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까지의 <이방인>오역 논쟁을 지켜보자니, 카뮈 <이방인>에 대해 독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르소가 총을 쏜 이유가 단지 태양 때문인가? 부조리 소설이고,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현재의 번역본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원래 카뮈의 <이방인>이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존 번역본들, 김화영 교수 번역본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됩니다.

 

1. ‘이년 저년이라는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생양아치 같은(포주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인 여자를 피가 나게 때리고 쫓아낸 뒤, 그에 앙심을 품은 그녀의 오빠가 레몽을 해치기 위해 바닷가까지 따라와서는 싸움이 벌어진다. 뫼르소는 질이 안좋은 레몽이라는 사내의 요청에 따라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레몽과 비슷한 수준의 친구인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다가 우연히 그 사건에 연루되고, 해변에서 다시 우연히 그 여자인 오빠라는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되었을 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총을 쏘았다. 뫼르소는 이후에도 쓰러진 상대를 향해 연속해서 네 발을 더 쏘아 그 자리에서 사내를 확실히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묻자, 무덤덤하게 태양 때문에그랬다고 대답한다.

(민음사판 김화영본을 비롯한 기존 번역서들)

 

그런데 새롭게 번역된 실제 카뮈의 이방인은 저런 내용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이렇습니다.

 

2. 외모는 험상궂지만, 남자의 의리를 앞세우는 창고관리인인 레몽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정부라고 믿고 생활비를 대주고 있던 여자가 있었는데, 실제는 그 여자의 뒤를 봐주는 '기둥서방'이 있었다. 레몽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이전에는 결코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여자를 때려서 쫓아낸다. 그에 앙심을 품은 기둥서방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해변까지 따라오고, 친구인 레몽을 따라 여자 친구와 함께 마송의 해변가 오두막에 놀러와 있던 뫼르소는, 이들의 싸움에 연루된다. 급기야 사람들을 피해 혼자 샘을 찾아왔던 뫼르소는 그곳에서 그 아랍사내와 마주치게 되고, ‘시뻘건햇볕을 피하기 위해 샘 쪽으로 한걸음 더 다가오는 뫼르소를 보고 자신에게 다가온다고 오해한 아랍사내는 먼저 칼을 빼들었고, 다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눈을 찔러오는 그 칼날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약간의 텀을 두고엄마의 장례를 치르며 느꼈던 머리 위 오후 2시의 폭발하는 태양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몽롱한 상태에서 네 발을 더 쏘아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법정에서 재판장이 왜 그랬냐고 물었을 때, 뫼르소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검사가 막 사형을 구형한 뒤였던 것이다), ‘자기도 터무니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새움출판사 이정서본)

 

기존 이방인을 읽은 독자님들은 아마 1번 내용에 대해 수긍할 것이고,

새움 이정서본을 읽은 분들은 1번 내용을 보면서 좀 어이없으실 겁니다.

또한 둘 다를 보신 분은 이야기가 섞이면서 어디가 크게 다른지 잘 모르실 겁니다. 다만 이전에 몰랐던 것 같은 내용은 이해하게 되었을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바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면, 소설은 개연성이 있어야 합니다. “있음직한 비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사건이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소설이 보통 산문과 다른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잘 읽히는 것이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잘읽히지 않는다는 것은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뭔가 맥이 끊긴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우선 저기, 1번 요약본을 보십시오. 자세히 보면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으로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선 1번이 소설이 되려면, 레몽이 자신의 정부를 때리게 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저기엔 아예 그런 설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레몽이라는 사내가 생양아치라 이유도 없이 여자를 구타했다가 되야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엄연히 처음으로 손을 댔다네가 나를 농락했어. 네가 나를 농락했다구라고 레몽이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화영 교수번역본을 포함해 기존 번역에서는 이 농락의 이유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기 등장한 남자가 그냥 여자의 오빠라면, 카뮈가 내용 속에 친절하게 복권전당포등을 언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카뮈는 둘이 친남매가 아니라는 사실을 뫼르소만 알고 있다는 암시를 위해 소설적 장치를 해둡니다. “(레몽)가 여자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그 여자가 무어 여자임을 알았다.”(본문 93)는 뫼르소의 독백은 그래서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카뮈는 아랍인무어인이라는 태생적 차이를 가지고 분명하게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인데, 기존 번역서들은 모두 한결 같이 이 점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뫼르소는 왜 굳이 해변까지 마리와 함께 와서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레몽이라는 사내가 1번에서처럼 저렇듯 생양아치에, 포주에, 여자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자라면, 과연 저 이성적인 뫼르소가 자신의 여자 친구까지 데리고 그 친구의 오두막까지 따라와서 유쾌한 해수욕을 즐기고, 나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여름을 함께 보낼 계획을 짤 수 있었을까요? 마리 역시도?

