녀의 대표작 『전제주의의 기원』은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에 등장한 전체주의 권력의 형태를 정밀하게 분석한 선구적인 저작이다. 아렌트는 볼셰비키와 스탈린주의, 그리고 뒤이은 나치즘에서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현상을 전체주의의 토대로 보았다. p. 304


마리아 잠브라노
마리아 잠브라노가 평생 천착한 주제는 시와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지적 전통을 이어주는 '시적 이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철학은 차이를 단순화하고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통일을 추구하는 반면, 시는 있는 그대로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사물 하나하나를 어떤 제약이나 추상화 없이 받아들인다. 잠브라노는 이 두 사유의 탐구 충동이 지닌 장점을 모두 살리고자 했다. 그녀는 오르테가 사상의 몇 가지 주제를 자기 나름의 방향으로 전개했다. 예컨대, 인간이 삶을 세우는 토대인 '신념' 아래에는 그보다 더 깊고 중요한 층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의 어두운 이면에는 언제나 '절망'이 뒤따른다. 철학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끝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이 희망 어린 갈망을 향하는 '영혼의 지식'이라고 보았다. p. 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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