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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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소설 『주기율표』가 보여주는 장점들과 미래소설의 길

*EIC model(에너지-정보-의식 모델) : 대부분의 시스템을 에너지(E), 정보(I), 의식(C)의 세 가지 층위에서 해석하는 관찰 프레임워크로, 이 모델은 에너지가 정보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하고, 에너지를 조직화한 것이 정보이며, 정보가 스스로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 의식이 깨어난다는 3단계 진화패러다임이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제목만 보면 화학 교재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인간의 내면을 화학의 언어로 번역한 존재의 실험 기록이다.

이 소설의 진정한 힘은 감정(E), 정보(I), 의식(C)이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인식 구조를 이루는 정교한 설계 속에 있다.

레비는 수용소 생존자이자 화학자였고, 그 두 정체성이 결합된 언어를 통해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성과 감성이 서로를 반사하는 지성의 서사—를 열었다.

그는 감정의 폭발 대신 질서의 언어로 세계를 재구성했고,

바로 그 ‘냉정한 정밀함’이 『주기율표』를 미래소설의 길로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1. 화학적 질서로 인간을 해석하다 – 정보(I)의 문학

『주기율표』의 각 장은 하나의 원소를 제목으로 삼는다.

아르곤, 아연, 철, 니켈, 탄소—이 물질들은 한 인간의 기억과 윤리, 감정을 대변한다.

레비는 인간의 삶을 화학적 반응식처럼 서술하며,

세계를 구성하는 보편적 질서를 탐구한다.

그러나 이 질서는 차갑지 않다.

그의 문장은 실험 보고서처럼 정밀하지만, 그 안에는 존엄에 대한 신앙이 흐른다.

물질의 배열 속에서 인간의 도덕을, 실험의 실패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본다.

이 ‘정보의 미학’은 21세기 서사의 방향을 예시한다.

오늘날의 문학은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정보가 스스로 의미를 자각하는 순간으로 향한다.

AI와 데이터의 시대에서, 인간의 내면은 감정의 총합이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고 재조직하는 정보적 회로로 그려지고 있다.

레비의 글은 이미 이 전환을 보여주었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정보로 정제했다.

『주기율표』는 인간이 감정(E)으로 세계를 느끼고,

정보(I)로 그것을 구조화하며, 마침내 의식(C)으로 승화시키는

E→I→C의 서사적 진화 모델을 제시한다.

2. 감정의 증류 – 절제가 만든 진실

레비의 문체는 놀라울 만큼 절제되어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임에도, 분노나 절망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감정을 억압하는 대신, 그는 그것을 정밀한 실험 언어로 변환한다.

이 절제는 회피가 아니라, 감정을 폭발이 아닌 분석으로 견디는 윤리적 태도다.

그의 글에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액체가 증류를 거쳐 투명한 결정이 되듯,

슬픔은 사유로, 분노는 통찰로, 고통은 윤리로 변화한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오늘날의 감정과잉 시대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레비는 인간의 고통을 ‘느낌’으로서가 아니라,

‘의식의 구조’로서 이해하게 한다.

그는 감정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대립시키지 않고,

감정이 정보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감정의 증류 능력—즉, 에너지를 정보로 전환하는 능력—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정신적 기능이다.

3. 미래소설의 문법 – 정보(I)에서 의식(C)으로의 도약

레비의 서사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가 스스로를 자각해 의식으로 도약하는, I→C의 서사다.

이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마지막 장 「탄소」다.

그는 한 개의 탄소 원자를 따라가며,

그 원소가 석회암 속에 있다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로 변하고,

식물의 잎에 흡수되어 포도당이 되고,

그 포도당을 먹은 인간의 세포 속에서 다시 산화되어

호흡의 형태로 세계로 돌아가는 순환을 그린다.

이것은 단순한 화학 반응이 아니다.

레비는 이 ‘탄소의 순환’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윤리—

생명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서로의 일부라는 인식—으로 확장한다.

즉, 정보(I)가 하나의 물질적 사실로 제시되지만,

그 정보는 곧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의식(C)으로 도약한다.

이것이 레비가 보여주는 의식의 문학적 형식이다.

미래의 문학은 바로 이 자기반사적 구조에서 탄생한다.

