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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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과 만났을 땐 잘 알아보고, 한곳에 붙박아둬야 한다는 걸 알 정도로…… 나이든 사람 말이다.

햇빛이 충분치 않은 공간에선 이따금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기는 펑! 펑! 시간에 초크질을 하며 현재를 오려갔다.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늘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_풍경의 쓸모

한 동안 나 자신이 비리고, 뜨겁고, 미끌미끌한 덩이로 느껴졌다. 이름이 지워진 몇십 킬로 그램짜리 영양 공급 팩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나를 그렇게 대했다. 그게 격려나 존중의 형태였대도 그랬다.

말을 배우듯 난생처음 접한 ‘맛‘들을 하나하나 익혀갔다. 생각과 판단이 깃든 얼굴로, 오물오물 턱 근육을 움직이면서, 생각의 그물 짜기, 감각의 실뜨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땐 혼자 힘으로 완성한 아름다운 레이스를 펼쳐 보이듯 나를 보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재이, 사람 다 됐네!" 하고 놀려대듯 칭찬해줬다.

위축된 표정으로 또래 속에 섞인 모습을 보니 저 아이가 저 작은 몸으로 벌써 ‘사회생활‘을 감당하고 있구나 싶어서였다.

부모도 자식에게 경외감을 느낄 수 있구나…… 네 안의 어떤 것이 너를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중 내가 준 것도 있을까. 만일 그게 내가 준 것도 네가 처음부터 가진 것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아득한 기분으로 박수 친 기억이 난다.

애가 어릴 땐 집 현관문을 닫으면 바깥세상과 자연스레 단절됐는데, 지금은 그 ‘바깥‘을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하는 모양이다.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social‘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평판과 해명, 친밀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내 연결돼 있는 듯해.
_ 가리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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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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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두고 읽어야지 하고 조금씩 밀려두었다 1일 1권 의지를 불태우면서 빠르게 넘겨 읽었다.

이미 계속해서 생각하고 보던 내용을 재확인하고 부연설명을 보는 느낌이라 더 빠르게 읽혔던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암담하지 않은 것이 없고 다시금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의 나를 되새김질한다. 계속해서 쓰고, 읽고 쓰자.

 

 

 

코피노 발생의 1차적 원인 제공자는 한국 남성들이다. 즉 이들의 그릇된 성 인식과 함께 부모로서 자녀를 방치하는 비윤리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코피노 문제는 한국 남성들의 잘못된 성문화와 자녀 부양의 의무를 방치한 결과물이다. 여성을 ‘엔조이(Enjoy)‘ 대상으로 인식하고, 돈으로 매수하여 성관계를 갖더라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비윤리적 태도, 피임을 기피하면서도 필리핀 여성과 즐기고 임신에 대한 책임은 방관하는 태도, 필리핀 연인 혹은 동거녀의 임신 사실의 인지 후, 일방적인 연락 두절이나 귀국 등 한국 남성들의 일련의 비도덕적 행태가 코피노 발생의 직접요인이다. (주22)

그리고 이 남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유학생인 경우가 가장 많다. 그래서 코피노 발생시기는 필리핀에 어학연수 붐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참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어학연수는 남자 여자 다 가는데, 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넘는 짓거리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하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Ugly Korean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관계가 틀렸다. 앞으론 ‘Ugly Korean Male‘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라이따

그리고 이 남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유학생인 경우가 가장 많다. 그래서 코피노 발생시기는 필리핀에 어학연수 붐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참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어학연수는 남자 여자 다 가는데, 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넘는 짓거리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하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Ugly Korean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관계가 틀렸다. 앞으론 ‘Ugly Korean Male‘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라이따이한의 책임을 물어야 할 이들과 정확히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난다.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답다. 도대체 ‘한국 남자 일부‘에게는 어떤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인가.

-독재의 물결은 어떻게 개인의 정신을 지배하는가
디 벨레는 영어로는 Wave, 즉 ‘물결‘이라는 뜻이다. 영화 안에서는 학생들이 만든 단체명으로 쓰이지만, 함축적인 의미는 파편화되어 있는 개개인이 하나의 거대한 그리고 괴기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이 마치 ‘물결 타듯‘ 자연스레 진행된다는 것이다.

작은 교실 ‘안‘에서의 독재정치,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집단주의는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사람들은 독재는 옳지 않으며 개인을 괴롭히는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문제를 문제라 말하지 못하게 된다.

