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게 범죄

트레버 노아 지금/ 김준수 옮김

부키 펴냄/ 423쪽

남아공 혼혈출신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검은대륙의 주인들, 그들에게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던 '희망봉'의 나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트레버는 성격에 맞는 코메디언으로 발을 들였다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서 그의 입담과 그의 재치가 빛을 발한며 일약 인기 프로그램진행자로 발돋움한다.

책을 대하면서 무언가 익숙하다는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오래전 읽었던 '자기앞의 생', 또는 '양철북'에서 받았던 사회와 기성세대에 대하여 이중시선을 통한 해학적 카타르시스.

그래도 하고싶은, 하고싶었던 말들을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자세로 독자에게 전달 가능하게 하였음은 성장기 고향에서의 무수한 에피소드를 통해 경계에서의 생존을 가능케했던 노련함 이었을지도.

I.

1488년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발견하였으며, 당시에는 '폭풍의 곶(Cape of Storms)'으로 불리웠던 '희망봉' 그후 1497년 V.d.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며 중간 기착지로서 그 중요도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다.

이전까지는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고 일컷는 원시부족이 나름의 사회를 일으키고 그들만의 문명을 일궈나가고 있었다.

17세기 중엽 유럽으로부터 건너와 나름대로 뿌리를 내린 네델란드계 백인들이 20세기 중반 정권을 잡은후 극단적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제도인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괴물체제를 세우고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국제적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작용과 국내투쟁의 결과 흑인들의 인권을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을 함께 겪는다.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겨지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혼란이라는 경로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도기적 혼란은 '내란'이라는 특수하고도 더욱 잔혹함을 나타낸다.

당시 민주주의가 아파르트헤이트에 승리했다며 이를 무혈혁명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건 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흑인들의 피는 거리에 흘러 넘쳤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붕괴됐으니 우리는 이제 주도권이 흑인들에게 넘어오리란 걸 알았다. 문제는 '어느 쪽 흑인이냐'였다.

[p.26]

혼혈인들이 항상 잠복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에 언제든 자신의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백인들을 정부에 동조하게 만들었다. 백인 부모 둘이 아이를 낳으면 정부는 혹시 아이의 피부색이 너무 어둡지 않은지를 조사하고 판단했다.

[p.176]

아파르트헤이트는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 모든 그룹들에게 그들이 클럽에 입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인종 탓이라는 인식을 주입시킨 것이다.

[p.177]

나쁜방법으로, 그러나 정확한 방법으로 보자면 3개등으로 분리차별 되어진 인간들의 집단중 2등 국민의 1등국민으로의 계급투쟁과정으로 볼수도 있는 철저히 유물론적관점의 바탕에서 갈등과 사회적 부조리가 만연된 충분히 차별적인 사회에서 트레버는 그야말로 우월한 변색동물이었다. 마치 아Q정전 아Q처럼.

II.

유럽인들이 전해준 소위 '문명'이라는 것은 그들의 '유일신'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그들은 먼저 정신세계를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사상은 참으로 우수하여 핍박받으면서 감사하게 만들고, 고통속에서도 손뼉치며 기뻐하게 만들었다. 속칭 잘되어도 감사하고, 잘못되어도 역시 감사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이었다. 기도하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하도, 또 노래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이렇게 몇시간이고 계속하다가 항상 "아멘"이란 말로 끝났다. "아멘"을 하는 데만도 5분은 족히 걸렸다.

"아멘. 아-아-아-멘, 아-아-아-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멘, 아-아-아. 멘-멘-멘.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메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엔."그리고는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각자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밤, 다른 집에서 똑같은 일이 이어졌다.

[p.64]

트레버가 사춘기를 맞으며 소위 '正體性'이라는 개념에 눈을 뜬다. 하지만 정체성에 눈을 떳다해서 세상이 내편으로 바뀌는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대편으로 돌아서는것도 아니다. 그냥 빨리 적응하는편이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을 받아들이는것이 최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바로 그랬다. 항상 아웃사이더 였다.

아웃사이더가 되면, 껍질 속으로 숨을 수도 있고, 익명으로 활동할 수도,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p.206]

남아공은 이렇게 바벨탑이 됐다. 상대가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대화를 이어 나가느라 얼이 빠진 사람들을 매일 볼 수 있다. 줄루어와 츠와나어가 가장 흔하다. 총가어와 페디어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한다. 자신의 언어가 흔한 쪽일수록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될 가능성이 적어진다. 자신의 언어가 비주류 쪽일수록 두세 개 언어를 배우게 될 가을성이 높아진다.

[p.234]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심어준것들중 정신세계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것은 욕망이라는 잠들어있던 괴물을 깨워 일으킨 것이다.

욕망을 동반한 의지를 지닌 인간들이 모이면 첫째로 생기는 것이 혼란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그러한 혼란속에서 나름의 특색있는 질서를 찾아나간다. 아니 만들어 나간다. 그러한 질서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니깐.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발전'이라고 부른다.

나는 홀로코스트가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잔혹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서구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물론, 홀로코스트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구음할 때가 많다. 과연 콩고에서와 같은 아프리카의 잔혹 행위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

콩고에서 고무를 수확하다 죽은 흑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트란스발의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죽은 흑인들의 수는?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렇다, 히틀러가 역사상 최악의 미치광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그는 단지 역사책에 기록된 독재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

[p.286]

범죄라는 개념은 도데체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조직과 사회의 질서에의 거역을 뜻하는 범죄와 유일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범죄, 이천여년전부터 그 두가지가 섞여버렸다. 그것이 인류 최대의 불행이 되어 버린 것이다.

불행이라는것은 행복이라는 이생에서 천국을 맛볼수있는 기회에 대한 손실이다.

그렇다면, 그 손실의 책임은 어디로 주어지는것이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일까? 왜 주범은 항상 감사와 찬양을 받고, 잡범은 죄의식의 구천을 떠돌아야 하는 걸까?


문명이란 인간의 생존환경요소 중에서도 제법 중요한 개념이다. 이들의 충돌은 질서의 충돌이다. 상대성의 기준으로 비교평가되며 충돌하는 질서속에서 정답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정답과 오답이 공존하며 혼란스럽게도 그 둘은 가만앉아서도 자리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모두는 제2 혹은 제3의 트레버로서 각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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