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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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오찬호 | 2011.01.01 12:57

** 이 글은 <경희대학교 교지 - 고황>(2010년 12월)에 투고된 글입니다. 아래 글의 상당부분은 제가<페미니스트 웹진 온라인이프>에서 연재하는 <남자가 바라보는 남성계>에서 언급된 바 있으며 약간의 사례와 설명이 첨가되었습니다.

이 글은 자살행위다. 왜? 몰라서 물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언급했잖아. 그럼 얘기 끝난 것 아니야? 그런데 페미니즘을 제대로 언급하고 장렬하게 전사라도 하면 그나마 분하지는 않을게다.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든 ‘여성을 옹호’한다는 느낌 하나만으로 박살이 난다. 혹은 아주 작은 수위에서다로 ‘남성을 비하’하는 느낌 하나만으로도 마녀사냥을 당한다. 나는 그런 경험을 몇 번 당해봤다. 이것도 몇 번 반복하니 위험을 인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이 생기더라. 가장 중요한 것은 선제공격이다.

전략은 간단하다. 내가 10년 전에 제대했음을 먼저 밝힌다. 이거 하나면 충분한다. 욕설의 절반이 자취를 감춘다. 최소한 ‘군대 안 간 놈의 헛소리’라는 어처구니없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굉장히 강력한 논리적 근거’에서 자유로워진다. 게다가 나는 육군현역으로 26개월을 복무했다. 이것도 중요한 초반 기선제압 작전이다. 군대까지 나 온 남자가 약간이라도 안티 남성의 냄새를 보이면 보통의 공격이 “혹시 공익 아니야?”라는 정도기 때문이다. 이게 내게는 통하지 않을게다. 그 다음은 내 군 생활 ‘내용’을 꼬투리 잡을게다. 분명 고문관이었다고 추측할 듯. 걱정 마라. 전역할 때, 말뚝 박으라는 소릴 들었으니 절대 고문관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포창도 몇 번 받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한 자기소개를 하는 거지? 유치하지만 이해해라. 이건 일종의 ‘방탄조끼’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논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미친 짓이다. 그래서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 이제 어쨌든, 나에게 "군대는 가보고 그런 말 해라~", 혹은 “군대도 안가면서 헛소리는~”라는 해괴망측한 소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방탄조끼가 효과가 짱이다. 이것만 입어도 모든 공격을 사실 ‘다’ 막을 수 있다.

더 웃긴 것은 나는 마초라는 거다. 그런데 그저 한국의 ‘남성 담론’을 약간 비판적으로 언급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에 여성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페미니즘 매체에 칼럼까지 쓰게 되었다. 그 칼럼이 나가는 동안 이리저리 인터뷰도 많이 했다. 이 정도면 평소, 수구보수 꼴통 소리 듣는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누려보지 못할 호사다. 이 글을 청탁 받은 것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마초지만 여성주의자로도 평가받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남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다. (되게 웃긴다. 그들이 불편해하니,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다?) 난 남자가 ‘더’ 잘났다고 뼈 속까지 생각한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잘났다고 자기 혼자 생각하는 것과 자기만의 생각이 마치 하느님이 내려주신 계시인양 이해하고 타인에게 ‘믿음’으로 강요하는 경우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경우다. 내가 주목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 잘못된 믿음은 대개 어처구니없는 자기합리화로 이어진다.

