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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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에 대한 작가의 평을 읽은 이후 그녀가 궁금했더랬다.  이후 그녀가 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찾아 읽고 기어이 그녀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난 후부터 난 그녀의 팬이 되기로 했다. 그냥, 정이현의 젊은 시선이, 젊은 생각이 좋았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오은수를 그저 소설의 주인공으로만 볼 수 없었던 건, 비단 나뿐이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한국이라는 나라, 그것도 아무 맛도 없는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30을 넘은 '노'처자에게 이 소설은 이미 픽션이 아니다.

화려한 구두를 신고 싶어하면서도 결국 아무 무늬 없는 검은 구두를 사서 신고, 겉으로 의사를 표현하기보다 마음속에서 더 대화가 많은, 확 다 뒤집어 엎고 싶어도 끝내 제도를 거스를 용기는 없는 오은수는 그대로 나의 모습이었다. 늙은 인어공주가 되어 있는.

결혼이라는 불구덩이에 들어가기에는 이미  부모님의 그늘이 편하다는 걸 눈치 챈지 오래됐고, 한편 그렇게 평생 살아가자니 '남편 없는 여자'들이 겪어야할 설움의 레퍼토리도 훤히 꿰고 있어 불안하기도 하다. 스스로 막중한 책임감이 기다리고 있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입장에 서고 싶지도 않고.. 딱 '자발적 미성년'이어왔던 오은수 자체.

그러기에 이 소설은 남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은수처럼 태오가 좁은 싱글 침대가 있는 방에 상주하는 것이 불편했고, 유준이 농담처럼 뱉은 결혼하자는 말에 살짝 흔들렸으며, 어딘가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으면서도 '정상적 인생의 알리바이' 가 되어줄 영수를 영 거부할 수 없었다.

서른 잔치를 넘긴 미혼자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답을 제시해주진 않지만 적어도 나만 '자발적 미성년', '늙은 인어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에 작은 위로는 받을 수 있다.(씁쓸하지만.)

남과 다르면 어때? 당당하게 말하며 살지만 때론,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다름'이 겁이 나서 다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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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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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43쪽

아는 데가 왜 없겠는가. 다만 자기가 선호하는 공간을 입 밖에 냄으로써 제 취향과 정체성을 노출하기가 싫을 뿐이다.-75쪽

이 남자라면, 서로에 대한 감정적 기대 지평을 극도로 좁히고, 상대방에게 온 마음을 던지지 않으며, 피차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그런 관계를 맺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로에게 거창한 기대도 바람도 환상도 환멸도 없는 사이. 남편과 아내라는 기능적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피차 '정상적 인생'의 알리바이가 되어주는 사이.-255쪽

"사실 결혼이라는 게 별거니? 이혼은 또 대수고?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인데, 정작 인간들은 그 속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꼼짝달싹 못하는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284쪽

하는 수 없다. 나한테는 제도를 거스를 만한 용기가 없는걸. 용기를 쥐어짤 건더기가 있어야 말이지.-365쪽

결혼에 안달하는 여자는 꼴불견이라고 생각해왔다. 철저한 독신주의자도 아니었다. 남들이 다 하는 거라면 언젠가는 나도 하게 되지 않ㅇ르까, 막연히 짐작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저 오래 버티고 싶었다.-370쪽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세상의 모든 실체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듯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실체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림자가 없는 것은, 그림자 뿐이다.-373쪽

반복할 수 없다면 후회하지는 않겠다.-432쪽

도망치고도 싶고, 안주하고도 싶었어요. '외롭기도 싫고, 책임지기도 싫었어요. 나는 늘 그 두 갈래 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폼만 잡으며 살아온 것 같아요.-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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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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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저희들 맘대로 국민으로 만들어놓고 이래저래 세금을 뜯어간다니까. 그러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피지배층이라는 얘기야? 정말 웃기고 있어."-24쪽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뿐이다.-348쪽

"인간이란 모두 전설을 원하지. 그런 전설을 믿으며 꿈을 꿔보는 거야."-51쪽

분명 이 세상에는 흑백을 분명하게 가리지 않는 게 더 좋은 일도 있는 것이다.-169쪽

"뭐랄까, 일하기 싫은 거, 돈 못 버는 거, 출세하지 못한 거를 무슨 간판처럼 내세우는 것 같아. 무조건 정의만 부르짖으면 다들 아무 말도 안할 줄 아나 봐."-185쪽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응. 알았어......"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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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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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을 읽든 주로 작가에 치우쳐서 읽는 경향이 있는 내가 요즘 빠져 있는 작가는 오쿠다 히데오다. 몇 권 되지 않는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국내 번역된) 중에서 이 <남쪽으로 튀어!>는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공중그네> <인더풀>보다 깊고 <라라피포>보다 밝은, 순수문학만큼 골지르지 않지만 아주 대중소설처럼 가볍지만도 않은 소설이다. 밑줄 그어 외워두고 싶은 데가 너무 많아서 남에게 알려주기 아까운 소설, 나만 몰래 알고 싶은 작품이라고 할까.

