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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스토리는 무엇이 다른가 - 인간의 본능을 사로잡는 세계관―캐릭터―플롯의 원칙
전혜정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 웅진지식하우스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리뷰입니다 *
지금까지 스토리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은 드물다. 책에서 알려주는 이야기의 구조나 기법에 따라 실제 작품을 분석해 보거나 창작을 해본 적도 없다. 작법에 관한 이런저런 책들에서 제시하는 스토리 분석의 틀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 책은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내용들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긴 시간 동안 인류가 사랑해 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인간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천착한다. 저자는 실제 현실은 인과 관게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과 부조리함으로 가득하지만,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인과 관계(개연성)로 설명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에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이 결국 비슷한 질문에 닿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 세계는 이렇게 불공평할까? (왜 세상이? - 세계관)
왜 내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왜 내게? - 인물)
왜 이런 시련을 나만 겪을까?(왜 이런 시련을? - 플롯)
저자는 이 질문들을 세계관-인물-플롯의 삼각형으로 나타내고, 이러한 삼각형의 균형 속에서 이야기는 살아 움직인다고 한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결핍'인데, 결핍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저는 이야기에 담긴 인간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해석하며 조립하기 위해 이야기의 출발점을 '결핍'에서 찾았습니다. 결핍은 단순히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근원적 동기이며, 서사의 시작점이 됩니다.
결핍을 자각한 인물이 세계와 충돌하며 갈등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사건이 전개되며, 의미가 만들어집니다.
반대로 결핍이 없다면 인물은 움직이지 않고 이야기가 태어나지 못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겪는 결핍은 놀라울 만큼 비슷합니다...누구나 사랑받거나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위기에서 살아남거나 무언가를 지키고 싶어 하기도 하고요... 결핍을 강조하는 서사는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어도 결코 진부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314~315쪽)
저자는 '결핍'이라는 열쇳말을 통해 스토리를 구성하는 세계관과 캐릭터, 플롯에 대해 풀어나가며, 이를 바탕으로 오랫 동안 사랑받아 살아남은 플롯을 여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다. 신화에서 소설, 영화, 웹툰까지 동서고금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예로 들면서 스토리의 본질에 대해 풀어나가는 내공이 만만치 않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웹소설 창작전공 교수인 저자는 스토리텔링 회사를 설립하여 단편영화와 애니메이션, 웹툰 시나리오를 집필한 스토리 작가이자 연구자이다. 이 책은 모두 21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실제로 저자로부터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실제로 저자의 강의가 궁금해져 유튜브를 검색해 봤더니 반갑게도 유튜브 채널도 있었다. 최근에는 영상이 올라오지 않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까지 올라온 영상들을 천천히 보려 한다)
수학을 공부할 때도 무작정 공식만 암기하기보다는 공식의 기저에 있는 근본 원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듯이 저자 또한 스토리가 작동하는 근본 원리에 대한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와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면서 마치 나 자신이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 없는 나 자신의 결핍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를 움직이는 동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생각해서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창작 과정에서는 2부 마지막의 '주인공의 결핍을 설정하는 법이나 '3부 '본능을 자극하는 플롯 설계의 원칙'과 같은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책에서 제시된 틀로 자꾸만 뭔가를 분석하고 싶은 열망이 솟구쳐 휴일에 영화 <하얼빈>을 봤다. 작품에 따라서는 인물의 결핍이 무엇인지 모호할 수도 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인물의 결핍이 명확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결핍은 '대한 독립'이었을 것이고, 이 결핍이 안중근 의사를 움직이는 동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번뇌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주인공이 신념을 바꾸지 않았음이 명확히 드러나도록 한 장치가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인 안중근 의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느끼는 결핍과 이를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과 갈등이 촘촘하게 배치되면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예전 같았으면 그냥 보고 흘려버렸을 플롯의 요소 및 장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독과 작가의 의도와 고민의 흔적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멋진 스토리를 써보고 싶은 마음에 읽기 시작한 책이었는데, 영화를 보아도, 소설을 보아도 예전과는 다른 눈을 장착하게 된 것 같다. 예전보다 많은 것이 보이고, 더 많은 것이 느껴진다. 본능을 자극하는 플롯 설계의 원칙을 따라 플롯을 설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읽기와 쓰기에서 모두 변화를 경험하고 싶으신 모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