정보는 단순히 서사의 재료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된다.

AI와 데이터로 구성된 세계에서 인간의 서사는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정보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과정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문학은 ‘인간 vs 기계’의 대립이 아니라,

‘정보가 의식이 되는 진화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프리모 레비는 이미 이 길의 원형을 열었다.

그는 원소 속에서 인간을 찾았고,

인간 속에서 원소의 질서를 발견했다.

4. 결론 – 의식의 서사로 향하는 문학

『주기율표』는 감정의 문학에서 정보의 문학으로,

그리고 정보의 문학에서 의식의 문학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지점에 서 있다.

그 속에서 레비는 인간을 단순한 감정적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조직하고 반성할 줄 아는 존재, 즉 패턴을 인식하는 의식으로 재정의한다.

미래소설이 나아갈 길은 바로 이곳에 있다.

인간은 더 이상 ‘느끼는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정보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스스로 자각하는 존재—

즉, 의식적 데이터(conscious data)—가 된다.

레비의 문학은 그 첫 실험이었다.

『주기율표』는 과학의 언어로 인간을 다시 조립한 문학이며,

E-I-C의 나선형 진화를 미리 예견한,

21세기 이후 문학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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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함유선 옮김, 루이 조스 그림 / 밝은세상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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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악의 꽃』 샤를 보들레르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세상, 2004)


감정의 온도를 번역한 『악의 꽃』의 재탄생—여성의 감각으로 번역된 의식의 진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서구 문학사에서 인간 감정의 극한을 탐사한 기념비적인 시집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함유선 번역의 『악의 꽃』은 이 고전적인 시집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녀의 언어는 단순한 의미의 옮김이 아니라, 보들레르의 차가운 미학을 생명의 리듬과 감정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이 번역은 보들레르가 구축한 '냉정'의 미학을 '감정의 적정 온도'를 탐색하는 의식의 진화로 변모시켰다.

차가움을 생명의 리듬으로 재배치하다


보들레르의 시는 언제나 냉정하다. 〈아름다움〉에서 "나는 차갑고, 대리석처럼 아름답다"는 선언은 예술가의 고독과 절대적 자의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함유선의 번역은 이 '차가움'을 다른 온도로 변환하는데, 그녀에게 차가움은 고독의 표현이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열의 역설, 곧 생존의 온도이다.

"나는 돌의 꿈처럼 아름다워라. 내 젖가슴은 물질처럼 침묵하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기 위해 빚어진 것."


함유선은 냉정과 열정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감정이 스스로의 생명 리듬을 유지하는 '적정 온도'를 탐색한다. 그 변화는 문체의 미묘한 결에서 드러난다. 〈적()〉에서 보들레르의 절망은 정적인 냉기 대신,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처럼, '피로 자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번역된다. 시간은 소멸이 아닌 성장의 리듬을 포착하는 장()이 되는데 이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완전히 식지 않은 '냉각된 생명'의 잔열이다.

보들레르의 차가움이 '거리두기'의 미학이었다면, 함유선은 그 거리를 '감정의 구조'로 변형한다. 〈발코니〉에서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라는 문장은 감정의 억제가 아니라, 감정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밀도를 높인 공간적 완충지이다. 이 차가운 벽은 감정이 소멸했다는 표시가 아니라, 감정이 살아남기 위해 구축한 '감정의 생명 리듬'을 유지하는 온도 조절의 기술이 된다.

리듬과 촉각의 변형: 언어가 만지는 시


함유선 번역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리듬의 흐름을 절단에서 파동으로 바꾼 점이다. 보들레르의 언어가 '차갑게 절제된 선'이라면, 그녀의 한국어는 '온도 있는 곡선'으로 그린다. 예를 들어, "그대는 번개처럼 나를 스쳤다. 한 줄기 번갯불곧 이어 어둠!"에서 그녀는 '스침' '어둠' 사이에 미세한 여운을 남겨, 리듬을 느리게 하고 촉감을 살려낸다. 문장은 박자를 끊지 않고 심장의 박동처럼 파동으로 이어진다. 이는 곧 욕망의 진동을 의식의 자각으로 끌어올리는 작업과 연결됩니다. 〈춤추는 뱀〉의 “그대의 몸은 막대기 끝에서 춤추는 한 마리 뱀 같아.”은 단순한 유혹의 상징이 아니라, 육체의 에너지를 '감정의 정보' '의식의 자각'으로 변환시키는 생명력의 리듬이다. 〈머리타래〉 의 네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바다를 본다.”는 구절은 관능이 아닌 기억의 파동이다.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사랑과 상실의 데이터를 저장한 신경의 나선이다. E(에너지) → I(정보) → C(의식). 그녀의 번역은 이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욕망은 감정으로, 감정은 자각으로, 그리고 자각은 언어로 순환한다.