- 폭력에 둔감한 것이 진짜 남자인가?
영화 <디 벨레>와 <엑스페리먼트>는 한국 남자들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진정으로 위하는‘도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남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생물학적인 ‘고유한‘ 특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원래의 모습‘이 무엇인들, 그것이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당연히 본능을 억제해야 하고 여기에 성별 변수가 예외적 조항이 될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태초부터 구분되는 것은 생식기의 차이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 비해 물리력이 강할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태초의 차이를 태초 이후의 차이로 확장하여, 모름지기 남자라면 다 그런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더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남자들이 신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닐 것인데, 원래부터 유전자가 ‘그딴 식으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외부 조건‘들을 경험하면서 ‘물결치듯이‘ 남자에서 남성으로 변한 걸까? 사람마다 약간은 다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폭력을 참아가면서‘. ‘수치심을 느끼면서‘ 남성이 되어간다. 그래서 한국에서 말하는 ‘진짜 남자‘는 폭력에 둔감하다. 둔감하다는 것은 쌍방향이다. 폭력을 당해도 당하는 줄 모르고, 저질러도 그게 자꾸만 폭력이 아니라한다.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 노동력
한국의 남자들은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기도 전에 학교와 군대에서 이미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의 남자는 어떤 사회에나 있는 남자와는 ‘다른‘남자다. 그러니 ‘원래‘그런 남자는 없다.

대개의 경우에는 ‘쓸데없이 당당한 남자들 때문에‘ 화를 입는 건 여자들이다. 그렇기 떄문에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길러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줄 모르게 길러진다."(주24) 오죽했으면 자동차 ‘블랙박스‘ 광고에서 "남자들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다짜고짜 소리 지르는 경우 보셨죠? 그래서 여성 운전자들에게는 이런 카메라가 필수죠"와 같은 멘트가 등장할까.

"사회학 공부한다는 사람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죠? 초등학교 여교사가 신붓감 1순위니까 여자는 뭐 사회적으로 혜택이라도 받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게 바로 고질적인 한국의 문제잖아요. 한국에서 남자들이 얼마나 지배적으로 여자의 노동을 규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설문 조사와 그 결과를 마치 합리적인 것마냥 소개를 하면 어떡해요? 이건 뭐, 직장에서 여자들보고 회식 끝까지 안 남았다고 뭐라고 그러다가 또 그런 여자를 죽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다면서 뒤통수치는 남자랑 마찬가지잖아요."

-취향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메커니즘
남자만의 ‘벌이‘로 가족의 생계가 안정적일 수 없는 시대가 오면서 ‘맞벌이‘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남자들은 ‘아내가 돈도 벌어주길‘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도‘다. 즉 원래의 일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는 육아 등은 물론이고 ‘남자가 늦은 저녁에 퇴근해서 왔을 때‘ 뚝배기에서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출근 하기 전에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국‘이 빠져서는 안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남자, 아내가 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너 결혼하면 집에 일찍 들어올 거지? 난 회식한다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다니는 꼴은 못 봐."

조주은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남자들이 초등학교 여교사를 배우자로 선호하는 것에는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여교사는 남성들에게 흔들리는 남성 가장의 정체성을 보완해주면서 집안일, 보살핌 노동까지 담당할거라는 기대 떄문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162p)면서 이것은 "결혼으로 구성되는 가족 안에서 여성들의 노동력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남성 권위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의도"(161p)라고 지적한다.

‘개저씨‘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하루가 멀다하고 여성을 살해, 폭행하는 남성이 뉴스에 등장한들, 불균형한 젠더 권력 속에서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남성들의 속성‘으로 잡히지 않는다. (주26)

강인규 교수는 『망가뜨린 것 모른척한 것 바꿔야 할 것: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에서 이것을 ‘김 여서 조롱 하는 비겁한 사회‘(81~83p)라 일갈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의 성별에 따라 언론의 보도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운전자가 여성일 경우, "현금 수송차 들이받은 ‘김 여사‘, 가만히 있는 차를 왜?"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되며, 기사 내용에도 ‘운전자는 50대 여성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운전자 성별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운전자가 남성인 경우는 다르다. "일가족 참변, 가해 운전자 ‘만취‘"라는 기사에는 운전자 성별이 언급되지 않는다. 내용에도 ‘가해 차량의 운전자는 만취상태였습니다‘라고 밝혀 이 사고가 ‘성별‘떄문이 아니라 ‘술‘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게 명시한다. 이런 차별적 보도는 ‘여성 운전자는 운전이 미숙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그러니 욕먹어도 된다‘는 차별을 이끌어낸다.

