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의 오후에도 축제는 벌어진다
와카타케 치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부키 / 2026년 4월
평점 :
#협찬도서

인생의 오후를 축제처럼 살고 있는 선배들의 책은 내 독서 목록에서 항상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오십 줄에 접어드니 노년이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실감난다.
몸의 변화에 따른 불안,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걱정….
그런 막막함이 밀려올 때면 나는 ‘인생 선배’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백 세의 현역으로 여전히 지혜와 통찰을 건네주시는 김형석 교수님,
일흔여섯에 붓을 들어 무려 1,600점의 그림을 남긴 그랜마 모지스.
이들의 이야기는 내 안의 불안을 걷어내고 기분 좋은 용기를 북돋워 준다.
노년을 당당하게 통과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막막한 미지의 길을 먼저 걸어간 이가 건네는 정교한 지도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멋진 선배가 있다.
쉰다섯에 남편을 떠나보낸 뒤
뒤늦게 소설 교실의 문을 두드린
이 책의 저자 와카타케 치사코다.
8년 동안 묵묵히 글을 쓰고 다듬은 끝에 예순을 넘긴 나이에 등단했고,
일본 문단의 대표적인 순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절망과 고독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고
멋지게 인정받기까지,
그녀가 걸어온 여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딸까지 독립한 뒤,
저자는 처음으로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살게 된다.
그 시간은 슬픔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해방의 시간이기도 했다.
저자는 "혼자가 된 아내에게 하루는 영원처럼 길다(76쪽)"라고 하면서도
"가족의 ‘부반장’ 역할을 마치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 나쁘지 않겠지요.”(35쪽)라고 한다.
슬픔과 고독에 잠식되기보다 그 시간을 조용히 견디며 자신을 돌아보고,
결국 그것을 예술로까지 승화해 낸 저자가 존경스러웠다.
(저자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홀로 남은 노년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다)
외로움의 한복판에서도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끝내 자기 삶을 다시 살아내려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새삼 인간이 지닌 조용한 강인함을 느끼게 된다.
나이듦은 쇠퇴가 아니라 또 하나의 성장
우리는 흔히 나이듦을 쇠퇴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가 말하는 나이듦이란 쇠퇴가 아닌
"성장의 한 형태"(63쪽)이다.
나이 든다는 게 그렇게 초라하고 쓸쓸한 일일까요. 늙는 것도 성장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체력이 예전만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100미터 달리기를 할 것도 아닌데, 일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체력이라면 젊을 때와 비교해도 그리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63쪽)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거나,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을 쉽게 내뱉곤 한다.
물론 신체적인 변화를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혹시 나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나이 듦을 '쇠퇴'가 아닌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앞의 시간은 여전히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자신의 삶과 글쓰기를 통해 그 사실을 담담히 증명해 보인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적어도 '나이가 들어서 못 한다'는 말만큼은
쉽게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의미: 괴로움과 마주하는 방법
나는 괴로운 일을 마주할 때마다 그 괴로움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찾고 나면 이 괴로움도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이었구나 하고 스스로를 납득하며 맞선다.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섭리 같은 것이 있다. 그 섭리가 나를 이끌어갈 때면 나는 그 부름에 온 몸으로 응하고 싶어진다(98쪽)
이 부분에서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랭클은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그 시련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와카타케 치사코 역시 삶의 오후에 마주하는 갖가지 괴로움을 단순히 피해야 할 불운이 아닌, 자신을 이끌어가는 어떤 거대한 섭리의 부름으로 해석한다.
사실 우리는 고통이라는 혹독한 계절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돌아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시련의 시간조차 훗날 내 삶을 단단하게 일궈낸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나를 할퀴고 간 상처와 나를 힘들게 했던 인연조차, 사실은 나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일깨워주기 위해 찾아온 '가면 쓴 스승'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작가는 그 헤아릴 수 없는 섭리의 부름에 '온몸으로 응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삶을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삶이 건네는 모든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이다.
인생의 오후, 고통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쇠퇴가 아닌,
조용히 빛나는 축제가 될 것이다.
인생의 오후에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노년은 고독에 익숙해져야 하는 시기라고들 하지만,
저자는 '연결'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과 관계를 맺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우린 아직 젊다. 이제부터다.” (81쪽)
이 문장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다.
노년의 삶에서도 변함없이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나이가 들수록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은 늘어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 자체가
삶을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저자는 바로 그 마음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젊다고 다독여준다.
결국 나이 듦이란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되는 상실의 시간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된 존재로서 내가 줄 수 있는 온기를 고민하며 여전히 ‘현역’으로 살아가는 시간임을 배우게 된다.
읽고 쓰며 나이드는 삶
읽고 쓰며 나이 드는 삶.
내가 오래도록 이상적으로 그려 온 삶이기도 하다.
저자는 남편의 죽음 이후 절망과 고독을 통과하면서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맞이했고,
마침내 자신이 써야 할 이야기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고까지 말한다.
결국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역할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기 자신과 만난 그 모습, 그리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켜
인생의 오후를 축제로 만들어 낸 삶이 무척 부러웠다.
앞으로도 이런 성숙한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책보다 먼저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않을 것,
늦었다고 단정하지 않을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 꼭 본받고 싶은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저렇게 추하게 나이 들지 말아야지…라며 손가락질받는 모습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읽고 쓰면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나 역시 축제 같은 인생의 오후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

#인생의오후에도축제는벌어진다 #와카타케치사코
#인생조언 #50이후의삶
#에세이추천 #노년에세이 #부키 #부키출판사
#나는나대로혼자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