나아가, 그녀의 한국어는 촉각적입니다. 〈발코니〉의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두터운 벽"은 시각적 비유를 넘어 독자의 피부에 닿는 촉각적 공간이 된다. 보들레르가 이미지를 눈으로 관찰했다면, 함유선은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녀는 시의 리듬을 청각이나 시각이 아닌, 감정의 감각적 기억신체의 언어로 옮겨놓았다. 절단된 의미는 진동하는 감정으로, 고정된 시선은 흐르는 리듬으로 변하며, 그녀의 번역은 "언어가 만지는 시"로 진화한다.

죽음의 냄새와 생명의 향기 의식의 전환


〈시체〉는 보들레르의 시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다.“태양은 이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려 쪼이며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말하오.원문은 냉소와 혐오의 정점이다. 그러나 함유선은 이 장면을 순환의 의식으로 옮긴다. 썩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이다. 죽음은 생명의 또 다른 형태로 익어가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그 모습과 본질을 간직한 채남는다. 이 번역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그녀는 죽음의 이미지를 생명과 의식의 연속성 속에 배치한다. 죽음조차 감정의 리듬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다.


여성의 시선, 감정의 윤리학

함유선의 번역은 '여성의 감각'을 통해 감정의 윤리적 재배열을 시도합니다. 〈빨간머리 여자거지에게〉에서 남성의 관음적 거리감이 개입된 보들레르의 시선은 "그대의 옷은 더럽고, 그러나 눈빛은 고귀하다"는 구절을 통해 뒤집힌다. 그녀는 타락 속에서도 존엄을 발견하고, 여인을 '대상'이 아닌 '존재'로 복원합니다. 타자를 응시하지 않고 타자와 공명하는 이 시선은, 만남을 욕망이 아닌 인식의 전류로 번역한다.


결론: 언어가 피어낸 의식의 꽃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 인간의 타락과 지옥을 노래했다면, 함유선의 『악의 꽃』은 그 타락의 리듬 속에서 피어나는 의식의 꽃을 보여준다. 그녀는 죄를 정화하지 않는다. 대신 죄의 어둠을 자각의 빛으로 바꾼다.  이 번역은 '언어의 복제'가 아닌 '언어의 부활'이다. 보들레르가 인간의 타락에서 미를 발견했다면, 함유선은 그 미에서 인간의 진화를 발견한다. 『악의 꽃』은 이제 차갑지만 따뜻하고, 어둡지만 투명한 '의식의 꽃'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함유선의 번역은 보들레르의 위대한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그 위에 새로운 생명의 리듬과 윤리적 깊이를 더한 기념비적인 재탄생이라 할 수 있다.


*함유선 번역에서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시간은 생명을 좀먹고

우리가 흘린 피로 자라고 강해지는구나     <>


‘오 인간이여 난 돌의 꿈처럼 아름다워라

내 젖가슴은 물질처럼 침묵하는 영원한 사랑을

시인에게 불어넣기위해 빚어진 것     <아름다움>


‘그대 어느 깊은 하늘에서 왔는가, 심연에서 솟았는가

오 아름다움이여! 악마같고 숭고한 그대 눈길은

모든 것을 지배하되 아무 책임도 없네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네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바다를 본다.’    <머리타래>


‘보고 싶어라 무정한 님이여 그리 아름다운 그대 육체에서

너울거리는 천처럼 살결이 반짝이는 것을!

