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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독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5
황모과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9월
평점 :
우린 정말 남이 될 수 있을까?
파멸 SF.....................
우리는 정말 남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단언컨데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사회적인 갈등들은(남녀 갈등부터 불평등, 전쟁 문제 등등을 포함한..) 어쩌면.. 남이 되려고 과도하게 시도했던 우리가 맞이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책 내용이 아니라, 책 마지막에 적혀있는 작가의 말만 따로 떼어 발췌하였습니다.
저처럼 책을 다 읽고 나서 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 저는 해당 작가의 말과 그 직전에 실려 있는 발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졌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만화 원피스 속에 나온 해당 글귀를 좋아합니다.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_물리학자 윌리 가론(허구의 인물)
이런 격언도 좋아합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출처가 불확실한 오래된 격언 같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가 걷고 있는 길의 끝이 될 지 중간이 될 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대로 계속 가면 분명 큰 충돌이 생길 것 같다는 불안함 속에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극도로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혹은 세상사에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거나) 우리는 적게는 크게든 이런 불안함을 저마다의 크기로 안고 살아가고 있을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져야만 사회에 압력을 줘서 비로소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잔소리로 바뀌지 않습니다. 스토리를 통해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의 힘은 가장 좋은 변화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의 한자에서 '간'은 '間'(사이 간) 입니다.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은 '함께'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주권을 행사하기 때문이죠.
우리 종은 시작부터 남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고(사회가 공동체를 만들며 문명을 이뤘으며), 지금 비록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지만 결국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맞아, 우린 남이 될 수 없지."
더 큰 걸 잃기 전에 우리 인류가 깨닫고 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도 담으면서..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언더더독 #황모과 #현대문학
#현대문학핀시리즈장르소설선
이 글은..
@woojoos_story 모집,
@hdmhbook 출판사의
도서 지원으로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인스타그램에 해당)
#우주클럽_SF방
#북스타그램 #바닿늘
비슷한 주제의 글은..
#바닿늘소설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서, 주관적인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아래에서부터는 해당 책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요약, 수정 하였음을
참조 바랍니다.
작가의 말
파멸로 달려가는 우매한 자들의 심정으로
자신이 쓴 글에 해설을 덧붙이는 일이 작품의
미흡함을 공인하는 듯해 부끄럽지만 어떤 마음
으로 이 이야기를 썼는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미워하면서도 멀리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다 알고도 자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인간,
무언가에 중독되어가는 자기 파괴적인 사람,
폭력을 당하다 자신도 포악해진 피해자…….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미워하지 못한달까. 굳이 표현하자면
애증한다. 예를 들어 폭력의 희생자가 폭력적인
상황에서 희생자를 가해자와 똑같이 미워하는 건
조금 주저하게 된다. 둘 다 밉더라도 차등을 두고
싶다. 제대로 변별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놓인 맥
락이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할까. 그리 상상하다
보면 폭력적이고 추레하고 비루하고 역겨운 상항
속에도, 심지어 도의나 양심이나 염치 이하의 상
황에도 논리나 법이나 합의로 재단할 수 없는 의
미가 있을 거라는 묘한 믿음이 생기곤 한다.
물론 뻔하게 악랄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지는 않
으며 우월감에 젖어 이들을 관찰 대상으로 여기
는 것도 아니다. 반면교사 삼으려는 마음도 있긴
하지만, 사실 심적 거리가 멀지 않다. 어쩌면 그가
내 평행우주는 아닐까. 나도 인생의 여러 분기점
에서 자멸적 선택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으니.
공감하지 못할 때도 굳이 겸허한 자기 연민으로
치환해본다.
잠시 멋진 곳에 들렸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늘
늪에 빠진 것 같았다. 심지어 나는 오래 한국을
떠나 있었는데도 그랬다. 내가 속한 세계가 늪이
라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가족이면, 아무리 거부
해도 타인이 되지 않는 가족과 다르게 살려고 결
심하면 마음에 묘한 이율배반이 맺히는 듯하다.
(중략)
꼭 극단적인 상상이나 시행 결심이 아니더라도
우리 일과는 이미 비도덕적이다. 어린이와 약자
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더러운 전쟁과 기후 재해,
사회적 참사, 약자를 노린 혐오 범죄 기사를 목도
하는 매일매일. 일들의 연유에 추악한 인간들이
있음을 지켜보며 치를 떨다가 다음 장면에 나오
는 고양이 사진에 작게 위로받는다.
세계가 인간을 모조리 소시오패스로 만들어버
렸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질환 수준의 해리
(*풀려서 떨어짐.)와 괴리(*서로 어그러져 동
떨어짐)와 유체 이탈(*몸에서 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두고 이르는 오컬트 용어.)이 루틴이다.
인간이라는 사실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
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당장 포화 아래
있지 않다고 누구도 평화로운 풍경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부도덕하다는 일반화로
모든 걸 덮자는 주장도 아니지만 인간다움을
회복하자는 진단조차 안일하게만 느껴진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인간이길 반하는 인간들
을 타자라는 위치에만 놓을 수가 없다. 애초에
인간성이 뭐라고. 『언더 더 독』을 쓰며 '인간다
움이란 없다'고 반복해 떠올렸다. 이 와중에도
'인간을 자청하며 대표하는 자는 누구인가?'
싶었다.
인간 이하의 존재들을 경멸하는 대신 직시하려
는 시도는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다.
약자들의 내부 분열을 획책해 확산하는 유구하
도록 악랄한 정치적 기획에 너무도 취약한 시대
적 분위기를 몹시 미워하면서도 남 일로만 혹평
할 수 없다. 휘둘리고 자충수를 두고 파탄 내고
다 같이 죽자는 우둔하고 잔인한 사람이 나일 수
있음을 받아안는다. 가짜에 휘둘리는 취약함,
낙오된다는 공포, 한 번 배제되면 재편입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을 내 마음처럼 통감하기에 무
기력하게 폭력적인 인간이 나일 수 있음을 인정
한다. 그저 이 저열함을 마음 깊은 곳에 들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직시할 뿐이다. 윤리를 말
하는 순간에도 내 안에 살의가 잠재함을 인정하
면서…….
동시에 『언더 더 독』에 등장하는 무력하고 잔혹하
고도 평범한 인물들에게 근본적으로 윤리적 성찰
이 깔려 있다. 읽는 분들도 느끼시겠지만 이는 여
성과 사회적 약자가 요구받는 높은 수준의 윤리적
내면화라고 생각한다. 약자가 비윤리적이려면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다.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사망
이므로. 사회가 약자에게 요구하는 미덕이 휠씬
수준이 높다. 그래서 나의 검허함까지도 무력한
윤리에 일조하고 있음을 슬프게 수긍한다.
이 글이 독자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
해 송구할 따름이다. 노동은 멸시당하고, 죽어가
는 사람 곁에서 건강히 숨 쉬는 것조차 부끄러움
이 되고, 사소한 마음까지도 철저히 기획된 세계
를 살며, 죄책감조차 사치스러운 심정이 각자의
자기 연민으로 치환되었으면 좋겠다.
2024년 한여름 같은 초가을
폭염과 산재, 혐오와 능욕, 역사 퇴행 속에서
황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