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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소설 『가벼운 나날』 - 문체의 힘
1. 서사 너머의 세계 ― 사건이
아닌 시간의 감각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Light Years)』을 읽는 경험은
서사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결을 만지는 일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사건도, 눈부신 반전도 없다.
인물들은 사랑하고, 식사하고, 대화하고, 늙는다.
그런데 그 평범한 순간들이 유리처럼 빛난다.
설터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삶이 흘러가는 방식, 즉 시간이 굴절되고 산란되는 리듬을 언어로
기록한다.
그의 문장은 사건의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진동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간의 파동을 감각하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가벼운 나날』의 문체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의식의
실험이 된다.
2. 리듬의 물리학 ― 파동과
점멸
설터의 문장은 파동처럼 흘러간다, 음악적이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교차하며, 독자의 호흡을 조율한다.
이는 단순한 문체의 기교가 아니라, 시간의 파동(temporal wave)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There is no complete life. There are only fragments.
We are born to
have nothing, to have it pour through our hands.”
‘완전한 삶은 없다. 조각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나,
모든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다.’
짧은 문장은 시간의 순간적 진동을, 이어지는 문장은 그 여운을 기록한다.
이 파동적 구조 속에서, 독자는 줄거리를 읽지 않고 시간의 울림을
듣는다.
그러나 설터의 리듬은 연속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문장 사이에 절단과 여백을 심어, 의식의 점멸을 만든다.
그런데 이 파동은 연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여백과 절단으로
‘의식의 점멸’을 만든다.
“He was self-indulgent, a failure.
He had not
abandoned failure; it was his address, his street, his one comfort.”
‘그는 방종에 빠져 실패한 자였다.
실패를 버린 게 아니었다.
실패는 그의 주소였고, 그의
거리였고,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짧은 문장 뒤에 오는 병렬 구조의 나열은 리듬의 끊김과 흐름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그의 문장은 흐름과 도약—파동과 양자적 점멸—이 교차하는 언어적 주파수로 작동한다.
독자는 그 진동에 공명하면서
자신 안의 시간 감각을 깨닫는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세상은
여전했다.”
이 한 줄의 단절 속에서 우리는 관계의 균열, 사랑의 끝, 존재의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잇는 동시에, 그 흐름을 끊어내며 의식의 전환을 포착한다.
설터의 문체는 곧 시간의 굴절률이 높은 언어다.
설터의 산문은 음악처럼 편집되어 있다.
“During the days she
was utterly at peace. Her life was like a single, well-spent hour. …
She read
them slowly and carefully, sitting in the sunshine,
as if they were newspapers
from abroad.”
‘그녀는 그날들 동안 완전히 평온했다. 그녀의 삶은 마치 한 시간
동안 잘 보낸 시간 같았다.
그녀는 햇살 아래 앉아 그 편지들을 마치 외국에서 온 신문인 양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읽었다.’
“utterly at peace”란 단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길고 느리다.
“Her life was
like a single, well-spent hour” 그녀의
인생은 단 한 번의 잘 보낸 시간과 같았다.
은유 한 줄이 리듬의 전환점을 제공한다. 이어지는 “sitting in the sunshine, as if they were newspapers from abroad” 구절은
문장 전체의 속도를 늦추면서도 정보를 덧붙이는 방식이다. 이 리듬 조절은 독자에게 ‘읽는 시간’을 느끼게 하고, 감정의
장(場)을 열어준다.
문장이
한 호흡을 끝내고, 다음 문장은 마치 느린 박자의 현악처럼 이어진다.
그는 문장 간 간격으로 호흡을 만든다. 긴 문장 뒤의 단문은 마치
심장 박동의 수축과 이완 같다. 이것이 ‘문체의 리듬’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되는 이유다.
읽는 동안 우리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파장을 체험한다.
3. 감각의 투명성 ― 말하지
않음이 말하는 방식
설터는 절제의 미학을 아는 작가다. 그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 냄새, 빛, 표면 같은 구체적 감각을 배치해 감정의 궤적을 남긴다.
“The water lies
broken, cracked from the wind.”