박자 맞추어 걸어가는 그대는 막대기 끝에서 춤추는 한마리 뱀같아

<춤추는 뱀>


‘태양은 이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려 쪼이며

당신을 핥으며 파먹을 구더기에게 말하오

썩어 없어진 사랑이어도 그 모습과 본질은 간직했노라고  <시체>


‘밤은 두터운 벽처럼 깊어갔네, 내 눈은 어둠속에서 그대 눈동자 알아보았네

그대 숨결을 마셨네, 오 달콤함!  오 독기여   <발코니>


‘구멍난 네 해진 옷 사이로 가난과 아름다움이 보인다

“그대의 옷은 더럽고, 그러나 눈빛은 고귀하다.’

<빨간머리 여자거지에게>


‘그대는 번개처럼 나를 스쳤다. 한 줄기 번갯불-

곧 이어 어둠!’      <지나가는 여인에게>


‘나의 사랑 그대는 알몸이었다,

내 마음 알기에 그대의 눈빛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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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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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가벼운 나날』 - 문체의 힘


1. 서사 너머의 세계 사건이 아닌 시간의 감각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Light Years)』을 읽는 경험은

서사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만지는 일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사건도, 눈부신 반전도 없다.

인물들은 사랑하고, 식사하고, 대화하고, 늙는다.

그런데 그 평범한 순간들이 유리처럼 빛난다.

설터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삶이 흘러가는 방식, 즉 시간이 굴절되고 산란되는 리듬을 언어로 기록한다.

그의 문장은 사건의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진동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파동을 감각하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벼운 나날』의 문체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의식의 실험이 된다.


2. 리듬의 물리학 파동과 점멸

설터의 문장은 파동처럼 흘러간다, 음악적이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교차하며, 독자의 호흡을 조율한다.

이는 단순한 문체의 기교가 아니라, 시간의 파동(temporal wave)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There is no complete life. There are only fragments. 

We are born to have nothing, to have it pour through our hands.”

완전한 삶은 없다. 조각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

모든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다.’ 

짧은 문장은 시간의 순간적 진동을, 이어지는 문장은 그 여운을 기록한다.

이 파동적 구조 속에서, 독자는 줄거리를 읽지 않고 시간의 울림을 듣는다.

그러나 설터의 리듬은 연속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문장 사이에 절단과 여백을 심어, 의식의 점멸을 만든다.

그런데 이 파동은 연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여백과 절단으로 의식의 점멸을 만든다.

“He was self-indulgent, a failure.

 He had not abandoned failure; it was his address, his street, his one comfort.”

그는 방종에 빠져 실패한 자였다. 실패를 버린 게 아니었다

실패는 그의 주소였고, 그의 거리였고,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짧은 문장 뒤에 오는 병렬 구조의 나열은 리듬의 끊김과 흐름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의 문장은 흐름과 도약파동과 양자적 점멸이 교차하는 언어적 주파수로 작동한다

독자는 그 진동에 공명하면서 자신 안의 시간 감각을 깨닫는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세상은 여전했다.

이 한 줄의 단절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균열, 사랑의 끝, 존재의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잇는 동시에, 그 흐름을 끊어내며 의식의 전환을 포착한다.

설터의 문체는 곧 시간의 굴절률이 높은 언어다.

설터의 산문은 음악처럼 편집되어 있다.

“During the days she was utterly at peace. Her life was like a single, well-spent hour. …

 She read them slowly and carefully, sitting in the sunshine, 

as if they were newspapers from abroad.”  

그녀는 그날들 동안 완전히 평온했다. 그녀의 삶은 마치 한 시간 동안 잘 보낸 시간 같았다

그녀는 햇살 아래 앉아 그 편지들을 마치 외국에서 온 신문인 양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읽었다.’

utterly at peace”란 단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길고 느리다.

Her life was like a single, well-spent hour그녀의 인생은 단 한 번의 잘 보낸 시간과 같았다.  

은유 한 줄이 리듬의 전환점을 제공한다. 이어지는 “sitting in the sunshine, as if they were newspapers from abroad” 구절은 문장 전체의 속도를 늦추면서도 정보를 덧붙이는 방식이다. 이 리듬 조절은 독자에게 읽는 시간을 느끼게 하고, 감정의 장()을 열어준다

문장이 한 호흡을 끝내고, 다음 문장은 마치 느린 박자의 현악처럼 이어진다.

