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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실망시킨 적이 없던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의 신작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책을 처음 봤을 때, 생각보다 책이 얇고 삽화가 많아서 동화인가 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역시 작가님이 노년의 어떠함을 참 잘그린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이 책은 치매가 오는 할아버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받은 아들과 할아버지가 좋은 순수한 손자의 이야기이다. 나는 치매를 이렇게 감동적이고 로맨스적이게 그릴 수 있었구나 놀라고 말았다. 내용은 주로 할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지. 노인은 손자를 보며 생각한다. 세상을 알 만큼 컸지만 거기에 편입되기를 거부할 만큼 젊은 나이. ㅡ10

"노아한테 뭐라고 설명하지? 내가 죽기도 전어 그 아이를 떠나야 한다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하지?" ㅡ31
"여기는 내 머릿속이란다, 노아노아. 그런데 하룻밤 새 또 전보다 ."ㅡ43
아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숫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숫자가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빠와 아이는 한 번도 서로의 눈을 쳐다본 적이 없다. ㅡ46
"사실은 잘 몰라. 뇌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거든. 지금은 희미해져가는 별과 비슷하단다. 내가 거기에 대해서 가르쳐줬던 거 기억하지?"......할아버지의 턱이 떨린다. 할아버지는 우주의나이가 130억 년이 넘는다고 노아에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늘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우주를 쳐다보느라 바빠서 설거지를 할 시간도 없다이거죠." 할머니는 노아에게 가끔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바쁘게 놓치면서 사는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노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ㅡ67
"머리가 빛을 잃어가더라도 몸은 한참 뒤에서야 알아차리지. 인간의 몸은 어마어마하게 부지런하단다. 수학의 걸작이라 마지막 빛이 꺼지기 직전까지 계속 일을 하거든. 인간의 두뇌는 가장 무한한 방정식이라 이 방정식을 해결하면 달에 갔을 때보다 훨씬 엄청난 능력이 우리 인류에게 생길거야. 우주에 인간보다 더 엄청난 수수께끼는 없거든. 할아버지가 실패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는지 기억하니?" "한 번 더 시도해보지 않는 게 유일한 실패라고요." "그렇지, 노아노아야, 그렇지. 위대한 사상은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법이란다."ㅡ69
수학을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머릿속 세계가 매일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현실이, 그리고 그걸 아직 어린 손자에게 설명하기가 두렵다. 이 책은 주로 대화체로 쓰여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인 노아의 대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대화.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의 대화는 할아버지의 철학적임과 손자의 상상력의 세계의 결합같다.

"그렇죠? 저는 어른이 아니라 노인이 되고 싶어요. 어른들은 화만 내고, 웃는 건 어린애랑 노인들뿐이잖아요."ㅡ72
노아도 기억한다. 아빠가 저녁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데리러 오면 할머니는 작별인사를 못 하게 했다. "하지마라, 노아야. 내 앞에서 그 소리는 하지 마! 네가 떠나면 이 할미가 늙잖니. 내 얼굴에 새겨진 모든 주름이 너의 작별인사야."ㅡ75
"저는 작별인사를 잘 못해요."
아이가 말한다. 할어버지는 이를 훤히 드러내며 미소를 짓는다. "연습할 기회가 많을 거다. 잘하게 될 거야. 네 주변의 어른들은 대부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후회하고 있다고 보면 돼.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작별인사를 하지 않을 거야. 완벽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연습할 거야. 완벽해지면 네 발은 땅에 닿을 테고 나는 우주에 있을 테고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을 테지."ㅡ77
"제 손을 왜 그렇게 꼭 잡고 계세요, 할아버지?" 아이가 다시 속삭인다. "모든 게 사라지고 있어서, 노아노아야. 너는 가장 늦게까지 붙잡고 있고 싶거든."ㅡ81
현실의 이야기인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는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의 머리가 점점 느리게 움직이게 됨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억이 영원하지 않음과 잊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할머니가 대화하는 장면은 추억을 회상하고, 애틋함이 느껴졌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자신의 머릿속에서 대화하는 모습은 치매라는 주제를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여보, 기억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 물과 기름을 분리하려고 할 때저럼 말이야.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ㅡ85
그는 평생 확률을 계산하는 일을 했지만 그녀처럼 확률적으로 희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같이 있으면 그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ㅡ89
"사랑스럽고 까다롭고 뚱한 당신, 당신은 절대 쉽거나 싹싹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떨 때는 미워하는 게더 쉬울 만큼.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내게 당신은 사랑하기에 어려운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거예요."ㅡ93
"우리가 맨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이 잠자는 시간이 고문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응. 잠은 같이 잘 수 없으니까.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얼마나 괴로웠다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리기 전 몇 초 동안 말이야."ㅡ100
"아픈 느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다. 건망증이 하나 좋은 게 그거야. 아픈 것도 깜빡하게 된다는 거." "어떤 기분이에요?"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사람을 잊어버릴 때가 되며 잊었다는 것도 잊어 버리는 거예요?" ㅡ104
"우리는 남다르게 평범한 인생을 살았지."ㅡ121