도대체 군대가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아내가 딸을 출산 할 때, 분만실에서 40시간을 함께 한 경험을 인터넷 매체에 올린 적이 있었다. 내용은 아주 교훈적이었다.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 보다 출산이라는 훨씬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는 내용. 고로 아내를 이해하자는 것. 이 정도면 보건복지부 같은 곳에서 “육아를 함께하는 아빠상” 대상감이다. 그런데 글 마지막에 “세상의 모든 엄마들! 정말 대단하다. 비록 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만실 40시간이었지만 남자들이 흔히 핏대 세우는 26개월(내경우)의 군 생활은 실로 장난이었다.”라는 지극히 은유적 구절 하나가 문제를 일으켰다. 이 글은 여러 포털 사이트에 “분만실 40시간 체험, 군대보다 더 무서워”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올라갔고 나는 2천개의 악플 세례를 받았다. 이 중 80%는 글의 제목만을 보고 거품을 물었다. 한국이 이렇다. 출산과 군대가 ‘함께’ 언급되고 이를 저울로 조절하는 느낌을 풍기는 제목만 보고도 클릭을 하고 바로 스크롤을 내려서 댓글을 단다. 그것도 입에 담지 못할 화려한 미사어구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되게 신기한 지점이 발견된다. 2천 개의 댓글이 비슷한 논조를 보인다는 거다. 정리하면 간단. “군대가 더 개고생이다!” 그리고 협박. “쥐뿔도 모르면 까불지 말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개고생이 맞는 거 같다. 사회에서는 시키는 것만 하면 창의성 없다고 욕먹지만, 군대는 시키는 것 ‘외’의 것을 하면 욕먹는다. 그러니 시키는 것만 한다. 그런데 이 시키는 것이 정말 짜증나기 그지없는 것들. 풀 뽑기. 돌 줍기. 농구장에 선 그리기. 테니스장 볼보이. 주임원사 집에 페인트칠. 행정관 이사할 때 짐 날라주기. 대대장 관사 화장실 막힌 거 뚫어주기. 총 들고 경계근무 나가서 신나게 노래 부르고 여자친구와 어디까지 스킨십이 있었는지 아주 자세하게 말하기. 왜? 시키니까. 이처럼 6시에 눈을 떠서 잠 잘 때까지 말 그대로 개고생이다. 세월이 흘러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려야하는 위치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병장의 삶은 정말 개처럼 지겹다. 어떻게든 전투력 ‘축적’을 피하기 위해 요리조리 개처럼 피해 다녀야 한다. 왜? 제대하면 아무 소용없는데 누가 미쳤다고 그런 스펙관리에 몰두하겠어? 그래서 병장들은 그저 D-day 만을 기다리면서 몸조심할 뿐이다. 병장들은 어떻게 하면 짱박힐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정말 개 같은 고민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일관성이 없다. 출산보다 ‘더’ 의미 없고 ‘더’ 고통스럽고 ‘더’ 짜증나는 곳(기간)이 바로 군대라고 해 놓고서도 순식간에 국방부 홍보대사가 된다. 완전 아슈라 백작. 몇 달 전 화제가 되었던 EBS 강사, 군살녀 논쟁을 한번 보자. 내가 놀라는 것은 남자들이 도대체 언제 그렇게도 군대를 좋아했냐는 거다. 모두가 숭고한 군 생활을 모독했다고, 의미있는 군생활을 폄하했다고 난리다. 아니 도대체 술만 마시면 흥분해서 군대 욕 한다고 정신 없었으면서 이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다 거짓말이었어? 이처럼 우리나라 남자들은 ‘개 같은 군대’ 이야기를 밥 먹듯 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여자’가 하면 정말 개처럼 거품을 문다. 그러면서 "군대 가면 정신 차린다" 혹은 "군대 가서 정신 차려야지" 같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여자는 군대를 못 가는데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주장인지.

그렇다고 국방부 홍보대사직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얼핏 이들이 “군대는 정신을 맑게 해 주는 곳!”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 군대가 ‘X같은 곳’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린단다. 이 정도면 엑스맨이다. 아니라고? 무슨 소리. 보통 군대를 칭송하는 무리들은 그곳에서 상대적으로 일상에 대한 소중함을 ‘정신 바짝 들게’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잖아? 그러니까 ‘정신 차린다’는 말의 속뜻은, "개새끼, 군대 가서 개고생하면 얼마나 인생이 소중한지 알지" 정도 아니야? 알고 보니 이들 모두가 군대를 반대하는 엄청난 인권주의자였다니!

그런데 남자들이 취업을 위해서 다시 홍보대사직로서 활약한다. 이들은 자기소개서의 한 단락에 반드시 군대경험을 언급한다. 이런 저런 미사어구가 있지만 정리하면, “군대에서 사람 되었다”는 것. 정말 웃긴다. 스스로 군대‘전’에는 사람 아니었다는 증명을 하는 것 아닌가? "인생을 알 수 있다", "위계질서를 배운다", "조직문화를 체험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등을 말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걸 굳이 군대에 가서 배워야 합니까?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배울 수 있는 목록 아닌가요?”라고 물으면 얘기 끝. 결국 군대가 아니고서는 그런 상식조차 도무지 배울 수 없었다는 자신의 그렇고 그런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나는 꼴이다. “진짜로 남자가 된다!"는 것은 뭐야? 군대에서 성기확대 수술이라도 했다는 거야? 물론 군대 문화를 몸에 익힌 것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었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징병제가 아닌 국가의 남자들은? 장애가 있어서 가지 못한 남자들은? 이들은 미완성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군대를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는 수준 낮은 사회라는 건데, 이 정도면 국격을 떨어트린 죄로 잡혀가지 않나?

