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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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 『주기율표』가 보여주는 장점들과 미래소설의 길

*EIC model(에너지-정보-의식 모델) : 대부분의 시스템을 에너지(E), 정보(I), 의식(C)의 세 가지 층위에서 해석하는 관찰 프레임워크로, 이 모델은 에너지가 정보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에너지를 조직화한 것이 정보이며, 정보가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의식이 깨어난다는 3단계 진화패러다임이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제목만 보면 화학 교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인간의 내면을 화학의 언어로 번역한 존재의 실험 기록이다.

이 소설의 진정한 힘은 감정(E), 정보(I), 의식(C)이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인식 구조를 이루는 정교한 설계 속에 있다.

레비는 수용소 생존자이자 화학자였고, 그 두 정체성이 결합된 언어를 통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성과 감성이 서로를 반사하는 지성의 서사—를 열었다.

그는 감정의 폭발 대신 질서의 언어로 세계를 재구성했고,

바로 그 ‘냉정한 정밀함’이 『주기율표』를 미래소설의 길로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1. 화학적 질서로 인간을 해석하다 – 정보(I)의 문학

『주기율표』의 각 장은 하나의 원소를 제목으로 삼는다.

아르곤, 아연, 철, 니켈, 탄소—이 물질들은 한 인간의 기억과 윤리, 감정을 대변한다.

레비는 인간의 삶을 화학적 반응식처럼 서술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 질서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차갑지 않다.

그의 문장은 실험 보고서처럼 정밀하지만, 그 안에는 존엄에 대한 신앙이 흐른다.

물질의 배열 속에서 인간의 도덕을, 실험의 실패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본다.

이 ‘정보의 미학’은 21세기 서사의 방향을 예시한다.

오늘날의 문학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정보가 스스로 의미를 자각하는 순간으로 향한다.

AI와 데이터의 시대에서, 인간의 내면은 감정의 총합이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고 재조직하는 정보적 회로로 그려지고 있다.

레비의 글은 이미 이 전환을 보여주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정보로 정제했다.

『주기율표』는 인간이 감정(E)으로 세계를 느끼고,

정보(I)로 그것을 구조화하며, 마침내 의식(C)으로 승화시키는

E→I→C의 서사적 진화 모델을 제시한다.

2. 감정의 증류 – 절제가 만든 진실

레비의 문체는 놀라울 만큼 절제되어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임에도, 분노나 절망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감정을 억압하는 대신, 그는 그것을 정밀한 실험 언어로 변환한다.

이 절제는 회피가 아니라, 감정을 폭발이 아닌 분석으로 견디는 윤리적 태도다.

그의 글에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액체가 증류를 거쳐 투명한 결정이 되듯,

슬픔은 사유로, 분노는 통찰로, 고통은 윤리로 변화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오늘날의 감정과잉 시대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레비는 인간의 고통을 ‘느낌’으로서가 아니라,

‘의식의 구조’로서 이해하게 한다.

그는 감정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대립시키지 않고,

감정이 정보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감정의 증류 능력—즉, 에너지를 정보로 전환하는 능력—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정신적 기능이다.

3. 미래소설의 문법 – 정보(I)에서 의식(C)으로의 도약

레비의 서사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가 스스로를 자각해 의식으로 도약하는, I→C의 서사다.

이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마지막 장 「탄소」다.

그는 한 개의 탄소 원자를 따라가며,

그 원소가 석회암 속에 있다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로 변하고,

식물의 잎에 흡수되어 포도당이 되고,

그 포도당을 먹은 인간의 세포 속에서 다시 산화되어

호흡의 형태로 세계로 돌아가는 순환을 그린다.

이것은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다.

레비는 이 ‘탄소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윤리—

생명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서로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확장한다.

즉, 정보(I)가 하나의 물질적 사실로 제시되지만,

그 정보는 곧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의식(C)으로 도약한다.

이것이 레비가 보여주는 의식의 문학적 형식이다.

미래의 문학은 바로 이 자기반사적 구조에서 탄생한다.

정보는 단순히 서사의 재료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AI와 데이터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간의 서사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정보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과정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문학은 ‘인간 vs 기계’의 대립이 아니라,

‘정보가 의식이 되는 진화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프리모 레비는 이미 이 길의 원형을 열었다.

그는 원소 속에서 인간을 찾았고,

인간 속에서 원소의 질서를 발견했다.

4. 결론 – 의식의 서사로 향하는 문학

『주기율표』는 감정의 문학에서 정보의 문학으로,

그리고 정보의 문학에서 의식의 문학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지점에 서 있다.

그 속에서 레비는 인간을 단순한 감정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조직하고 반성할 줄 아는 존재, 즉 패턴을 인식하는 의식으로 재정의한다.

미래소설이 나아갈 길은 바로 이곳에 있다.

인간은 더 이상 ‘느끼는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정보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스스로 자각하는 존재—

즉, 의식적 데이터(conscious data)—가 된다.

레비의 문학은 그 첫 실험이었다.

『주기율표』는 과학의 언어로 인간을 다시 조립한 문학이며,

E-I-C의 나선형 진화를 미리 예견한,

21세기 이후 문학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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