’물결은 부서져 누워, 바람에
갈라져 있다.’
이 문장에서 ‘부서진 물결’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의식의 표면이다.
시간은 투명하게 보이지만,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미세하게
갈라진다.
이 투명한 균열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감정을 비춘다.
설터의 언어는 화려한 비유가 아니라, 감각과 의식 사이의 긴장 상태로
작동한다.
그는 문장으로 감정을 재현하지 않고, 감정이 형태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게 바로 “보들레르적 투명성”, 혹은 의식의 미세한 물리학이다.
설터는 결코 과잉 서술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을 쓴다.
“The days were cut
from a quarry that would never be emptied.”
‘날들은 결코 고갈되지
않을 채석장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채석장(quarry)’이라는 육중한 이미지를 쓰면서도 “never be emptied”라는
문구를 붙여 시간의 무한 반복성과 불가역성을 암시한다.
이 한 문장 안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절단된 돌처럼 단면을
드러낸다.
그의 문장은 감각적이지만, 감정은 거의 표면에 닿지 않는다.
“He noticed
everything, he fed on it: the ends of her teeth, her scent, her shoes.”
그는 모든 것을 눈치챘고, 그것에 집착했다” 그녀의 이빨 끝, 그녀의 향기, 그녀의 신발.
사소한 디테일—치아 끝, 향기, 신발—까지 포착함으로써 감정의 투명한 궤적을 남긴다.
이 디테일들이 감정을 과잉 설명하지 않게 한다. 오히려 그 섬세함이
감정의 공허를 강조한다.
오히려 냉정할 만큼 투명하다. 그 투명함 속에서 독자는 자기 감정을
투사한다.
그는 묘사하지 않고 감정의 틈을 만든다. 그 틈이 바로 설터 문체의
진정한 힘이다.
4. 시간의 층위 ― ‘흐름’이 아니라 ‘겹침’으로
존재하는 시간
설터가 다루는 시간은 선형적이 아니다.
그의 문장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가능성이 겹쳐진 층위의 시간을 보여준다.
“There are really two kinds of life.
There is the one people believe
you are living, and there is the other.”
‘삶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이 문장은 시간의 틈을 열어젖힌다. 설터는 현재의 순간에 다른 시간대를
겹쳐놓는다.
‘보이는 삶’과 ‘내면의 삶’이 중첩될 때, 시간은
수평적 흐름이 아니라
수직적 층을 형성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단일하지 않다.
그 안에는 이미 지나간 삶, 아직 오지 않은 삶이 공존한다.
이 중첩된 시간 속에서 독자는 자신의 의식이 반사되는 순간을 마주한다.
이것이 바로 설터의 문장이 가진 철학적 깊이—
그는 ‘시간이 흐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시간이 굴절된다’고
보여준다.
읽는 동안 우리는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듬 속에서 ‘존재’를 느낀다.
5. 영화적 리듬 ― 타르코프스키와
홍상수의 사이에서
설터의 문체는 문학이면서도 영화적이다.
그의 문장은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의 응고,
홍상수의 시간의 반복과 굴절을 동시에 닮았다.
타르코프스키가 롱테이크로 ‘시간의 점성’을 보여줬다면,
설터는 문장의 리듬으로 ‘시간의 파동’을 그린다.
홍상수가 반복과 여백으로 의식의 간섭무늬를 만든다면,
설터는 절단과 여운으로 언어 속 파면 간섭을 일으킨다.
그의 소설은 영화처럼 “무언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가”를 보여준다.
그 시간의 굴절률이 높을수록, 의식은 더 맑아진다.
6. 문체의 진화
설터의 문장은 “정보I→ 의식C 으로의 전이다.
즉 정보의 정적 구조가 의식의 파동으로 변환된다.
이 변화는 문명사적으로는 ‘산업의 정보화’와 ‘정보의 사유화’ 사이,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감정이 의미로 응축되고,
그 의미가 다시 존재의 통찰로 승화되는 순간’에 해당한다.
에너지Energy 단계 – 감각의 리듬: 존재의 파동이 시작되는 층.
