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감정 수업 - 세상이란 파도를 거침없이 타기 위한 자현 스님의 가르침
자현 지음 / 오아시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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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파도를 즐기는 삶, ‘어쩔 건데!’의 선구자 부처를 만나다

더운 열기에 감정마저 널뛰듯 짜증이 치솟는 나날이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지쳐가던 차에, 유쾌하게 서핑을 즐기는 부처님의 모습이 담긴 표지에 홀린 듯 끌려 《부처의 감정 수업》을 펼쳤다.

저자인 자현 스님은 경악스러울 만큼 많은 학위와 논문을 가진 분이다. 넘치는 지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도덕과 규범’이라는 견고한 벽을 깨뜨리고 자신이 던질 파격적인 메시지에 권위라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 판을 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가 판을 깔고 던진 메시지는 의외로 명쾌했다.

“감정 그 자체를 대긍정하라.”

감정을 들여다보고 고요한 호수처럼 다스리라는 뻔한 조언이 아니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고 배워왔다. 화를 내면 안 되고, 질투해서도 안 되고, 미워해서도 안 된다. 좋은 사람이라면 늘 너그럽고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 설혜심과 푸코가 짚었듯 인간은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사회적 매너와 규범을 내면화해 왔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반복해서 학습하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는 외부의 감시가 필요하지 않게 된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시선을 스스로 머릿속에 설치해 놓고, 원초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스스로를 검열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 아닐까?’

화가 나는 것보다 화가 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서운한 것보다 서운해하는 자신을 탓한다. 그렇게 감정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마음의 불일치를 겪는다.

그런데 이 책은 묻는다.

우주의 거대한 시간 속에서 한 점에 불과한 존재인 우리가, 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기준에 갇혀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야 하는가.

감정을 긍정한다는 것은 감정에 노예가 되어 아무렇게나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감정과 행동을 분리하는 것이다.

연기파 배우가 비극적인 역할에 깊이 몰입하면서도 카메라 밖에서는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처럼, 감정 속에 충분히 머물면서도 그 감정 전체가 곧 ‘나’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교의 ‘진속이제(眞俗二諦)’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화가 나면 그 화를 해결해야 하고, 관계 속에서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모든 감정과 사건을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

내 안에서 들끓는 화와 짜증도 마찬가지다.

그 감정은 나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 바람을 타고 내 앞에 떠밀려온 ‘사공 없는 빈 배’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 ‘빈 배’라는 비유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은, 얼마 전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유치원 등원 시간이었다.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야하는데 누군가 모든 층의 버튼을 하나씩 눌러놓은 것이었다. 빨리 내려가야 하는데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멈춰서며 올라왔다.

순간 화가 치밀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해놓은 거야?’

빨리 버스를 타야 한다는 생각까지 더해지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누군가 일부러 나를 방해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의 나는 분명히 화가 나 있었고, 그 화에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까지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다 올라온 순간, 안에서는 나와 같은 고층에 사는 피해자들이 버튼 취소를 누르기 위해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버튼을 누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각이 확정됐다.

참 이상했다.

그렇게 치솟던 화가 오히려 가라앉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미 없으니까. 무엇보다 ‘조금만 빨리 가면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기대도 사라졌다. 이제 와서 누군가를 탓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도 없었다.

화를 쏟아낼 대상도 사라졌고, 그 화를 통해 되돌리고 싶었던 미래도 사라진 것이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여러 개 눌려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화의 크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누군가 나를 방해했다’고 생각할 때는 화가 났고,

‘이미 늦었고, 이제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화가 잦아들었다.

그때 ‘빈 배’의 비유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는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에 붙인 이야기 때문에 더 화를 내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무시했다.

누군가 일부러 나를 방해했다.

누군가 나에게 피해를 줬다.

그렇게 감정에 ‘대상’과 ‘의도’를 붙이는 순간, 화는 점점 커진다.

하지만 그 배가 비어 있다면 어떨까.

화를 낼 대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화가 났던 사실이 틀린 것은 아니다. 화는 분명히 일어났다. 다만 그 화에 반드시 범인을 만들어주어야 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화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화가 시키는 대로 행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감정의 긍정을 이해하게 된 지점이다.

감정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아, 지금 내가 화가 났구나.’

하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내가 그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

현실의 난관은 현실의 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해야 할 말은 하고, 필요한 일은 하고, 때로는 관계를 정리하기도 하면서 담담히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의 파도까지 억지로 잠재울 필요는 없다.

힘들면 당당하게 남 탓도 좀 하고, 때로는 “어쩔 건데!”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도 필요하다.

나는 그동안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을 자주 혼동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화를 참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용서해야 하고, 나 자신을 끊임없이 다독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정작 내 감정은 어디에 있었을까.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기쁘고, 화나고, 억울하고, 질투하고, 서운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마음이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다.

머무는 곳이 현실이든 가상이든, 느끼는 내가 진짜라면 그 감정 역시 진짜다. 영혼과 마음을 부질없이 양분하고 어느 쪽이 진짜인지 끊임없이 검열할 필요도 없다.

그저 세상에 유일한 ‘나’로서 살아가는 것.

삶이라는 바다에서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억누르려다 휩쓸려 다치는 대신, 그 파도 위에 올라타 유유히 서핑을 즐기는 것.

어쩌면 자현 스님이 말하는 감정 수업은 그런 것이 아닐까.

감정을 없애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

화가 나면 화가 난 나를 바라보고, 슬프면 슬픈 나를 바라보고, 때로는 엉망진창인 나까지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파도가 지나가면 다시 노를 저어 내가 가야 할 곳으로 가는 사람.

이 책은 나에게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오래된 숙제에서 잠시 벗어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감정을 통제하는 삶보다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삶.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를 끊임없이 검열하는 삶보다, 내 삶의 무대에서 당당한 주인이자 관객으로 살아가는 삶.

그래서 오늘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또 파도가 밀려온다면, 애써 잔잔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

화가 나면 화가 난 대로 인정하고,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바라보고, 서운하면 서운한 나를 그냥 두어보려고 한다.

다만 그 감정에 범인을 만들어주거나, 그 감정이 내 삶의 운전대를 잡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으려 한다.

어차피 파도는 계속 밀려올 테니까.

그렇다면 억지로 잠재우기보다 올라타 보는 수밖에.

어쩔 건데.

파도가 왔으면, 서핑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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