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 - 한 법의학자가 수천의 인생을 마주하며 깨달은 삶의 철학
이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살면서 본의 아니게 죽음을 가깝게 느낀 적이 있다.
2023년 1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서둘러 각종 검사를 하고,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제발 수습이 가능한 단계이기만을 기도했다.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불안은 끊임 없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면 어떻게 하지?
평소에도 내가 나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엇이 가장 아쉬울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글을 쓰지 못했고, 작가가 되지 못했으니 그게 가장 미련으로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고 보니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남편과 좀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내가 같이 벌어서 빚을 갚아야 하는데...남편 혼자서 빚을 어떻게 갚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삶의 유한함을 깨달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이호 교수님이 저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에서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유한한 삶 속에서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사랑, 그리고 사랑했던 그 순간들이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것은 결국 사랑이다"(219쪽)

<법의학자의 역할과 사명감>
지금까지 30여 년간 약 4천 여 건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학자이자 전북대 교수인 이호 교수님은 민주화운동을 하다 저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이철규 열사 사건을 계기로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패 불명이나 익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이라는 부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저자는 부검을 진행했던 국과수 법의학자의 이름을 기억해 두고, 오랫 동안 그를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부당한 외압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한 진실을 밝힐 의사가 되기 위해 법리학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공중보건의로 발령이 난 저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분소로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운명적으로 이철규 열사의 시신을 부검한 법의관과 둘이 근무하게 된다.
"모든 만남은 기적이다. 서로의 존재도 모른 채 각자 다른 우주를 살고 있던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혜성의 충돌처럼 기억같은 일이다...지금까지 내게 있었던 일 중에 어느 하나라도 일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내게 없었던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났더라면, 나는 법의학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든 만남은 기적이며, 그래서 나는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고맙고 감사하다"(31~32쪽)
"내가 그랬듯 모든 법의학자는 ... 월급이 적은 곳,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고, 오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황무지 같은 곳,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하는 곳으로 기꺼이 걸어온 사람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한 사람들,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을 택한 사람들이다"(35쪽)
죽은 자의 마지막을 대변해 주는 법의학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지만, 부를 비롯하여 의사로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헤택을 포기하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통의 사명감으로는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저자가 "가장 가엾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어주는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정의감과 사명감,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끊임 없이 '법의학자가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죽음을 맞은 이들과 그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법의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저자는 "죽음의 이유를 밝혀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삶의 이유를 찾도록 도와주는 일까지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고 있다.
<저자가 목격한 죽음들>
이 책에는 저자가 목격한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이 담겨 있다. 보험으로 인한 살인 사건에서에서 의료 사고로 사망한 어린 여성, 삼풍백화점 사고로 인한 사망자들,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희생자들, 그리고 저자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은 세월호 희생자들 등 여러 가지 죽음을 접하면서 저자는 고인의 대변자 역할 뿐 아니라 유족의 마음을 돌보기 위해 노력한다.
얼마 되지 않는 부검 수당(건당 50만원이라고 하는데 경비를 제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보다 너무 적어서 충격이었다)이 조금 남는 경우가 있는데, 저자는 '전북 법의학 연구소'라는 비영리 법인을 만들고 특히 사건 뒤 남은 아이들을 후원한다고 한다.
또한, 저자는 의료 분쟁이나 대형 사고 등 각종 사건 사고의 이면에는 "시스템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보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책임자의 색출 및 처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고 계속 개선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저자가 경험한 여러 가지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었던 부분은 3부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었다. 저자가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발견한 삶의 진실은 책의 곳곳에 녹아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결국 삶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집중적으로 담겨 있어 모든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였다.
"... 유독 힘들고 아픈 죽음을 맞는 이들이 있따.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돈이 많고 적고는 별로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단한 관계다. 주변인과의 유대 관계가 튼튼한 것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수많은 죽음을 만난 후에 알게 되었다...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관계는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와도 같다"(208~209쪽)
"떠난 사람을 슬퍼할 시간에 내 곁의 사람들과 행복을 찾으세요... 떠난 이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삶이 슬픔에 잠식되어 피폐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이 그리 길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할 시간 역시 생각처럼 길지만은 않다는 것도."(213쪽)
"잘 사는 웰빙도, 잘 죽는 웰다잉도 중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해 '웰빈(well-빈)'을 이야기하고 싶다. '잘 비우는 삶'을 말한다. 삶을 길게 바라보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영원히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은 돈도, 자동차도, 집도, 죽는 순간에는 아무 것도 아닌 한갓 사물에 불과하다. 그저 이 세상을 잠시 살아가는 동안 빌려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원한 내 것이란 없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자."(227쪽)
이 책에는 죽음이라는 우물에서 길어올린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개인적인 문제 뿐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존엄사에 대한 저자의 시각도 담겨 있다. 훌륭한 철학 서적을 만난 느낌이다.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고전과 시들도 인상적이다. 평소에 저자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삶에 대한 불평불만과 타인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행복을 쉽게 발견하여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짧은 감상평>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무겁지만은 않고, 저자의 따뜻한 인품이 느껴지는 책.
우리 사회에는 꼭 필요한 곳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남들이 좀처럼 가지 않는 길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을 생각하고 돌보는 데서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얻은 귀중한 성찰을 나누어준 저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