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전 시집 - 사슴의 노래

노천명 지음/ 민윤기 엮음.해설

스타북스/ 290p

노천명시인의 전 시집, '사슴의 노래'는 총 4권 시집의 합본판이며 권말에 미발표작들과 별도의 강점기시절 친일논란을 일으킨 작품몇을 함께 실었다. 혹자는 "그래도" 하지만, 그녀는 두말할것없이 '親日'人士였다.

親日이라서 나쁜것이 아니다, 文士로서의 武器인 펜을 그릇되게 휘둘렀으며 그 무기로 인해 수많은이들을 홀린것이 허물인 것이다.

그녀는 떠났다, 오래전에 떠났다. 마흔여섯, 짧다할 세월동안 누구보다 恨많고 事緣많은 浮沈을 겪었다. 그녀의 고운 詩心과 樂器의 絃처럼 세세한 울림은 스스로로 인하여 차라리 제 세상을 한껏 가질수 없었을듯, 天壽를 누리지 못한 薄命薄福했던 女詩人, 이제는 九泉을떠나 평화속에 永眠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I. 산호림

1938년에 시인이 자가본으로 발간한 자비출판 시집이며 총 49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고향, 계절, 등 서정적 소재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데, 표현에 겸양이 없다. 가는데 까지 가버린다. 여느 시인작가처럼 고민과 번뇌를 겪은후 응축된 감동의 분출하는 승화가 아니라 그냥 직행해버리는 느낌이다. 과하지 않은 감정의 증폭, 어차피 과하지 않았으니 움츠릴 필요도 없는것 아닌가.

오! 밤, 거룩한 밤이여

영원히 네 눈을 뜨지 말지니

네가 눈뜨면 고통도 눈뜨리

밤이여, 네 거룩한 베개를 빼지 말고

고요히 고요히 잠들어 버려라.

[밤의 찬미 p.43]

시인의 붓끝은 항상 예민하다. 예민하니 시인인 것이다.

작은 벌레소리에도 곱게물든 한잎 단풍에도 시인의 마음은 아픔으로 아련함으로 달려간다.

깨어질듯 하며 튕겨져 울리는 맑은소리, 맑다. 서러운 대신에 맑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맛자락 휩싸지며 돌아서니

머언데 기차소리가 맑다.

[가을날 p.036]

II. 창변

시인의 두번째 시집인 '창변'은 해방을 눈앞에둔 1945년 2월 발행 되었다. 본권에 수록된 29수와 처음공개되는시 11수, 그리고 친일시 15수 전체 55수로 분류 하겠다. 물론, 시기를 고려한 임의 분류이다.

시인의 사물을 관찰하는 물이 크게 올랐다. 사물이 개념들이 눈으로만 귀로만 들려오는것이 아니라 촉수의 다른끝이 심장에 닿아 있는듯 하다.

하지만 그녀는 다만 죽을때까지 철딱서니 없는 예민한 돈많은 집안 귀한 처녀 였던 것이다.

그녀의 1시집 '산호림'에 수록된 '자화상'에 스스로를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칭하였다. 아마도 어느날 문득 치솟은 치기에 스스로 크게 도취하였으리라.

그녀의 유언이나 다름없다는 묘지의 侍婢에도 서운함과 분노, 설익은 자조만이 가득하지 않은가?

우정이라는 것, 또 신의라는 것.

이것은 다 어디 있느냐

생쥐에게나 뜯어 먹게 던져 주어라.

온갖 화근이어던 이름 석 자를갈기갈기 찢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련다.

나를 어디 떨어진 섬으로 멀리멀리 보내다오.

눈물어린 얼굴을 돌이키고

나는 이곳을 떠나련다.

[고별, p.005-006]

그녀는 그냥 아리따웁고 여린 처녀로, 글재주와 적당히 뜨거운 가슴을 습작에만 그리고 일신의 사랑에만 가두었으면 스스로 가장 행복한 女人이었지 않을까?

자신만을 위해 글을쓰고,

사랑하는이를 위해 丹粧하고 노래하는 산골의 이름없는 女人으로 살았더라면..

그래도, 그녀의 글에서 스물셋 처녀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여자 스물셋이면 말하지 않아도 '여자'라 하지 않는가.

소리내 웃지않아도, 목을놓아 울지 않아도.. 충분히 기쁜듯, 충분히 슬픈듯.

슬며시 감추고 늘려가는 詩句에 중늙은이 가슴이 누구엔가 들킨듯 화들짝 화들짝 거린다.

산 넘어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남사당, p.80-81]

풀냄새가 물쿤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나던 길섶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흩잎물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푸른오월, p.083]

그녀의 미발표작품이 권말에 수록되었다.