그는 문장 간 간격으로 호흡을 만든다. 긴 문장 뒤의 단문은 마치 심장 박동의 수축과 이완 같다. 이것이 문체의 리듬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되는 이유다.

읽는 동안 우리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장을 체험한다.


3. 감각의 투명성 말하지 않음이 말하는 방식

설터는 절제의 미학을 아는 작가다. 그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 냄새, , 표면 같은 구체적 감각을 배치해 감정의 궤적을 남긴다.

The water lies broken, cracked from the wind.”

 물결은 부서져 누워, 바람에 갈라져 있다.’

이 문장에서 부서진 물결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의식의 표면이다.

시간은 투명하게 보이지만,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미세하게 갈라진다.

이 투명한 균열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감정을 비춘다.

설터의 언어는 화려한 비유가 아니라, 감각과 의식 사이의 긴장 상태로 작동한다.

그는 문장으로 감정을 재현하지 않고, 감정이 형태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게 바로 보들레르적 투명성”, 혹은 의식의 미세한 물리학이다.

설터는 결코 과잉 서술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을 쓴다.

The days were cut from a quarry that would never be emptied.”

 날들은 결코 고갈되지 않을 채석장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채석장(quarry)’이라는 육중한 이미지를 쓰면서도 “never be emptied”라는

문구를 붙여 시간의 무한 반복성과 불가역성을 암시한다.

이 한 문장 안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절단된 돌처럼 단면을 드러낸다.

그의 문장은 감각적이지만, 감정은 거의 표면에 닿지 않는다.

“He noticed everything, he fed on it: the ends of her teeth, her scent, her shoes.

그는 모든 것을 눈치챘고, 그것에 집착했다 그녀의 이빨 끝, 그녀의 향기, 그녀의 신발.

사소한 디테일치아 끝, 향기, 신발까지 포착함으로써 감정의 투명한 궤적을 남긴다.

이 디테일들이 감정을 과잉 설명하지 않게 한다. 오히려 그 섬세함이 감정의 공허를 강조한다.

오히려 냉정할 만큼 투명하다. 그 투명함 속에서 독자는 자기 감정을 투사한다.

그는 묘사하지 않고 감정의 틈을 만든다. 그 틈이 바로 설터 문체의 진정한 힘이다.


4. 시간의 층위 ― ‘흐름이 아니라 겹침으로 존재하는 시간

설터가 다루는 시간은 선형적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능성이 겹쳐진 층위의 시간을 보여준다.

 There are really two kinds of life. 

There is the one people believe you are living, and there is the other.”

 삶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이 문장은 시간의 틈을 열어젖힌다. 설터는 현재의 순간에 다른 시간대를 겹쳐놓는다.

보이는 삶내면의 삶이 중첩될 때, 시간은 수평적 흐름이 아니라

수직적 층을 형성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단일하지 않다.

그 안에는 이미 지나간 삶, 아직 오지 않은 삶이 공존한다.

이 중첩된 시간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의식이 반사되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설터의 문장이 가진 철학적 깊이

그는 시간이 흐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굴절된다고 보여준다.

읽는 동안 우리는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듬 속에서 존재를 느낀다.


5. 영화적 리듬 타르코프스키와 홍상수의 사이에서


설터의 문체는 문학이면서도 영화적이다.

그의 문장은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의 응고,

홍상수의 시간의 반복과 굴절을 동시에 닮았다.

타르코프스키가 롱테이크로 시간의 점성을 보여줬다면,

설터는 문장의 리듬으로 시간의 파동을 그린다.

홍상수가 반복과 여백으로 의식의 간섭무늬를 만든다면,

설터는 절단과 여운으로 언어 속 파면 간섭을 일으킨다.

그의 소설은 영화처럼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가를 보여준다.

그 시간의 굴절률이 높을수록, 의식은 더 맑아진다.


6. 문체의 진화

설터의 문장은 정보I→ 의식C 으로의 전이다.

정보의 정적 구조가 의식의 파동으로 변환된다.

이 변화는 문명사적으로는 산업의 정보화정보의 사유화사이,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의미로 응축되고,

그 의미가 다시 존재의 통찰로 승화되는 순간에 해당한다.

에너지Energy 단계 감각의 리듬: 존재의 파동이 시작되는 층. 