도로에서 차량 간 아주 사소한 위험이 발생하면 ‘자신의 차를 상대 차의 옆으로 바짝 붙여서 창문을 내린 후 상대가 여자임을 확인하고 욕을 내뱉는‘ 사람은 전부 남자다. 신기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명백한 패턴이 있다. 여자가 객관적으로 운전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운전대만 잡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분명한 패턴.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만만하기 때문이다.‘

" 제가 그 남자 선배에게 주목한 이유는 요리를 하면서 주변에서 자꾸만 자상하니 어쩌니 그러자, 선배가 "나는 힘든 거 내색을 절대 안해"라고 말하는 모습이 의아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선배의 모습이 마치 ‘내가 안 해도 될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 알지?‘라고 굉장히 생색을 내는 느낌이었거든요. 여자들은 객관적으로 생색을 낼 상황이라도 내색을 하지 않는게 바로 ‘요리‘라는 노동인데, 남자들은 그 노동을 ‘아주 잠시 보여줘도‘ 상징적인 가치를 다 가져가니 신기한 일이죠."

남자들 입장에서는 기껏 ‘도와줬는데‘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부자들의 적선으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고 정치인들의 ‘쇼‘로 사회적 약자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가정적인 남자가 자주 출몰(?)은 하고 있지만, 왜 남녀 불평등에 관한 이 사회의 나쁜 지표들은 늘 지지부진한가. 이런 상황에서 남녀가 ‘함께해야 하는걸‘, 그저 ‘도와주었다는 것‘만으로 남자들은 ‘자상하다‘는 평가마저 받으려고 하니 이 심보야말로 ‘불평등‘의 단면 아니겠는가. 그러니 ‘티 나게‘ 요리하는 남자들을 경계하길.

"그렇게 옷을 입는 건 마치 개 앞에 스테이크를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뭘 기대했어?"라면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에게 책임을 묻자 땅콩버터 통 앞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개 사진을 SNS에 올린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땅콩버터는 우리 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진 속 우리 개가 땅콩버터를 건드리지 않는지 알아? 내가 "안돼"라고 말했기 때문이지."
통쾌하고 씁쓸하다. 통쾌한 이유는 말 그대로 ‘논리가 아닌 것‘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고 씁쓸한 이유는 이 간단한 상식이 유독 ‘한국에서‘,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도 어떻게 훈련받았는지에 따라 평소에 환장하는 ‘뼈다귀‘앞에서도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데,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남자들은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교육 내용에 충실해서 그런 것인가? 지하철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면 안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공간임이 자명하다.

그런데 여자들은 이 민주주의가 샘솟는 정보화 사회에서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말 그대로 과거 같았으면 ‘한 번쯤 혼나고 정신 차리면 될 일‘정도를 저질러도 ‘다시는 이 사회에 발을 못 붙일 정도까지‘ 융단폭격을 당할 수 있기 떄문이다. 전문용어로 하면 ‘마녀사냥‘이다. 신상이 까발려지고 온갖 음해가 난무해지는 속도와 정도가 워낙 커서 나중에는 ‘잘못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 자체가 어색해진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기 떄문이다. ‘○○녀‘라고 이름붙여진 사건들의 대부분은 이러하다. 곤히 잠든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는 것에 비하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자기 취향을 말하는 건 그저 "거 참 되게 얄궂게 말하네"정도로 욕 좀 들어먹으면 되는 일이다.온갖 공공장소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주정을 일삼고 위액과 섞인 악취 풀풀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시키는 남자들에 비해 자기 애완견이 ‘지하철 안에서 똥 싼 걸‘ 치우지 않은 여자는 경범죄로 가볍게 처리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술 취한 사람‘정도로 취급받는 것에 비해 여자는 ‘○○녀‘가 되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른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면서도 ‘부연 설명‘을 하는데 ‘남자들이 듣기에 기분 나쁨직한‘ 자기 취향 좀 말했다고, 또 공중도덕 하나 못 지켰다고 해서 ‘개인의 모든 것이 탈탈 털리는‘ 대상이 대부분 여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포털사이트에는 ‘만취한 여교사, 성폭행 당해‘와 같은 뉴스가 등장한다. 많은 이들이 ‘여자가, 그것도 여교사가 만취한 상태였다‘는 측면만을 기억할 것이다.

술 마시고 강간하는 나쁜 남자 덕택에, 술만 먹으면 섹스를 강요하는 자신은 별문제가 안 된다. 술 마시고 애인을 살해하는 남자 덕택에, 술만 먹으면 무엇인가 집어 던져버리며 욕설을 퍼붓는 자신은 별문제가 안 된다. 결국 남자들은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면서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유,무형의 폭력을 계속 유지한다. 그래서 ‘괴물까지는 아닌‘ 자신이 좋은 남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남자에게 집안일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도와주는‘봉사의 영역이다. 봉사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했던가. 그래서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한 번 하는걸 집안일을 ‘해주는‘걸로 이해하고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당신은 좋겠다. 내가 가부장적인 남편이 아니라서 얼마나 대박이야?"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아내에게 기쁨의 감정을 강요한다. 그 기세등등한 자신감에 눌려 여자들은 복남이가 되어 살아간다.