“군대 방향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군 생활을 기억하기도 싫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남자들은 지독히도 그때의 ’더럽고 치사한 순간‘을 평생 기억해낸다. 그런데 더럽고 치사하니 “책임져라!”가 아니다. 결국에는 누가 더 더러웠는지를 경쟁하기에 바쁘다. “내가 더 고생했으니 다른 사람은 입 다물라!”는 버전 말이다. 이런 걸 보고 내부식민지화라고 한다.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구조 안의 행위자끼리 바동거리는 모습. "군대는 사회와 다르게 문제가 많은 곳이다"로 시작은 했지만, 마무리는 "그러니까 군대는 사회와 다르다"고 종결되는 모순. 또 이를 지극히 논리적인 것인 양 착각하는 남자들. 심지어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는 말로서 원래의 자신이 '동물'이었음을 인정하는 남자들.

문제는 이러한 이중성이 우리 사회를 정체시킨다는 거다. 군대에 가면 개고생이라고 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사람이 되었다면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마당에 굳이 軍이 앞장서서 변화를 이끌 필요가 없다. 군은 지금까지 이러한 '착한 국민들 덕'을 보고 살았다. 그러니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말을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내가 적시적소에 사용한다는 거다. 문제는 나부터다. 군 복무 시절, "군대에서 죽을 놈 사회에서도 죽는다."의 발언을 몇 번 했다. 나만 그랬겠는가? 나도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했고, 내 이야기를 듣고 또 누군가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故 한주호 준위를 떠올려보자. 야속한 것은 '바다'뿐일까? 누가 그를 바다로 보냈단 말인가? 여보게들. 이분이 58년 개띠야. 조형기, 설운도가 동갑이라고. 53세의 아저씨가 40미터 아래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잠수'를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군인정신이야? 아무리 나라걱정이 먼저인들, 체력에 따라서 '다른 임무'가 부과되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면 과연 이러한 희생이 야기되었을까? 아니, '전우애'만 언급하면 다야? 이런 것이야말로 엄격하게 규정화해서 철저한 복종을 강요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가장 큰 죄인은 바로 '나'다. 그래서 너무나 죄송스럽다. 나부터가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란 말을, "군대갔다오면 철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그를 죽인 거다. 아마도 한 준위는 '전날과 다른 몸 상태'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속삭였다.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진정한 남자'라고. 그렇게 내가 속삭였다. 그리고 등을 밀었다.

왜 남자만 당당하게 흡연하는 것일까?

남녀공학 학교로 강의를 나가보면 쉬는 시간마다 엄청난 인파가 각 단과대 앞에서 흡연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아주 재미있는 특징이 있다. 우선 흡연자의 99%가 남자다. 이것만으로도 놀랄만한 사실. 그 중 90% 정도는 예비역들인데, 이들은 건물입구를 완전히 독차지하고 있다. 간접흡연을 배려하지 않을수록 더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그 평생의 착오가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이들로부터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몇 명의 새내기들이 어색한 흡연포즈를 취하고 있다.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도, 불을 붙이는 모습도, 재를 터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담배를 끄는 모습마저 하나같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또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1%의 여학생들이 아주 예의 바르게 흡연 중이다. 여기서 예의가 바르다는 것은 폼생폼사의 개념이 아니라, 최소한 그녀로부터는 누구도 간접흡연의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거다. 웃긴 것은 이 현상이 여대에 가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거의 모든 흡연자가 지정된 장소를 지킨다. 최소한 건물입구에서 재를 툭툭 털어대지는 않는다.

거리에 나가보자. 지금까지 내 인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여자’가 내 앞에서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당당한 보행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 단 한번도 ‘여자’가 내 아기가 타고 있는 유모차 앞에서 담뱃재를 턴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여자’가 버스 정류장에서, 혹은 횡당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워 나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모두가 남자였다. 그런데 여자는 담배 못 피나? 물론 여자 중에 흡연자 많다. 그러나 나에게 ‘피해를 주는’ 흡연자는 9할9푼이 남자다.

