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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ㅣ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선입견은 무섭다.
임성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달랑 한 권씩 읽었을 뿐인데 (<자기 개발의 정석><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 <구원>이라는 묵직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유머와 페이소스가 들어간 사회파 소설일 것이라 멋대로 추측해 버렸다. 역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비껴가지 못했다.
2012년에 출판된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의 개정판(복간본)이자 <컨설턴트><문근영은 위험해>와 함께 '회사 3부작'이라 불리고 있는 이 소설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겁다. 웃음기도 쏙 빠졌다. 주인공들은 학살과 유혈이 난무하는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고 끊임 없이 딜레마에 봉착한다. 신뢰는 어김 없이 배반당하고, 선이라 생각했던 것이 금방 악으로 둔갑한다. 대체 인간이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평범한 사람들의 숭고한 이상은 어떻게 짓밟힐 수 있는지, 선을 추구하고자 한 인간이 마주한 자신의 민낯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무거운 문제들이 숨쉴 틈 없이 펼쳐진다.
소재도 충격적이다. 의사인 범준은 자살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장기를 적출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죽기를 원하지 않는 신부의 장기를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은 15년 전 내전이 끊이지 않던 아프리카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일까? 위험한 오지에 의료 봉사를 다니던 의사 범준이 살아있는 인간의 장기를 적출하게 되기까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시 오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신부는 왜 장기 적출 대상이 된 것일까?
신부는 의사에게 묻는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목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린다고 말하지만 살인 아닙니까?"
"제 목표는 고작 부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장기를 이식하고 남은 신체 조직들 역시 판매합니다. 각막부터 피부, 혈관, 뼈까지 누군가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필요하죠. 사실상 그것을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사람을 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그 조직을 팔아서 결코 장기이식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을 수술하는 데 사용합니다."
"아니요, 사람의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인간을 가치고 따지고 생명을 수단으로 전략시키는 순간,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를 바가 있나요? 생명의 가치, 존엄성, 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반짝일 뿐 아무 가치가 없는 얇은 금박 같은 것이지요."(282~284쪽)
"당신 말대로 인간이란 고작 짐승의 위에 금박을 발라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얇은 금박이 우릴 인간으로 만든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 금박이 바로 우리를 사람일 수 있게 하는 전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318쪽)

무엇보다도 불편한 지점은 두 주인공-인간의 마음을 구원하는 신부와 인간의 몸을 구원하는 의사-이 너무나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은 더 숭고한 이상을 마음에 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돈벌이나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는 악인(과장, 주임신부)들은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간다. 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결국 몸부림치는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진, 그러나 불완전한 보통 사람들이다. 읽는 내내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주인공들의 생각은 비윤리적이고 불편한 것이었지만, 저런 상황에서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저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와 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의사 범준이 오지에서 돌아와 마트에 우유를 사러 간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난민 캠프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물건들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 있었다. 그 엄청난 양에 범준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현기증으로 비틀거리며 우유를 찾기 위해 냉장고로 걸어가는 일은 쇼핑이 아니라 하나의 모험이자 탐사 같았다... 범준은 공산품의 정글에서 길을 잃었다...통로 끝으로 약국이 보였고 그곳에선 캠프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소독약, 진통제, 소염제들이 진열대마다 가득 차 있었다. 향연이었다. 과잉의 향연이었다.
범준은 우유 냉장고 앞에 섰다...그가 원했던 건 그저 우유 하나였지만 너무 많은, 너무나 많은 우유가 있었다...어쩌자고 이쪽 세상에선 우유가 수십 종이나 필요한 걸까...포격의 장소가, 두고 온 병원이, 죽어버린 이들이, 그가 죽음을 선고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겹쳐졌다...범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우유들을 앞에 두고 오열하기 시작했다(140-141쪽)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지구의 어느 지역 이야기는 서로 반목하는 인간들의 증오가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런 일들은 우리 또한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겪은 적이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사는 지역은 다행히 홀로코스트를 벗어났을지라도 그 어느 때보다 갈등과 분열이 심각하고, 상대에 대한 증오가 넘쳐나고 있다. 작가는 개정판 출판에 즈음해 이렇게 말한다.
당시에는 생각했습니다. 안일하게도.
이미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지고 있을테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잔혹한 현실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낙관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일어났었던 일이라 믿었던 비극이 최근 다시 일어났거나, 또다시 일어나려 하고 있으니까요.
이상한 시대입니다. 과거 이뤘다 믿었던 시대정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르고,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가치관은 극단으로 치닫는 시대입니다(361-362쪽)
주제는 무겁지만 스토리는 흥미진진하다. 대체 계속 언급되는 15년 전의 이야기는 무엇인지, 그들이 저질렀다는 죄악은 무엇인지, 그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조우하기까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현재와 과거가 숨가쁘게 교차하며 펼쳐지고, 많은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 주제부터 스토리,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 극한 상황에 몰려 딜레마에 봉착한 인간의 심리 묘사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작품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회사 3부작 중 나머지 두 권도 얼른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