"어떤 엄마도 처음부터 아기를 능숙하게 돌볼 줄은 모릅니다. 아빠나 엄마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서부터 아기를 돌보는 일을 시작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엄마는 하루 종일 아기 곁에 붙어서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고 아빠는 직장에 나간다는 이유로 가끔 아기를 돌보는 정도의 봉사만 있지 그 책임과 의무에서 비켜서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아빠들 중 어느 누구도 한밤중에 아기가 울며 보챈다고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기를 토닥이고 젖병을 물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직장 노동과 가사 노동을 마친 누구나 재충전을 해야 할 시간이지만 그때의 노동은 아내에게 전가되어 있죠. 하지만, 이 차이는 엄마가 직장에 나가도 다르지 않더군요. 아기가 울 떄 죽은 척하는 남편은 그나마 양반이죠. 좀 조용히 시키라고 짜증 내기도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는 것은 같아도요."(주31)

사회의 포악스러움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을 외면한 채, 여자들 기에 눌려 산다면서 자신들의 ‘심리적 거세‘만을 말하기 바쁜 지금의 아버지들을 보고 아들들은 이상한 걸 배운다. 이들은 아버지가 할아버지만큼 화려하게 살지 못하는 ‘사실‘을 보고 지금의 세상이 여자들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여성 할당제‘, ‘여성 전용‘같은 말이 나오면 "요즘 세상에 누가 차별을 받는다고 그래?"라며 역차별을 운운한다. 이들은 가뭄에 난 콩이랏 주목받는 ‘매맞는 남편‘, ‘여자 상사에게 성희롱 당한 남자‘사례를 잘도 기억했다가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여자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 현상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남녀간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유난떤다고 비판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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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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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오찬호 | 2011.01.01 12:57

** 이 글은 <경희대학교 교지 - 고황>(2010년 12월)에 투고된 글입니다. 아래 글의 상당부분은 제가<페미니스트 웹진 온라인이프>에서 연재하는 <남자가 바라보는 남성계>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약간의 사례와 설명이 첨가되었습니다.

이 글은 자살행위다. 왜? 몰라서 물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언급했잖아. 그럼 얘기 끝난 것 아니야? 그런데 페미니즘을 제대로 언급하고 장렬하게 전사라도 하면 그나마 분하지는 않을게다.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여성을 옹호’한다는 느낌 하나만으로 박살이 난다. 혹은 아주 작은 수위에서다로 ‘남성을 비하’하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마녀사냥을 당한다. 나는 그런 경험을 몇 번 당해봤다. 이것도 몇 번 반복하니 위험을 인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생기더라. 가장 중요한 것은 선제공격이다.

전략은 간단하다. 내가 10년 전에 제대했음을 먼저 밝힌다. 이거 하나면 충분한다. 욕설의 절반이 자취를 감춘다. 최소한 ‘군대 안 간 놈의 헛소리’라는 어처구니없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굉장히 강력한 논리적 근거’에서 자유로워진다. 게다가 나는 육군현역으로 26개월을 복무했다. 이것도 중요한 초반 기선제압 작전이다. 군대까지 나 온 남자가 약간이라도 안티 남성의 냄새를 보이면 보통의 공격이 “혹시 공익 아니야?”라는 정도기 때문이다. 이게 내게는 통하지 않을게다. 그 다음은 내 군 생활 ‘내용’을 꼬투리 잡을게다. 분명 고문관이었다고 추측할 듯. 걱정 마라. 전역할 때, 말뚝 박으라는 소릴 들었으니 절대 고문관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포창도 몇 번 받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한 자기소개를 하는 거지? 유치하지만 이해해라. 이건 일종의 ‘방탄조끼’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논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미친 짓이다. 그래서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 이제 어쨌든, 나에게 "군대는 가보고 그런 말 해라~", 혹은 “군대도 안가면서 헛소리는~”라는 해괴망측한 소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방탄조끼가 효과가 짱이다. 이것만 입어도 모든 공격을 사실 ‘다’ 막을 수 있다.

