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에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흘 내 빈소를 지키다 병원에 상복을 반납하며 서글픔과 후련함을 함께 느꼈다. 하지만 그런 스스로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마음, 세상 누구도 내게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는 반발심이 들었다. 동시에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무언가 의미 있고 따뜻한 말을 해주길 바랐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를 간병하는 동안 나 역시 인간관계며 경조사를 거의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다만 지금도 기억나는 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보낸 화환이었다. 플라스틱 꽃바구니 아래 길게 늘어진 흰 띠에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 외에 어떤 정보도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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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은 형용사로만 이루어진 문장 같았다. 가볍게 흔들리고, 흔들리다 떨어질 것 같고, 사라져도 문제될 것 없는 존재. 미옥은 세상을 꾸미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꾸밈이 필요 없는 곳이라면 미옥도 필요 없는 존재가 되리라. 나는 엎드려 턱을 괸 채로, 내 앞을 서성이는 불안정함을, 소리 없이 가득한 음악을 감상하는 게 좋았다.
미옥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심각하게 걱정하는 법도 없었다. 문제가 생겨도 ‘그게 뭐, 별일이라고?’ 말하고는 웃어버렸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웃어─, 버렸다. 웃음 뒤에 따르는 것들─멋쩍음, 짧은 적막, 달라진 공기, 몸의 들썩임, 허전함, 씁쓸함─마저 웃음과 함께 버렸다. 마치 버리기 위해 웃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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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본질은 약한 척이다. 약함을 인정하는 일. 당신이 나를 돌본다면 나 역시 당신에게 무언가를 주겠다는 서약도 포함된다. 귀신에게 내 약한 목덜미를 보여주어 귀신의 공격 의지를 잃게 만들어야 했다. 기도를 하는 중에 대문 쪽을 바라보면 감나무 이파리들도, 시멘트 바닥도, 기어가는 개미 떼도, 내가 신은 어른 슬리퍼도, 귀신을 향해 맞잡은 두 손도, 밤의 색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어둠을 지배하는 신을 향한 내 믿음은 오래 이어졌다. 훗날 내 기도가 귀신을 향한 서원(誓願)이었다는 생각을 하면 서늘해졌다. 내 오랜 서원으로, 삶에서 뭔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아서. 죽은 혼에 대고 중얼거린 어린 날의 기나긴 기도, 그 시간이 마당 구석에 켜켜이 쌓여 내 그림자를 이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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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동안 생각했다. 사랑. 미움. 평생. 한순간. 엄마. 아빠. 지겨움. 냄새와 함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없을 땐 돌에 기대야 한다. 루비 같은 거. 붉은 돌 같은 거. 부수면 피 흘리는 거.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거. 가질 수 있지만 갖고 싶지 않은 거. 곧 내 인생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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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완벽한 행운
주영하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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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에 자란 30년지기 세 친구가 8백만 분의 1 확률인 로또 40억 당첨된다.

범죄 스릴러 영화는 즐기지 않는데 책에서는 어느 쪽으로 회오리 바람이 몰아칠지 갈길을 종 잡을 수 없는 스릴이 가슴 조마조마 하면서 읽어내려갔다
이 스토리가 영화화 된다면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큰 인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지훈, 명호와는 달리 태헌은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버려졌다. 당연히 친부모가 누군지 몰랐기에 늘 피붙이에 대한 절박함을 안고 살았다. 태헌은 종종 술을 마실 때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세상으로부터 홀로 뚝 떨어진 것같이 느껴진다고 말하고는 했다. 가끔씩 사무치게 외롭다고, 무서울 정도로 혼자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런 태헌에게 아들이라는 존재가 어떤 것일지. 지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절박했을지, 얼마나 간절했을지.
같은 인간이기에, 나약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들이 이해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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