설터의 언어는 처음엔 감각의 물결로 시작한다.
빛, 물결, 냄새, 질감—이 모든 감각적 이미지가 리듬을 만든다.
감정이나 사건이 아니라 리듬 자체가 생명력을 갖는 문장이다.
예컨대 “The days were cut from a quarry that
would never be emptied.”라는 문장에서
‘날들(days)’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에너지의 단위처럼 다뤄진다.
설터는 서사의 에너지를 ‘감각의 물리학’으로 환원시키며,
E단계의 에너지 진동을 세밀히 측정한다.
정보 Information 단계 – 언어의 구조화: 감정이 패턴으로 정렬되는 층.
설터의 문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문장 구조 자체가 정보 패턴(I)처럼 작동한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교차하며 리듬을 형성하고,
반복되는 문장 패턴이 시간의 파동함수를 만든다.
이건 정보의 정렬, 즉 감정(E)이
형태(I)로 응고되는 과정이다.
그는 사건을 구조화하지 않고, 감각의 파동을 문장으로 조직한다.
이 단계에서 문장은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정보적 리듬—
즉 ‘형태를 가진 에너지’로
작동한다.
의식Consciousness 단계 – 의식의 공명: 시간의 자각이 태어나는 층.
설터의 문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시간의 의식화’다.
그의 인물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독자는 그들의 시간을 인식하는 의식 상태에 빠진다.
“Life is contemptuous of knowledge; it
forces it to sit in the anterooms, to wait outside.”
‘삶은 지식을 대기실에 머물게 한다’—
이건 시간의 외곽에서 의식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순간이다.
그의
문장은 독자에게 존재의 투명한 층을 경험하게 한다.
그 투명함은 감정이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감정이 정보로 승화된 후,
다시 의식으로 반사되는 자리다.
따라서 『가벼운 나날』의 문체의 위치는
즉 정보(I)가
의식(C)으로 진화하는 나선의 상승부에 해당한다.
그의
문장은 감정(E)을 이미 통과한, 정제된 리듬의 정보 구조이며,
그 정보가 다시 독자의 의식 속에서 공명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다시 말해 설터의 문장은 “정보I가
의식C이 되는 순간의 문학,
기억을 의식의 투명한 구조로 변환시키는 산문이다.
그의 문장은 이미 에너지를 초월했고,
이제 정보의 울림이 의식의 파장으로 변한다.
『가벼운 나날』의 언어는 “시간을 측정하는 감각의 파동계”이자,
“의식으로 진화하려는 정보의 마지막 리듬”이다.
7. 문체와 서사의 상호작용성
설터의 문체는 결코 서사와 분리된 장식이 아니다.
그의 투명하고 절제된 문장은 오히려 서사의 비극성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가벼운 나날』의 부부, 네드라와 봄, 그들의 삶은 풍요롭지만 점차 균열되어간다.
설터는 그 파열을 감정의 폭발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유리처럼 맑은 문체로 그 균열을 비춘다.
그 투명함 속에서 독자는 “행복의 표면 아래 흐르는 서늘한 공기”를 느낀다.
즉, 문체의 가벼움이 서사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투명한 매개가 된다.
설터의 언어는 슬픔을 말하지 않고, 슬픔이 비치는 ‘표면의 진동’을 기록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언제나 깨질 듯 아프다.
Ⅶ. 결론 ― 가벼움의
심오함
『가벼운 나날』의 ‘가벼움’은
무게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무게를 감당한 후의 투명함이다.
삶의 비극을 이해한 자만이 그 삶을 가볍게 읊을 수 있다.
설터의 문장은 슬픔을 말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과한 언어다.
그의 문체의 힘은,
시간을 서술하지 않고 시간의 빛을 산란시킨다는 것—
그 산란된 언어의 프리즘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의식을 본다.
그는 삶을 쓰지 않았다.
삶이 흘러가는 방식, 그
파동의 진폭을 썼다.
그래서 『가벼운 나날』은 소설이 아니라,
시간과 의식이 만나 만들어낸 하나의 리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