더 웃긴 것은 나는 마초라는 거다. 그런데 그저 한국의 ‘남성 담론’을 약간 비판적으로 언급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에 여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페미니즘 매체에 칼럼까지 쓰게 되었다. 그 칼럼이 나가는 동안 이리저리 인터뷰도 많이 했다. 이 정도면 평소, 수구보수 꼴통 소리 듣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누려보지 못할 호사다. 이 글을 청탁 받은 것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마초지만 여성주의자로도 평가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남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되게 웃긴다. 그들이 불편해하니,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다?) 난 남자가 ‘더’ 잘났다고 뼈 속까지 생각한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잘났다고 자기 혼자 생각하는 것과 자기만의 생각이 마치 하느님이 내려주신 계시인양 이해하고 타인에게 ‘믿음’으로 강요하는 경우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경우다. 내가 주목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 잘못된 믿음은 대개 어처구니없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도대체 군대가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아내가 딸을 출산 할 때, 분만실에서 40시간을 함께 한 경험을 인터넷 매체에 올린 적이 있었다. 내용은 아주 교훈적이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 보다 출산이라는 훨씬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는 내용. 고로 아내를 이해하자는 것. 이 정도면 보건복지부 같은 곳에서 “육아를 함께하는 아빠상” 대상감이다. 그런데 글 마지막에 “세상의 모든 엄마들! 정말 대단하다. 비록 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만실 40시간이었지만 남자들이 흔히 핏대 세우는 26개월(내경우)의 군 생활은 실로 장난이었다.”라는 지극히 은유적 구절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 글은 여러 포털 사이트에 “분만실 40시간 체험, 군대보다 더 무서워”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올라갔고 나는 2천개의 악플 세례를 받았다. 이 중 80%는 글의 제목만을 보고 거품을 물었다. 한국이 이렇다. 출산과 군대가 ‘함께’ 언급되고 이를 저울로 조절하는 느낌을 풍기는 제목만 보고도 클릭을 하고 바로 스크롤을 내려서 댓글을 단다. 그것도 입에 담지 못할 화려한 미사어구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되게 신기한 지점이 발견된다. 2천 개의 댓글이 비슷한 논조를 보인다는 거다. 정리하면 간단. “군대가 더 개고생이다!” 그리고 협박. “쥐뿔도 모르면 까불지 말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개고생이 맞는 거 같다. 사회에서는 시키는 것만 하면 창의성 없다고 욕먹지만, 군대는 시키는 것 ‘외’의 것을 하면 욕먹는다. 그러니 시키는 것만 한다. 그런데 이 시키는 것이 정말 짜증나기 그지없는 것들. 풀 뽑기. 돌 줍기. 농구장에 선 그리기. 테니스장 볼보이. 주임원사 집에 페인트칠. 행정관 이사할 때 짐 날라주기. 대대장 관사 화장실 막힌 거 뚫어주기. 총 들고 경계근무 나가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여자친구와 어디까지 스킨십이 있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말하기. 왜? 시키니까. 이처럼 6시에 눈을 떠서 잠 잘 때까지 말 그대로 개고생이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려야하는 위치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병장의 삶은 정말 개처럼 지겹다. 어떻게든 전투력 ‘축적’을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개처럼 피해 다녀야 한다. 왜? 제대하면 아무 소용없는데 누가 미쳤다고 그런 스펙관리에 몰두하겠어? 그래서 병장들은 그저 D-day 만을 기다리면서 몸조심할 뿐이다. 병장들은 어떻게 하면 짱박힐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정말 개 같은 고민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일관성이 없다. 출산보다 ‘더’ 의미 없고 ‘더’ 고통스럽고 ‘더’ 짜증나는 곳(기간)이 바로 군대라고 해 놓고서도 순식간에 국방부 홍보대사가 된다. 완전 아슈라 백작. 몇 달 전 화제가 되었던 EBS 강사, 군살녀 논쟁을 한번 보자. 내가 놀라는 것은 남자들이 도대체 언제 그렇게도 군대를 좋아했냐는 거다. 모두가 숭고한 군 생활을 모독했다고, 의미있는 군생활을 폄하했다고 난리다. 아니 도대체 술만 마시면 흥분해서 군대 욕 한다고 정신 없었으면서 이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다 거짓말이었어? 이처럼 우리나라 남자들은 ‘개 같은 군대’ 이야기를 밥 먹듯 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여자’가 하면 정말 개처럼 거품을 문다. 그러면서 "군대 가면 정신 차린다" 혹은 "군대 가서 정신 차려야지" 같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여자는 군대를 못 가는데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장인지.

그렇다고 국방부 홍보대사직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얼핏 이들이 “군대는 정신을 맑게 해 주는 곳!”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군대가 ‘X같은 곳’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린단다. 이 정도면 엑스맨이다. 아니라고? 무슨 소리. 보통 군대를 칭송하는 무리들은 그곳에서 상대적으로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정신 바짝 들게’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잖아? 그러니까 ‘정신 차린다’는 말의 속뜻은, "개새끼, 군대 가서 개고생하면 얼마나 인생이 소중한지 알지" 정도 아니야? 알고 보니 이들 모두가 군대를 반대하는 엄청난 인권주의자였다니!