마송과 레몽 그리고 나는 비용을 분담하여 8월을 함께 해변에서 지낼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Masson, Raymond et moi, nous avons envisagé de passer ensemble le mois d’août à la plage, à frais communs.)” (본문 77)

 

이렇듯, 뫼르소에게 생테스 레몽은, 김화영 교수나 다른 번역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런 양아치가 아닙니다. 그는 그냥 점잖고 지적인 셀레스트와는 조금 다르게 뫼르소가 뒤늦게 사귄 색다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위와 같은 정황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다시 그래야만 최소한의 소설적 개연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러한 독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몽이 그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셀레스트와 똑같이 나의 친구라는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Qu’importait que Raymond fût mon copain autant que Céleste qui valait mieux que lui?)”(본문 164)

 

뒷부분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레몽을 따라 해변가에 놀러왔다 연루된 싸움, 이제 레몽과 아랍인과의 갈등은 해소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으로 혼자 산책을 나왔던 뫼르소는 다시 샘으로 돌아갔다가 친구인 레몽을 농락했던여자의 기둥서방인 아랍인 사내와 단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뫼르소는 단지 뜨거운 태양을 벗어나고 싶어서 사내가 누워있는 샘 가까이로 한 걸음을 더 옮긴 것인데, 아랍남자는 오해하고 먼저 칼을 빼들었고, 그 칼날에 반사된 강렬한 햇빛이 뫼르소의 눈을 후벼 팠기에, 위협을 느낀 뫼르소는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무의식적으로 당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서들은 이러한 여러 정황들을 모두 외면한 채, 주인공 뫼르소가 우연히 악한인 레몽을 따라 해수욕을 갔다가 싸움에 휘말리게 되고, 다시 우연히 사내와 단둘이 만나게 되자 태양 때문에총을 쏘고, 급기야 네 발의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적 전개를 완전히 무시한 번역인 것입니다.

 

, 보시다시피, 앞의 두 예문(1,2)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바로 뫼르소가 사람을 죽인 이유, 그것이 태양 때문이었다는 표면적 이유 말입니다. 여기에 이 문제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저렇게 두고 봐도, 프랑스인이나 우리나 뫼르소가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문학적 레토릭을 다르게 받아들일 이유가 하등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게 말이 될까요? 그 어떤 개연성도 없이, 이런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두고 세계인이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 현대소설의 전범이라는 극찬을 쏟아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건 카뮈에 대한 모욕이고, 노벨문학상에 대한 모독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거기에 부조리라는 말로 포장을 한 게, 기존의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소설이 부조리 소설인 이유는 주인공이 그렇게 횡설수설하며 이유도 없이 그냥 태양 때문에사람을 죽이고 항소도 않고 죽음을 받아들여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뫼르소의 살해 행위는 충분히 정상참작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평등과 정의를 위해 세웠다고 믿었던 법정에서 오히려 사형을 선고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프랑스인들은 충격에 빠졌던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부조리한가 깨닫게 된 것이고, 그래서 이 소설을 부조리 소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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