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아니 에르노

1984books

그녀에게 세상의 절반은 사르트르 였고, 나머지 반은 보부와르 였다.

그녀는 죽을 수도, 또 여성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1941년 부터 2006년 까지 65년의 세월이다. 마치 신문사에서 특별히 보관중인 그 긴시간동안의 신문 원본 릴테이프를 한칸한칸 넘겨온 느낌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기억의 소멸을 선언함으로 '歲月'의 문을 연다.

전쟁과 전후로 대변되는 그녀의 유년 /소년으로서의 시간들은 희망도 절망도 혹은 그 경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실존과 소멸만이 반복될뿐. 전쟁, 전쟁에서의 생존 전쟁이 끝나고 또 전쟁, 또 전쟁이 끝난후 또또 전쟁. 어쩌면 당연할 수 밖에 없었을 수도.

그녀는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한계가지 기록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그랬던 그녀에게,

세상의 반은 사르트르이고 나머지 반은 보부와르 였다.





전쟁이라는 역사속에 기록되는 짤막한 순간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결단코 짧은것이 아니었고,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전쟁의 순간은 어둠과 절망과 피지않을 아침을 기다리는 기나긴 터널과 같은 곳이었다.

그들은 전쟁이후에 또다른 전쟁을 이어 나갔고, 전장은 프랑스 본토에서 베트남으로 그리고 알제리로 옮겨갔다.

그랬다. 모두가 전쟁에 미쳐 있었고 어느정도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녀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먹고 마시면서 그들이 본 것만을, 회상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 했다. 그들은 알고는 있지만 본 적 없는 것 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재능 혹은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에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올라탄 유대인 아이들도, 바르사바 게토에서 아침에 거둬들인 아사한 시체들도, 히로시마의 1000℃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에 역사 수업, 자료들, 영화들로는 해소되지 못한 느낌을 받게 됐고, 화장터나 원자록탄이, 시장에서 버터를 밀거래하고 경보가 울리면 지하실로 내려갔던 시저로가 같은 시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p.26]

징집병들이 계속해서 알제리로 떠났지만, 땅과 바다와 하늘, 위대한 말들과 커다란 슬품, 제라르 필립 그리고 카뮈에게 희망과 의지를걸었던 시대였다. 대형 여객선 프랑스호, 제트 여객기와 콩코드가 생길 것이고, 16세가지 의무교육,문화의 집,공용 시장, 그리고 연젠가는 알제리에 평화가 올 것이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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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눈이 소복히 쌓인 밤길을 걷다가 문득 멈추어서서 뒤를 돌아보면, 내 발자국을 보게된다. 발의 모양과 함께. 그리고 멀리찍힌 발자국부터 시작하여 쌓이는 눈에 묻히어 그 흔적을 지워나가는것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작품속의 소녀, 그녀 뿐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시선을 돌리면 바로 내가 보이는 것이다. 활동사진들이 세월이라는 흐름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 처럼.

가끔 욕실의 거울에 자신의 나체를 비춰볼 때도 있다. 호리호리한 상반신과 가슴, 허리는 매우 잘록하고, 배는 살찍 나왔으며, 무릎 위로 불룩 나온 허벅지는 무겁다. 이제 음모가 줄어서 성기가 잘 보이며 포르노 영화에서 나온 것과 비교하면 음부가 작다. 서혜부에 있는 두 개의 푸른 줄은 임신 했을 때 튼 자국이다. 그녀는 16살 즈음, 성장이 멈춘 이후로 늘 똑같은 육체로 살아왔다는 사실에 놀란다.

[p.221]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 위에 살다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었으며, 그 수많은 지나간 오늘들은 다시 어제로 박제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던 그녀가 틀렸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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