그런데 남자들이 취업을 위해서 다시 홍보대사직로서 활약한다. 이들은 자기소개서의 한 단락에 반드시 군대경험을 언급한다. 이런 저런 미사어구가 있지만 정리하면, “군대에서 사람 되었다”는 것. 정말 웃긴다. 스스로 군대‘전’에는 사람 아니었다는 증명을 하는 것 아닌가? "인생을 알 수 있다", "위계질서를 배운다", "조직문화를 체험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등을 말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걸 굳이 군대에 가서 배워야 합니까?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목록 아닌가요?”라고 물으면 얘기 끝. 결국 군대가 아니고서는 그런 상식조차 도무지 배울 수 없었다는 자신의 그렇고 그런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나는 꼴이다. “진짜로 남자가 된다!"는 것은 뭐야? 군대에서 성기확대 수술이라도 했다는 거야? 물론 군대 문화를 몸에 익힌 것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었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징병제가 아닌 국가의 남자들은? 장애가 있어서 가지 못한 남자들은? 이들은 미완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군대를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는 수준 낮은 사회라는 건데, 이 정도면 국격을 떨어트린 죄로 잡혀가지 않나?

“군대 방향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군 생활을 기억하기도 싫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남자들은 지독히도 그때의 ’더럽고 치사한 순간‘을 평생 기억해낸다. 그런데 더럽고 치사하니 “책임져라!”가 아니다. 결국에는 누가 더 더러웠는지를 경쟁하기에 바쁘다. “내가 더 고생했으니 다른 사람은 입 다물라!”는 버전 말이다. 이런 걸 보고 내부식민지화라고 한다.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조 안의 행위자끼리 바동거리는 모습. "군대는 사회와 다르게 문제가 많은 곳이다"로 시작은 했지만, 마무리는 "그러니까 군대는 사회와 다르다"고 종결되는 모순. 또 이를 지극히 논리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남자들. 심지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는 말로서 원래의 자신이 '동물'이었음을 인정하는 남자들.

문제는 이러한 이중성이 우리 사회를 정체시킨다는 거다. 군대에 가면 개고생이라고 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마당에 굳이 軍이 앞장서서 변화를 이끌 필요가 없다. 군은 지금까지 이러한 '착한 국민들 덕'을 보고 살았다. 그러니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말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적시적소에 사용한다는 거다. 문제는 나부터다. 군 복무 시절, "군대에서 죽을 놈 사회에서도 죽는다."의 발언을 몇 번 했다. 나만 그랬겠는가? 나도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했고, 내 이야기를 듣고 또 누군가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故 한주호 준위를 떠올려보자. 야속한 것은 '바다'뿐일까? 누가 그를 바다로 보냈단 말인가? 여보게들. 이분이 58년 개띠야. 조형기, 설운도가 동갑이라고. 53세의 아저씨가 40미터 아래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잠수'를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군인정신이야? 아무리 나라걱정이 먼저인들, 체력에 따라서 '다른 임무'가 부과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면 과연 이러한 희생이 야기되었을까? 아니, '전우애'만 언급하면 다야? 이런 것이야말로 엄격하게 규정화해서 철저한 복종을 강요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가장 큰 죄인은 바로 '나'다. 그래서 너무나 죄송스럽다. 나부터가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란 말을, "군대갔다오면 철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그를 죽인 거다. 아마도 한 준위는 '전날과 다른 몸 상태'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속삭였다.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남자'라고. 그렇게 내가 속삭였다. 그리고 등을 밀었다.

왜 남자만 당당하게 흡연하는 것일까?

남녀공학 학교로 강의를 나가보면 쉬는 시간마다 엄청난 인파가 각 단과대 앞에서 흡연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우선 흡연자의 99%가 남자다. 이것만으로도 놀랄만한 사실. 그 중 90% 정도는 예비역들인데, 이들은 건물입구를 완전히 독차지하고 있다. 간접흡연을 배려하지 않을수록 더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그 평생의 착오가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이들로부터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몇 명의 새내기들이 어색한 흡연포즈를 취하고 있다.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도, 불을 붙이는 모습도, 재를 터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담배를 끄는 모습마저 하나같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또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1%의 여학생들이 아주 예의 바르게 흡연 중이다. 여기서 예의가 바르다는 것은 폼생폼사의 개념이 아니라, 최소한 그녀로부터는 누구도 간접흡연의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거다. 웃긴 것은 이 현상이 여대에 가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거의 모든 흡연자가 지정된 장소를 지킨다. 최소한 건물입구에서 재를 툭툭 털어대지는 않는다.

