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A.J.P.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페피퍼로드/ 357p

독서기간을 통해 속칭 '바르샤바의 총성'으로 시작되었다는 제1차 대전에 대하여 좀더 깊게 들여다 볼수 있었다. 스스로 가지고 있던 얕고 일반적인 지식에 그 깊이를 더할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시류와 정세의 흐름을 좀더 먼거리에서 바라볼수 있었던 기회를 가졌음에 작가와 출판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세기가 열리던 시기 구한말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나라또한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변방의 약소국가의 일개 시민으로서의 깊은 감회가 남다르다.

다만, 주제가 역사물이고 역사물은 시간별, 지역별, 사건사고별로 전개됨에도 저자는 매개년으로 한정하여 매개년 대단위속에서 서술적으로 풀어나감에 읽는이의 시선이 동분서주, 중구난방의 어려움이 있었음도 고백한다.

배경

수백년간 지배했던 발칸을 떠나는 오스만 투르크. 헤게모니 공백이 되어버린 발칸은 7개의 신생독립국이 서로 이해관계를 갖고 얽혀 있었고 그 주변은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의 열강들이 서로 깃발을 꽂으려 침을 흘리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발칸동맹으로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냈을때 이미 예고 되었다. 다만, 뇌관을 터트릴 도화선에 누가 어떻게 불을 붙이느냐가 문제 였을뿐.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쟁은 독일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사라예보를 방문한 황태자를 저격한 세르비아에 선적포고를 하면서 뇌관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자체전쟁능력이 없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황태자 암살 사건은 핑계였으며,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해야하는 독일제국으로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억제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도움이 필요하였고 결국 발목을 잡히게 된 꼴이었다.

전선의 양상

전선은 크게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구분 되었다. 서부전선은 독일 - 프랑스, 영국 등 독일-연합국간의 전선이었고, 동부전선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 러시아 간의 전선이라고 볼수 있다.

- 서부전선

서부전선에서는 개전초기 독일이 파리근교 60마일까지 진군하며 선전 하였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를 프랑스땅에서 벌였다고 볼수 있다. 프랑스 국토가 전쟁터였다.

독일은 술리펜작전을 기본적 전술로 하여 벨기에를 경유, 프랑스 북부를 집중 공격하였으며 작전은 성공적인듯 프랑스 파리에서 60킬로 지역인 '마른강'까지 진격하였으나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빼내는 바람에 공략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결국 '마른강'동부에 참호전선을 형성하여 전쟁말기까지 상호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일관하게 된다.

[솜전투, 베르됭 전투]

- 영국-독일 해상전

영국이 러시아로부터 독일의 암호수첩을 전달받고 독일의 작전개시를 미리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독일의 해상공격을 효과적으로 침몰시키지 못하고 수치상으로는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전력손실을 보았다. 이것이 유틀란트 해전이었으며 어느쪽도 개운하지 않았다. 독일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 해양에서는 영국을 이길수 없다는것을 자각하고 해상전술을 무제한 잠수함작전으로 전환, 이것이 독일의 유일한 방책이라 판단하고 잠수함 건조와 잠수함전에 전력투구 하는 계기로 삼는다.

- 동부전선

동부전선중 독일-러시아 전투에서는 일찌감치 독일의 승리로 굳어져버려 러시아는 이후 독일국경을 건드리지 못하였고 상대적으로 약체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집중 공격하였으며 이른바 '브루실로프 공세'를 감행하여 갈라치아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독일의 지원으로 러시아의 전선은 다시 후퇴하여 갈라치아는 다시 회복하게 된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10월에 걸쳐 레닌을 주도로 하는 볼세비키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여 로마노프왕조를 몰아내고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며 혁명 성공이후 즉시 독일과 휴전협상에 들어가게 되고 이로써 전선은 서부전선 단일전선으로 이루어 진다. 독일 입장에서는 홀가분한 결과였다.


[브루실로프 전투]

- 지중해 전선(갈리폴리 상륙작전)

중립에 서 있었던 이탈리아가 연합국측에 붙는 대신, 터키(오스만 투르크)가 1914년10월 독일편으로 참전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게 러시아후방과 흑해-지중해로 이어지는 해상권에 위기를 느낀 연합군은 영국 해군장관 처칠의 입안으로 범지중해-흑해의 해상권, 러시아와의 교통로 확보에 이어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여 터키의 군사력을 묶어놓고자 다르다넬스해협의 입구에 돌출되어 있는 서아시아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갈리폴리반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육군과 해군작전부장 피셔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밀어붙인 처칠의 과욕은 좁은전장에 수많은 기뢰를 부설하고 양안에 야포와 중포를 설치하고 기다린 터키군에 의해 무참히 패하게 된다.

단일전선형성이후 독일은 전력상 우위를 보였으나, 참호전을 격파할 신무기의 부재,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전투력 손실, 미국의 연합군측 합류와 대폭적인 지원 그리고 결정적으로 1918년 춘계공세의 전술적 실패로 인해 1918년 가을, 전쟁의 패배를 가늠하게 된다.

종결

전쟁은 1917년 독일-러시아간 먼저 강화가 이루어 졌고, 이후 1918년11월 독일과 연합국과의 휴전협정, 이듬해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베르사유궁에서 독일과 31개 연합국들 사이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잃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으며, 유럽 영토를 삭감당하였다(면적에 있어서 13%, 인구에 있어서 10%). 그리고 단찌히는 자유시가 된다. 또한 전쟁도발의 책임을 물어 전쟁 배상금으로 총액 200억 마르크 (약 330억 달러)을 부과하였다.

또다른 불씨

전쟁은 천만의 장병사망자와 이천만의 민간인 사망자를 낳았다. 군인과 민간인 합하여 삼천만 사망이라는 유례없는 인명을 제물로 삼았다.

전후처리 과정에서 국제연맹이 탄생 하였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터키제국, 독일제국의 영토 혹은 그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이 모두 연합국 관리 또는 독립(실질적 연합국 관리)로 들어갔으며 준비되지 않은 변화는 이후 커다란 혼란과 분쟁의 불씨를 키울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모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연합국들은 크든 작든간 대부분 그들의 공로를 인정 받았던 것이다. 그로인해 대전이후 세계 식민지 지도는 연합국쪽으로 심하게 쏠리게 되었다.

강화조건에따라 과거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결과로 독일에 병합되었던 독일의 '알자스 로렌'지역이 프랑스에 반환 되었고, 루르-자르지역에서 생산하는 철광석을 15년동안 프랑스로 공급하는 등, 독일은 천문학적 전쟁배상금에 휘청이며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지경이 되었다.

한편, 동맹국측에서 연합국측으로 갈아탔던 이탈리아는 60만의 희생이라는 적지않은 피해를 보았음에도 별 보상을 받지못하였고 이후 전쟁후유증으로 나라 경제가 파산직전까지 가게 된다. 이탈리아와 독일, 이 두국가는 국가의 어려움을 민족주의에 기본을둔 각각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해법으로 돌파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다.

대전중반이후 참전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이 의회에서 발효했던 윌슨의 14개조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민족 자결주의'가 새로운 이념으로 대두 되었으며, 이는 많은 제3세계(한국 포함)들에게 독립의 꿈을 품고 그 의지를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대전이후 미국은 명실공히 경제와 군사, 양면에서 대국으로 급부상, 그 영향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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