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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티 없이 새하얀 순백의 눈 속에 핀 빨간 동백꽃.
<은교>의 책장을 넘기는 순간, 나는 차가운 겨울이 품고 있는 빨간 동백을 훔쳐본 기분이었다. 인간은 욕망은 태평양보다 넓고 서릿발처럼 냉정하며 열병처럼 식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욕망이 피워낸 한 송이 동백이 바로 ‘은교’다.
니보코프의 <롤리타>가 사랑과 파멸을 환상으로 포장한 절망의 시라면, <은교>는 생명력 넘치는 청춘에 대한 갈망과 거기서 피어나는 관능을 나지막이 읊조리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책을 손에 쥐고 위대한 시인 이적요를 묘사한 내용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거친 바다를 가르는 ‘산티아고’의 모습이었다. 청새치를 잡기 위해 분투하고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이지만 위대한 사자의 꿈을 꿀 수 있는 산티아고의 모습을 좀 더 담담하고 굵게 그려내면 이적요가 그려지지 않을까 남몰래 상상하며 책장을 넘겼다. ‘노인’이라는 암시가, 그의 나이가, 아니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이적요의 열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그는 욕망이 거세된 달마 같은 사람이라야 옳았다. 이 모든 것을 비극이라 한다면, 비극의 시작은 휴화산처럼 자신의 열정과 갈망을 감쪽같이 숨긴 이적요의 놀라운 인내심에 있다. 그 은근한 갈망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온 데, 바로 은교가 있다.
이른 초봄, 깨끗한 새싹들이 풍겨내는 싱그러운 향기를 머금은 열일곱의 은교는 이적요에게 순백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이적요는 꿈틀대는 자신의 욕망을 감지하며 혹여 자신이 은교를 더럽힐까 노심초사한다. 순간순간 열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이적요의 욕망이 추하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그의 감정이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일흔의 시인은 스무 살 청년처럼 사랑을 시작한다. 게다가 그 사랑은 풋풋하고 어설프게 시작하는 첫사랑의 모습을 닮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한낱 치기어린 연애소설이란 말인가!
첨예한 대립각이 서 있다. 은교를 사이에 두고 스승 이적요와 제자 서지우는 자신들이 함께한 세월을 버릴 만큼 날카롭게 대립한다. 두 사람의 대립은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른다. 이적요의 욕망이 생명에의 갈구와 탐미를 향한 것이라면, 서지우의 욕망은 지극히 현실에 안주하는 듯 보인다. <은교>의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나약한 것은 바로 서지우다. 그는 허우대 좋은 몸을 지녔지만 그의 심성은 갈대보다도 약했다. 이적요의 강단도 은교의 용기도 그에게는 없었다. 이적요가 자신의 마음으로 눈으로 은교를 보듬을 때, 서지우는 몸으로 그녀를 탐한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칼날이 쨍 하고 부딪히는 순간이다. 비극 속 갈등의 최고봉은 역시 예기치 못한 살인이다. <은교>가 삼각관계의 연애 담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로 넘어가는 순간이다(이러니 책장을 덮을 수가 있어야지!)
이적요의 비밀일기는 자신의 탐욕과 갈망을 고백한 수기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적어 내려간 연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은교. 롤리타도 소녀도 아닌 그녀는 바로 살로메라 불리는 유디트다. 순백의 모습을 가졌지만 그녀의 손에 들리는 것은 사내의 목이다. 이 역시 운명인 것이다. 유디트가 될 수밖에 없는 순백의 은교,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책을 읽는 내내, 꼭 밤에 읽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조언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갈망과 욕망, 그리움과 사랑, 미움과 질투가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는 순간, 그때가 바로 <은교>를 읽을 적기이다.
오랜만에 만난 수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