거리에 나가보자. 지금까지 내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여자’가 내 앞에서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당당한 보행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단 한번도 ‘여자’가 내 아기가 타고 있는 유모차 앞에서 담뱃재를 턴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여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혹은 횡당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워 나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그런데 여자는 담배 못 피나? 물론 여자 중에 흡연자 많다. 그러나 나에게 ‘피해를 주는’ 흡연자는 9할9푼이 남자다.

남자들과 이런 논의를 하면 “그래도 여자는 아이를 놓아야 하는데, 담배를 안 피는 것이 건강에도 좋잖아요.”라는 굉장히 유기농스러운 말들을 한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그 외에는 어떤 논의도 발전 못 시킨다. 염병할, 그럼 저 여자가 담배 안 피고 아이 잘 놓으면 무슨 양육비라도 줄 거란 말인가? 또 다른 반론은 “여성흡연자들을 많이 보았다”, “나에게 피해를 준 여성흡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논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대표적인 것이라면서 다그친다. 그런데 어떤 ‘여성’의 ‘흡연 장면’이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이 놀랄만한 기억력이야말로 바로 여성흡연자체를 ‘생소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여성흡연자는 말 그대로 일당백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 지금 직접 관찰해보길. 집 밖에 나가서 다른 건물로 들어가기 전까지 흡연자들을 카운트하자. 논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연령을 20~40대로 조절하고 공간변수도 보행을 하면서 흡연하는 경우(이른바 길빵),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버스정류장, 횡당보도 앞으로 제한하자. 1%? 100명의 흡연자가 있다면 여성흡연자는 1명 정도일 것이다. 대구와 같은 보수적인 지역에 가면 0%도 도전할 만하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없는 ‘수치’가 각인 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1%를 아주 강력하게 기억하는 것은 애초에 1%를 “대단한 무엇”으로 여겨야지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해외에서 삼성, LG 광고이나 현대자동차를 발견하면 반가워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는 광고판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흡연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흡연은 언제나 ‘독특하고’, ‘신기한’ 현장이다. 그나마 이건 좋은 표현이다. 내가 자란 대구에서는 ‘미친 년’, ‘싸가지 밥 말아 처먹은 년’이었다. 그러니까 이 1%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리의 로또다. 당첨된 로또 번호는 순식간에 캡처가 되고 스캔이 된다. 그 여자도 그렇게 나에게, 남자에게, 사회에서 기억된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질문. 내가 수백 번 물어 보았고 수천 번 들어 본 질문이다. 이 문장에는 “저 남자 담배 펴요”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 동반되어 있다. 남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흡연여부’를 확인하는 거다. 취향 자체를 묻거나, 혹은 금연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혹은 건강과 관련된 테마가 나올 때 말이다. 그러나 여자의 흡연여부는 거시기하게도 매우 거시적인 차원에서 언급된다. 취향? 그런 것은 애초에 관심 없다. 오직 사람에 대한 평가를 위한 잣대로서 흡연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저 남자 담배 펴요”는 “저 남자가 지금 담배를 피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일차원전 의미만 있지만, “저 여자 담배 펴요”는 “아니, 지금 저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네요. 어허. 이것 참”이라는 가치판단이 깊숙이 내포되게 된다. 이처럼 여성흡연은 소개팅의 조건에도,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에도, 사회활동을 평가하는 변수로서 종종 활용된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여성이 낙인 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이 메커니즘은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고 한국인들은 여기에 체화되어 있다. 이런 물음이 수 만 번은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흡연하는 여성들을 본다. 연기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 이걸 어찌 까먹냐? 평생 기억한다. 그러니 “여성흡연자들이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나의 주장에 그들은 거품을 문다. 가련하지 않은가?

결국 가장 비참한 자는 남자라는 사실

<한겨레 21> 805호의 ‘여학생은 스펙에 목마르다’라는 기사는 대학생 1천 명에 대한 생활·정치이념 실태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스펙관리’에 더 민감한 쪽은 여학생, 실제로 투자시간이 많은 쪽도 여학생, 그 여파 때문인지 성적장학금의 70%가 여학생, 은밀히(?) 교수를 따로 찾아와 강의내용을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경우가 많은 쪽도 여학생(그만큼 공개적인 자료공유를 꺼린다는 것), 수업노트를 안 빌려주는 쪽도 여학생, 취업노하우를 굳이 공유하지 않겠다는 쪽도 여학생이라는 것이다. 아이고, 마음 여리기로 유명한 우리 여대생들. 어쩌다가 이렇게 독한 년이 되었냐? 기사는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한다. 문제는 남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기업이 같은 조건이라면 남자를 선호하니까 여성은 객관적으로 좋은 조건을 보유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 ‘남자가 가진 최고의 스펙은 남자’라는 말은 괜한 소문이 아니다. 덩달아 여자들‘끼리’의 경쟁에서도 엄청난 차별이 존재한다. 외모가 다른 변수를 제압해버리는 경우를 그녀들은 무수히 보고 살아왔다. (물론, 이 외모라는 변수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 자는 당연히 남자다.) 그러니 당연히 수치적으로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스펙에 목숨을 거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거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어 완성한 강의노트를 쉽게 빌려줄 수 있을까? 이 노트가 그녀의 ‘구명조끼’인데?