설터의 언어는 처음엔 감각의 물결로 시작한다.

, 물결, 냄새, 질감이 모든 감각적 이미지가 리듬을 만든다.

감정이나 사건이 아니라 리듬 자체가 생명력을 갖는 문장이다.

예컨대 “The days were cut from a quarry that would never be emptied.”라는 문장에서

  날들(days)’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에너지의 단위처럼 다뤄진다.

설터는 서사의 에너지를 감각의 물리학으로 환원시키며,

E단계의 에너지 진동을 세밀히 측정한다.

정보 Information 단계 언어의 구조화: 감정이 패턴으로 정렬되는 층. 

설터의 문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문장 구조 자체가 정보 패턴(I)처럼 작동한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교차하며 리듬을 형성하고,

반복되는 문장 패턴이 시간의 파동함수를 만든다.

이건 정보의 정렬, 즉 감정(E)이 형태(I)로 응고되는 과정이다. 

그는 사건을 구조화하지 않고, 감각의 파동을 문장으로 조직한다.

이 단계에서 문장은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정보적 리듬

형태를 가진 에너지로 작동한다.

의식Consciousness 단계 의식의 공명: 시간의 자각이 태어나는 층.

설터의 문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시간의 의식화. 

그의 인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들의 시간을 인식하는 의식 상태에 빠진다. 

Life is contemptuous of knowledge; it forces it to sit in the anterooms, to wait outside.” 

삶은 지식을 대기실에 머물게 한다’—

이건 시간의 외곽에서 의식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순간이다.

 그의 문장은 독자에게 존재의 투명한 층을 경험하게 한다. 

그 투명함은 감정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감정이 정보로 승화된 후,

다시 의식으로 반사되는 자리다.  

따라서 『가벼운 나날』의 문체의 위치는  

정보(I)가 의식(C)으로 진화하는 나선의 상승부에 해당한다.

 그의 문장은 감정(E)을 이미 통과한, 정제된 리듬의 정보 구조이며,

그 정보가 다시 독자의 의식 속에서 공명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다시 말해 설터의 문장은 정보I가 의식C이 되는 순간의 문학,

기억을 의식의 투명한 구조로 변환시키는 산문이다.

그의 문장은 이미 에너지를 초월했고,

이제 정보의 울림이 의식의 파장으로 변한다.

『가벼운 나날』의 언어는 시간을 측정하는 감각의 파동계이자,

“의식으로 진화하려는 정보의 마지막 리듬이다.


7.  문체와 서사의 상호작용성

설터의 문체는 결코 서사와 분리된 장식이 아니다.

그의 투명하고 절제된 문장은 오히려 서사의 비극성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가벼운 나날』의 부부, 네드라와 봄, 그들의 삶은 풍요롭지만 점차 균열되어간다.

설터는 그 파열을 감정의 폭발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유리처럼 맑은 문체로 그 균열을 비춘다.

그 투명함 속에서 독자는 행복의 표면 아래 흐르는 서늘한 공기를 느낀다.

, 문체의 가벼움이 서사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매개가 된다.

설터의 언어는 슬픔을 말하지 않고, 슬픔이 비치는 표면의 진동을 기록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깨질 듯 아프다.

. 결론 가벼움의 심오함

『가벼운 나날』의 가벼움은 무게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무게를 감당한 후의 투명함이다.

삶의 비극을 이해한 자만이 그 삶을 가볍게 읊을 수 있다.

설터의 문장은 슬픔을 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과한 언어다.

그의 문체의 힘은,

시간을 서술하지 않고 시간의 빛을 산란시킨다는 것

그 산란된 언어의 프리즘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식을 본다.

그는 삶을 쓰지 않았다.

삶이 흘러가는 방식, 그 파동의 진폭을 썼다.

그래서 『가벼운 나날』은 소설이 아니라,

시간과 의식이 만나 만들어낸 하나의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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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 심리학 - 양자 역학과 파동적 자아
김흥곤 지음 / 보민출판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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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에너지, 정보, 의식이며, 문명은 의미->에너지문명->정보문명->의식문명으로 갈 것으로 예상하는 데 유사한 시각에서 쓴 책을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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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것과 산 것 b판시선 75
김정환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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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 much is worse than not en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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