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새싹 인물전 51
이은정 지음, 김혜리 그림 / 비룡소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나라 국어학자 주시경을 읽고

새싹 인물전 51 주시경을 받았을 때 아! 국어학자 주시경이라는 것이 나의 지식의 정도였다. 단순히 국어. 우리말과 글을 연구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우리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도 대단하신 분이지만, 그 글을 우리 백성 우리 나라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쉽게 만들어 주신 분은 주시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한글날 세종대왕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글,말을 위해 노력하신 국어학자분들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어학자 주시경은 1876년 12월 22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훈장님인 아버지께 한문을 배웠어요. 그러다 열두살 무렵 가족들과 헤어져 서울 큰아버지댁으로 갑니다. 거기서 어려운 한문을 배우면서 한자로는 쓸수 없는 소리들을 보며 한자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다 한자와 달리 어떤 소리도 글자로 쓸 쑤 있는 훈민정음을 접하면서 빠져들었어요. 당시에는 훈민정음을 얕잡아보고 언문이라 부르며 무시했지만, 주시경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글은 훈민정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중 진짜 서양에서 들어온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 배재학당에 다니며, 많은 깨우침을 느끼고, 훈민정음을 제대로 공부해서 우리말을 바로 잡기로 마음먹어요.

주시경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수업이 끝난 후 일을 해가며 우리글을 연구했어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사람들이 두루 볼만한 우리글 문법책이 없어서 우리글 문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요. 주시경은 연구를 거듭할수록 우리말과 글이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무렵 독립 운동가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이 한문이 아닌 우리글 신문을 낸다고 하여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기도 했어요.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우리글 신문은 <독립신문>이 나왔어요. <독립신문>은 사람들에게 술술 읽혔어요. 하지만, 정부의 대신들은 <독립신문>을 못마땅해 생각하여 주시경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다 풀려나기도 했어요.

1898년 12월 31일 주시경은 우리글 문법책<대한국어 문법>의 첫 번째 원고를 완성했어요. 이 책은 우리말 자음과 모음의 특징을 밝히고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정리하고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과정을 실어 우리글에 얼마나 큰 뜻이 있는지도 알렸어요.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을 교과서 삼아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후 정부에서 국어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만들 국문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어 우리글의 맞춤법과 발음을 연구했어요.

1910년 8월 우리 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어요. 강제로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은 학교에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어요. 하지만,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을 더욱더 열심히 연구했어요.

1913년 주시경은 훈민정음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좋은뜻이지만, 한문이름인 것을 고민하다 ‘하나이자 크고 바른 글’이라는 뜻의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어요.

1906년 <대한 국어문법>, 1910년 <국어문법>,<말의 소리> 책을 써서 펴냈어요.

주시경은 한글에도 옥편과 같이 낱말의 뜻이나 쓰임이 궁금할 때 언제든 찾아볼수 있는 책의 필요성을 느끼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일본의 간섭과 방해가 심해 다른 나라로 떠나 우리말 연구를 계속할려고 하였어요. 하지만 주시경은 갑작스럽게 병이 나서 쓰러지고 말았어요

1914년 7월 27일 주시경은 서른 아홉의 나이로 영영 눈을 감았어요.

주시경은 평생을 오로지 우리말과 우리글을 사랑하는데 바쳤어요. 한글의 큰 뜻이 바로 설 수 있도록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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