 

이 작품은 초등학교 6학년짜리 소년 지로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이래저래 고민거리도 많을 사춘기 소년 지로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 이치로.

완전 안하무인에 덩치까지 산만하고 목소리는 더더욱 큰 아버지 이치로의 존재는 지로에게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다. 목소리가 얼마나 크면 옆집 할머니가 텔레비전 소리가 다 안 들린다고 할 정도다.

아버지는 툭하면 공무원들과 싸우고 지로에게는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와, 우리 아빠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읽다보니 지로의 고민에 백배 공감. 트러블 메이커인 아버지가 독자인 나로서도 무척이나 곤혹스럽다. 학교에 떡 하니 나타나 선생님들과 싸우질 않나, 경찰을 보고 "멍멍 짖어봐!" 하질 않나, 불량배에게 제대로 걸려서 우울하기 그지없는 아들에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프로레슬링이나 한판 하자고 수작을 걸어오지 않나, 눈물마저 핑 돌 지경이다.(하지만 소설의 중반을 지날 무렵, 이런 아버지에게 점점 매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로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즈음, 나도 슬슬 이치로가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1권에서는 이런 '골칫덩어리' 아버지의 일상, 지로의 학교에서의 생활, 친정집과 인연을 끊고 살아야 했던 어미니의 사연 등이 펼쳐진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캐릭터들도 읽을거리인데, 어딘가 당돌한 데가 있는 누이동생 모모코, 반항적인 누나 요코, 애늙은이 같은 무카이, 범생이 린조, 작지만 당찬 준, 비뚤게 자랐지만 마음만은 순수한 구로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당 가쓰 등 지로와 이치로 외에도 각각의 캐릭터들은 각각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소설에 활력을 더해준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어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지로네 가족은 남쪽 섬으로 향하고, 2권에서는 남쪽 섬에서의 일상이 펼쳐진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여유로운 생활은 도시의 생활을 담고 있는 1권과 사뭇 분위기가 다른 재미를 준다.

 

상당한 볼륨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짧고 템포가 빨라 단숨에 읽힌다. 그리고 2권이 끝나갈 무렵에는 다 읽어버리는 것이 약간 서운해지기도 했다.(누구는 밥을 먹으면서 없어지는 밥을 보면 슬프다던데, 뭐 그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때로는 웃고 때로는 감동받고 때로는 위로받으면서 연휴 동안 <남쪽으로 튀어>를 즐겼다.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곳곳에서는 대리만족을 느꼈고, 이치로의 굳건한 심지를 통해서는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어느새 자신의 신념이 아닌 사회의 신념, 타인의 신념을 스스로의 가치관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비겁함을 택한 현대인들에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중략)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며 일침을 가하며서도 그렇게 소신껏 살아갈 용기까지 선사하는 고마운 작품이다.

청소년 권장도서로서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더없이 훌륭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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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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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랫동안 책을 붙잡고 있었다. 책이 재미없다거나 혹은 어렵다거나 안 읽혀서가 절대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사정으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끝장(?)을 보게 된 것이다. 아마 줄거리를 따라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매일 밤 한 두 가지 이야기를 천천히 즐겼다. 혼자 키득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엎드린 채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면서 김영하의 글에 빠져들어갔다.

많은 작품을 읽지 않아도 금방 팬을 자처하고 나서게 되는 작가가 있다. 김영하도 그중 한 사람인데, <랄랄라 하우스>를 읽고나니 더욱 위대해 보인다.

쉽게 읽히고 문장은 달고 맛있는데, 가끔 나의 무지함에 자극을 줄 정도로 쓰기도 하다. 쓴 약이 몸에 좋듯, 그 자극은 몸에 좋은 자극일 터. 독특한 작가의 시선과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문장들을 읽는 것이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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