남자들과 이런 논의를 하면 “그래도 여자는 아이를 놓아야 하는데, 담배를 안 피는 것이 건강에도 좋잖아요.”라는 굉장히 유기농스러운 말들을 한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그 외에는 어떤 논의도 발전 못 시킨다. 염병할, 그럼 저 여자가 담배 안 피고 아이 잘 놓으면 무슨 양육비라도 줄 거란 말인가? 또 다른 반론은 “여성흡연자들을 많이 보았다”, “나에게 피해를 준 여성흡연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논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대표적인 것이라면서 다그친다. 그런데 어떤 ‘여성’의 ‘흡연 장면’이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는 이 놀랄만한 기억력이야말로 바로 여성흡연자체를 ‘생소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여성흡연자는 말 그대로 일당백이다. 나랑 내기해도 좋다. 지금 직접 관찰해보길. 집 밖에 나가서 다른 건물로 들어가기 전까지 흡연자들을 카운트하자. 논의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연령을 20~40대로 조절하고 공간변수도 보행을 하면서 흡연하는 경우(이른바 길빵), 그리고 타인에게 피해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버스정류장, 횡당보도 앞으로 제한하자. 1%? 100명의 흡연자가 있다면 여성흡연자는 1명 정도일 것이다. 대구와 같은 보수적인 지역에 가면 0%도 도전할 만하다. 문제는 이 어처구니없는 ‘수치’가 각인 된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1%를 아주 강력하게 기억하는 것은 애초에 1%를 “대단한 무엇”으로 여겨야지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해외에서 삼성, LG 광고이나 현대자동차를 발견하면 반가워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의 눈에는 광고판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여성의 흡연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흡연은 언제나 ‘독특하고’, ‘신기한’ 현장이다. 그나마 이건 좋은 표현이다. 내가 자란 대구에서는 ‘미친 년’, ‘싸가지 밥 말아 처먹은 년’이었다. 그러니까 이 1%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거리의 로또다. 당첨된 로또 번호는 순식간에 캡처가 되고 스캔이 된다. 그 여자도 그렇게 나에게, 남자에게, 사회에서 기억된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질문. 내가 수백 번 물어 보았고 수천 번 들어 본 질문이다. 이 문장에는 “저 남자 담배 펴요”와는 완전히 다른 뜻이 동반되어 있다. 남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흡연여부’를 확인하는 거다. 취향 자체를 묻거나, 혹은 금연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혹은 건강과 관련된 테마가 나올 때 말이다. 그러나 여자의 흡연여부는 거시기하게도 매우 거시적인 차원에서 언급된다. 취향? 그런 것은 애초에 관심 없다. 오직 사람에 대한 평가를 위한 잣대로서 흡연이 도구적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저 남자 담배 펴요”는 “저 남자가 지금 담배를 피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일차원전 의미만 있지만, “저 여자 담배 펴요”는 “아니, 지금 저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네요. 어허. 이것 참”이라는 가치판단이 깊숙이 내포되게 된다. 이처럼 여성흡연은 소개팅의 조건에도, 며느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에도, 사회활동을 평가하는 변수로서 종종 활용된다. “저 여자 담배 펴요”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여성이 낙인 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이 메커니즘은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고 한국인들은 여기에 체화되어 있다. 이런 물음이 수 만 번은 오갔을 것이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흡연하는 여성들을 본다. 연기가 나에게 피해를 준다. 이걸 어찌 까먹냐? 평생 기억한다. 그러니 “여성흡연자들이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나의 주장에 그들은 거품을 문다. 가련하지 않은가?

결국 가장 비참한 자는 남자라는 사실

<한겨레 21> 805호의 ‘여학생은 스펙에 목마르다’라는 기사는 대학생 1천 명에 대한 생활·정치이념 실태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스펙관리’에 더 민감한 쪽은 여학생, 실제로 투자시간이 많은 쪽도 여학생, 그 여파 때문인지 성적장학금의 70%가 여학생, 은밀히(?) 교수를 따로 찾아와 강의내용을 개별적으로 질문하는 경우가 많은 쪽도 여학생(그만큼 공개적인 자료공유를 꺼린다는 것), 수업노트를 안 빌려주는 쪽도 여학생, 취업노하우를 굳이 공유하지 않겠다는 쪽도 여학생이라는 것이다. 아이고, 마음 여리기로 유명한 우리 여대생들. 어쩌다가 이렇게 독한 년이 되었냐? 기사는 그 이유를 친절히 설명한다. 문제는 남자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기업이 같은 조건이라면 남자를 선호하니까 여성은 객관적으로 좋은 조건을 보유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것. ‘남자가 가진 최고의 스펙은 남자’라는 말은 괜한 소문이 아니다. 덩달아 여자들‘끼리’의 경쟁에서도 엄청난 차별이 존재한다. 외모가 다른 변수를 제압해버리는 경우를 그녀들은 무수히 보고 살아왔다. (물론, 이 외모라는 변수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 자는 당연히 남자다.) 그러니 당연히 수치적으로 우위를 증명할 수 있는 스펙에 목숨을 거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거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어 완성한 강의노트를 쉽게 빌려줄 수 있을까? 이 노트가 그녀의 ‘구명조끼’인데?