"할머니가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서 빠져나가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만, 끔찍한 길치였거든. 에스컬레이터도 헤맬 만큼."ㅡ126
"나는 평생 어쩌다 내가 그 사람에게 반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단다, 노아노아. 그 반대라면 모를까."ㅡ126
"우리가 춤을 추었다고 얘기해주려무나, 노아노아야. 사랑에 빠지는 기분이 그런 거라고, 내 발이 그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라고."ㅡ131
남다르게 평범한 사랑을 하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평범하면서도 남달랐다. 고수를 싫어하는 할머니와 춤을 출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참 아름다웠다. 할아버지가 잠자는 시간이 고문이라고,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가 어디있는지 찾기까지의 몇초가 괴로웠다는 말은 정말 로맨틱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아침마다 사라지는 기억에, 할머니를 잊을까 두려워하며 매일 아침 기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부탁하는 모습 또한 애잔하게 다가왔다.
"네. 저를 잊어버리면 저하고 다시 친해질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건 꽤 재밌을 거예요. 제가 친하게 지내기에 제법 괜찮은 사람이거든요."ㅡ134
"...할아버지의 머리가.... 가끔 우리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할아버지가 알던 속도보다 느리게 돌아갈 거야."
"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점점 길어지겠죠."
아버지는 쪼그리고 앉아서 아들을 끌어안는다.
"우리 아들 참 훌륭하고 똑똑하고나. 내가 노아, 너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하면 하늘도 그 마음을 다 담지 못할 거야."
"우리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드리면 돼요?"
..."할아버지랑 같은 길을 걸어드리면 되지. 같이 있어드리면 되지."-151
"예전에 호숫가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자곤했는데 기억하세요, 할아버지? 이 줄을 손목에 묶으면 잠이 들어도 풍선이 매달려 있을 거예요. 무서워지면 그 줄을 당기기만 하세요. 그럼 제가 밖으로 꺼내드릴게요. 매번요." -159
병실 밖에서 우주가 노래를 부른다. 테드는 기타를 친다. 할아버지는 따라서 콧노래를 부른다. 화를 내기에는 너무 넓은 세상이지만, 함께하기에는 긴 인생이다. 노아는 딸아이의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아이는 침낭 안에서 아빠 쪽으로 몸을 돌리지만 깨지는 않는다.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고 제 할아버지처럼 언어와 악기를 좋아한다. 조금만 있으면 발이 땅에 닿을 것이다. 그들은 일렬로 잠을 청하고 텐트에서는 히아신스 향기가 나고 무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162
이 짧은 이야기는 무서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 끝이 난다. '치매'라는 질환을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프고도 애잔하게 그릴 수 있다니... 솔직히 노인들에 대해 많이 써왔던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이었기에 주인공이 노인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오베라는 남자가 은퇴하고 세상의 전부였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자살하려고 했을 때에도 이렇게 슬프고 감동적이진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인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보다 원제인 'and every morning the way home gets longer and longer'가 이 책의 내용과 통하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매일 아침 더 멀어진다. 이 책에는 길을 찾는 이야기가 곧잘 나온다. 처음에 수학을 알면 우주에 갔다가 돌아올 수 있고, 나침반 하나만 주고 길을 찾아나오는 게임을 할아버지와 손자는 하곤 한다. 할아버지의 배는 할아버지의 사무실이자, 어린 테드가 가지 못했던 공간이자, 노아에겐 할아버지와 추억이 가득한 장소이다.
매일매일 할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오는 길이 더 멀어진다. 할머니와의 추억에 젖었던 할아버지가 아들인 테드를 기억 못하고, 손자인 노아를 기억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져도, 히아신스 향기가 나고 무서워 할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자신의 기억과 이별히며 두려워하는 할아버지를 손자가 돌보는 장면이 참 인상깊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저 아름다울 수 있는 현실인 것 같다. 노년 인구가 점점 늘어가는 요즘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해서, 언제가는 해야할 작별인사를 위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