하지만 이러한 여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유리한 쪽은 언제나 남자라는 거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라.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많던 여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생존하는지. 문제는 이러한 성별 취업차별이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에 있다. 심지어 여자 회사원이 더 강력히 주장한다. “내가 여자지만, 내 밑에는 남자가 왔으면 좋겠다.”면서. 이유를 물어보면, 남자가 훨씬 조직생활을 잘한다나 뭐라나. 대학생들은 이럴 논쟁이 있으면, 꼭 조모임때의 경험을 떠올린다. 전자나 후자나 언급되는 맥락은 동일하다. “여자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의지가 없다!”가 전부다. 그러니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기준이 과연 공정한 잣대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 사회는 여자들이 남자 앞에서 한없이 무능력해지길 원했다. 심지어 남자를 위해서 여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현모양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개념 없는’ 여성으로 말이다. "어딜 여자가~"라는 그 무서운 분위기 하나에 여자들은 찍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면 여성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개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날 지켜주는 남자를 원해요!“라는 하소연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여성들은 ‘약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녀들은 이른바 ‘듬직한 남성을 기다리는 인생’만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자신들의 운명을 언제나 ‘남자의 책임’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여자들은 한없이 남성보다 못난 존재로 규정되었고 그렇게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사회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보다 잘난 남성’에 의존할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정상이었다. 아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겁이 나서 무슨 소리를 하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회사라는 조직은, 조모임이라는 단체집단은 애초에 남자에게 한없이 유리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 안에서는 여성은 단지 여성답게 행동할 뿐인데, ‘가장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찍히게ㅔ 되어있다. 게다가 최근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기업의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조모임 발표는 주로 경영학 수업에서 많은데, 거의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경영학을 복수전공으로도 접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조모임 메커니즘’은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 된다. 이런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여성은 문제아가 되며, 기업은 이러한 점을 중요한 업무능력으로 평가하여 당락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다. 그러니 여자는 취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사회적 약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힘이 약한 여자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으니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녀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노예를 거느린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담배 피는 것조차도 마치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이해한다. 그런 하찮은 여자가 군대에 관한 언급을 하니 꼭지가 돈다. 아 정말 웃긴다. 이처럼 공정하지 못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마치 객관적인 실력의 차이인줄 알고 남자들이 까부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이 남자들. 결국 지금 가장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by och7896(20110101)



두고두고 읽기.

 

 

한국 남자 멸종론: 청년세대의 여성 혐오에 관하여

http://slownews.kr/48631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것....변화는 순식간에 온다"
http://m.biz.khan.co.kr/view.html?artid=201510041332171#csidx3f952a4a50fe9509ceba89ba4e6fd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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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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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도 가벼운데다 내용이 어렵지 않아
금세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예상하듯(?) 나 또한 동생에게 읽게할 의도가 다분
했으니.... 책이 쉬운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동생과 아빠에게 해줄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이 바로
`(미래 혹은 지금의) 내 딸이 살 세상을 위해 남자들이 변화해야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tvn의 어쩌다 어른에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의 강연을 통해서 지혜와 창의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낯설게 보기` 였다.

인간이 진보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out of box`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저자가 남자들이 끊임없이 성찰하며 나아가도록
독려하듯,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지 하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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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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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오랜 기간 동안 짧게 짧게 이어 읽었다.
책 내용에도 있듯 "전쟁"이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먼 미지의 세계 였는지..
그 동안 나는 "진짜" 전쟁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읽으면서 몇 번이고 눈물이 나올 뻔했다..


책을 읽는 중에 얼떨결에 실탄 사격을 하게 되었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들어간 탓에, 첫 발을 쏘자마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장이라도 옆에 있는 직원 팔을 붙잡고 내보내 달라고 안하겠다고,..
빌고 나오고 싶었다... 심장이 어찌나 뛰던지 도무지 진정이 안되었다.
12발을 다 썼을 때? 그 때서야 겨우 적응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다시 쏴보고 싶지 않을 만큼 무섭다.)

첫 발 직후, 그리고 제대로 쏴보려고 노력하는 그 내내
얼마나 책 속의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는지.

전쟁도 총도, 무너진 세계 앞에 인간도 무섭고 전부 너무 무섭다.
자꾸만 세계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점점 더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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