작품 한쪽 귀퉁이에서 그녀가 슬쩍 내비친 '무상(無常)'이 새롭기도 하다가 이내 사그러든다.

그녀가 분칠하듯 떠올린 '무상'이 뜻과 힘을 얻었더라면 '切望'으로 치달았을터이고, 詩人의 切望은 가슴속에서 무거운 눈물을 머금고 다시 希望을 渴症하는법. 새벽과 斷切된 어둠이 두렵기만 했을터이다.

삼경도 지났는데

법당으로 올라가는 여승 하나

먹물 들인 장삼 깃에 '무상'이 아롱진다.

달 아래 가야산이 밝고 의젓한데

산에도 절에도 붙지 않는 마음…

귀곡새처럼 처량하다.

[산사의 밤, p.233]

III. 별을 쳐다보며

세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는 1953년 부산 피난시절 발행된 시집이다. 전 3부 62편 수록된 시집은 혼돈스런 歲月속에서 또다시 時流를 잘못읽은덕에 호된 곤욕을 치른뒤라 그런지 느닷없는 애국타령에 이제는 측은함도 없지않다.

서울에 남아 인민군을 위해 문학가 동맹, 문화인 총 궐기대회 등 부역활동을 하였으나 인민군 천하는 석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전쟁발발 동년 9월 소위 9.28수복으로 서울은 다시 국방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녀는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 출감후 가톨릭에 입교했다.

몇몇시구는 보기에도 듣기에도 낯간지럽고 귀간지러운면이 적지않아 소개하기도 면구(面灸)스럽기 짝이없다.

한국 전장의 이름 없는 전사여

편히 쉬시라!

훈장 대신 가슴에 별을 차고

그대 길이 땅 위의 평화를 지키는 자 되라.

[무명전사의 무덤 앞에, p.117]

"원수를 갚아다우!"

아버지의 시체는 '의정부' 산기슭에

눈을 뜬 채 쓰러져 있었다.

별을 인 이 밤에도

군화소리 드높이

북으로 다시 북으로-

[북으로 북으로, p.129]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새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p.144]

그녀의 신출귀몰한 正體性에 정신이 아득해 진다.

조선의 넋을 노래하다가, 대동아 공영을 위해 떨어지는 꽃잎이 되자하더니, 갑자기 북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한지 몇 달 되지않아 군화소리 드높여 북으로 가자하고.. 終局, 아이고 억울해라.. 신세타령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피하다가 凶을 본것이 아니다, 잡으려 쫒아간 길이 구덩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길,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 않았는가?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자차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全文]

이름 없는 여인이 결국 되지 못했던 女詩人, 느닷없는 感愴이다. 또 다시 罪많은 歲月을 탓하자.

IV. 사슴의 노래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는 1957년 노천명시인이 세상을 뜬후 1년이 지난 1958년 조카가 흩어져 있던 유고(遺稿)와 미발행 작품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총 42편의 수록작들은 대부분 부침의 세월에 대한 悔恨스런 기억들이다.

받아들일수도 없었고 피할수도 없었던 歲月, 그녀에게만 이토록 모질었던가?

그녀는 强하지 않았고,

그녀는 惡하지 않았고,

그녀는 明하지도 않았고,

文士로서 節하지도 못했다.

다만, 慾을 내려놓을 勇氣가 부족했을뿐.

잠 한숨 못 이루게

남산과 북악이 밤새껏 흐느껴 울었음은

천지가 바뀌는 큰 슬픔이구나.

화려하던 도성은 하루아침

무례한 군화에 짓밟히고

잔약한 백석등 어릿광대 모양

얼굴에 칠들을 하고 어색하게 나섰다.

골목 좁은 길에서 또 상점 앞에서

일찍이 친구들과 더불어 던졌던 얘기를 주움은

길가에 꽁초를 줍는 이와 같은 아쉬움

가로수도 죽은 듯 공포에 서 있는 오후

가까운 이 하나 볼 수 없는 슬픈 거리여

모든 기관이 정지한 죽은 거리여!

개새끼가 물어간대도 돌아볼 친구 하나 없다.

잠 한숨 못 이루게

남산과 북악이 밤새껏 울었음은

천지가 바뀌는 큰 슬픔이었구나.

[회상 全文, p.178]

花因风雨难为色, 人为贫寒气不扬。(화인풍우난부색, 인위빈한기부양).

불혹에 다다라 죽음을 앞에둔 그녀의 '사슴이 노래'는 歡喜의 讚歌가 아니었다. 惋惜의 哀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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