하지만 이러한 여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유리한 쪽은 언제나 남자라는 거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라. 단계가 올라갈수록 그 많던 여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생존하는지. 문제는 이러한 성별 취업차별이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에 있다. 심지어 여자 회사원이 더 강력히 주장한다. “내가 여자지만, 내 밑에는 남자가 왔으면 좋겠다.”면서. 이유를 물어보면, 남자가 훨씬 조직생활을 잘한다나 뭐라나. 대학생들은 이럴 논쟁이 있으면, 꼭 조모임때의 경험을 떠올린다. 전자나 후자나 언급되는 맥락은 동일하다. “여자는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의지가 없다!”가 전부다. 그러니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기준이 과연 공정한 잣대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이 사회는 여자들이 남자 앞에서 한없이 무능력해지길 원했다. 심지어 남자를 위해서 여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을 ‘현모양처’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개념 없는’ 여성으로 말이다. "어딜 여자가~"라는 그 무서운 분위기 하나에 여자들은 찍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면 여성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는 개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날 지켜주는 남자를 원해요!“라는 하소연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여성들은 ‘약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녀들은 이른바 ‘듬직한 남성을 기다리는 인생’만을 허락받았다. 그렇게 자신들의 운명을 언제나 ‘남자의 책임’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여자들은 한없이 남성보다 못난 존재로 규정되었고 그렇게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사회화'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들보다 잘난 남성’에 의존할 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정상이었다. 아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데 겁이 나서 무슨 소리를 하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회사라는 조직은, 조모임이라는 단체집단은 애초에 남자에게 한없이 유리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이 안에서는 여성은 단지 여성답게 행동할 뿐인데, ‘가장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찍히게ㅔ 되어있다. 게다가 최근 신자유주의의 광풍은 기업의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조모임 발표는 주로 경영학 수업에서 많은데, 거의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경영학을 복수전공으로도 접하는 현실에서, 이러한 ‘조모임 메커니즘’은 아주 일상적인 풍경이 된다. 이런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여성은 문제아가 되며, 기업은 이러한 점을 중요한 업무능력으로 평가하여 당락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다. 그러니 여자는 취업이 어려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사회적 약자로서 존재하게 된다. 힘이 약한 여자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으니 남자들은 자신들이 그녀들을 먹여주고 재워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노예를 거느린 주인으로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담배 피는 것조차도 마치 자신에게 허락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이해한다. 그런 하찮은 여자가 군대에 관한 언급을 하니 꼭지가 돈다. 아 정말 웃긴다. 이처럼 공정하지 못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마치 객관적인 실력의 차이인줄 알고 남자들이 까부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이 남자들. 결국 지금 가장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by och7896(20110101)



두고두고 읽기.

 

 

한국 남자 멸종론: 청년세대의 여성 혐오에 관하여

http://slownews.kr/48631


"페미니즘이 한국을 구할것....변화는 순식간에 온다"
http://m.biz.khan.co.kr/view.html?artid=201510041332171#csidx3f952a4a50fe9509ceba89ba4e6fd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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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글을 쓰라는 이야기가 크게 와닿았다.
늘 미사여구가 범람하는 뻔한 글이나 쓰면서 자만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글쓰기 책 보다는 에세이 느낌이 강해 아쉬웠지만..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쉽고 재밌는 글을 쓸 수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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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웠다 

-오마르 워싱턴- 
(아라비아 시인)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 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려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임을 나는 배웠다. 


사랑을 가슴 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가 내 자신을 때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 둘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웠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친구가 내게 울면서 매달릴 때에는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다.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나는 배웠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믿는 바를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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