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최신 버전으로 새롭게 편집한 명작의 백미, 죽음에 맞서는 진실에 대한 열정!
알베르 카뮈 지음, 서상원 옮김 / 스타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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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스타북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 어쩌면 어제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본문 p.017]

I. 슬픔의 본질

"장의사가 조금 전에 왔습니다. 와서 관을 닫으라고 해야하는데, 그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어머님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안본다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낱추어서 전화로 명령했다.

"퓌자크, 인부들에게 일을 하라고 말하게."

[본문 p.30]

슬픔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슬프며? 누구를 향한 슬픔일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목을 놓아 운다. 대체로.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는 사람도 있다. 간혹.

머리를 산발하고 땅바닥에 퍼질러 않아서 손에보이는것 -대체로 누구것인지 알수 없는 신발 한짝이다- 을 잡고 땅을 친다.

옆에 누군가, 어깨를 감싸안고 "니네엄마가 너를 어떻게.. 어쩌구 저쩌구."

엄마가 나에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시며... 나에게 베푼 은혜, 그 은혜를 다시는 받을 길이 없어서. 운다? 역시 슬픔의 본질은 아니다. 나에게 값없이 베푸는 그 사랑을 다시는 받을길이 없는 아쉬움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공짜 사랑에 대한 아쉬움인가?

사랑하는 혈연, 그 무엇으로도 셈할수 없는 관계의 상실. 마찬가지이다.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 스스로를 나 스스로의 상실감을 위로하기 위하여 눈물을 흘린다.

어쩌다 보면, 솔직한 표현도 가끔 들을 수 있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엄마. 이렇게 가버리면, 나는 어쩌라고오오오~~"

그렇다 결국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슬픔의 본질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을까?

항상. 궁금 하였다.

II. 그리스도의 사랑

"나는 기독교 신자야. 나는 이분에게 자네 죄를 용서를 구하고 있어. 어째서 자네는 그리스도가 자네를 위하여 괴로움을당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는 진절머리가 났다.

[본문 p.101]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김지하 글/김민기 노래, 금관의 예수 中}

우리의 그리스도는 대체적으로 낮은곳에는 임하시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그 '眞實'을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III. 고정관념 그 고색창연한 쓰.레.기.

검사는 어머니가 죽은 뒤의 여러가지 사실들을 요약했다. 내가 냉담했었다는 것, 어머니의 나이를 몰랐었다는 것, 이튿날 여자와 해수욕을 하러 갔었다는 것, 페르낭델 영화, 그리고 끝으로 마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지적했었다.

"배심원 여러분, 나는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본문 p.139,142]

인류의 정신세계를 피폐하게 하는 두가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다고 들었다.

첫째는, 의처증바이러스

둘째는, 고정관념 바이러스


[알베르 카뮈]


뜨거운 햇볕에 볼이 타는듯 했고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이상한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것을 깨달았다.

[본문 p.89/90]

'태양때문에' 살인을 하고 '전에도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라고 하고, 마지막 소원을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그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뫼르소>. <뫼르소>를 앞세운 <카뮈>의 '파라독스'이다. 이 지독한 역리(逆理)의 창구. 알제리의 수도 '알제'인근의 한 양로원에서 죽은 엄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본 책에서는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다.."로 시작되나, 나는 앞의 표현을 좋아한다. 함축성 있으며, <뫼르소>의 내적 표현에 더 근접하다고 본다. 내 마음을 아주 건방지게 표현 하자면, 나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고 할 수 있을것 같다. <뫼르소>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뿐만 아니라 아주 조금이나마 이미 적당한 만큼의 동류를 느끼고 있을 수도.

'슬픔'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 주었다.

나를 항상 당황하게 하는 상황이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하여는 작은 발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엉엉 울며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타인, 특히 누군가의 죽음에 있어서는 눈물이 지극히 인색하였던 것이다. 나를 지극으로 애지중지, 사랑을 아끼지 않았던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군대시절 나의 약간은 자조적인 편지를 받고 통곡하듯 눈물을 뿌렸다는 작은이모의 죽음앞에서, 또 나를 친자식처럼 생각 하였던 진정 에미됨을 누리지 못하는 한을 평생 안고 살았던 나의 '새엄마'의 죽음 앞에서. 나는 눈물을 짜내지 않았다.

아마도, '사랑'과 '슬픔'은 다른궤도를 지니고 있나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슬퍼야 하는것도, 슬프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닌듯이.

아마도, 나는 그들의 죽음앞에서 나 스스로를 위로하는 대신 다른 어떤것을 '묵도'하고 있었나 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날 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본문 p.096]

본인의 감형을 위해 간단한 경우의 말을 맞추자는 변호사의 요구에 그는 그냥, 덤덤히 대답한다. 아니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하여, 본인의 감형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인식과 표현의 기준은 속칭 '일반적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 '일반적인 인식', '일반적인 善'이 '眞實'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토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을 추구 하여야 하는지? '일반적인'을 추구 하여야 하는지.

<뫼르소>가 선택한 '眞實'에 있어 이세상의 '一般的인'의 판결에 대한 마지막 소원을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한는것 뿐"이라고.

작품전반에 속속히 박혀있는 상징적 장치들을 통해 우리의 '一般的인' 認識과 그 認識을 지탱하는 構造가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를 證明한다.





이 세상의 인간은 두부류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유연한 인간, 그리고 경직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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